김혜나 "희망을 갖는 것은 섹스보다 비경제적…"
한국일보 | 2010-06-15 09:20:22
[인터뷰] 제34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한 김혜나
"20대의 불편한 진실들 까놓고 말했죠"
"한때 문제아" 꿈잃은 청춘 고통 사실적 묘사
'제리' 수상 보도에 "또 무슨사고 쳤나" 반응
"저는 제도권 안에서 소위 문제아였어요.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온몸을 던져 격렬히 방황하다 보니 '나는 도대체 어디 있을까' 하는, 존재에 대한 고민이 시작됐죠. 관성에 젖었던 삶 가운데로 어릴 때 읽었던 소설들이 미미한 빛으로 다가왔어요. 이젠 내 존재가 소설인 것 같아요."
소설가 한수산 박영한 이문열 조성기 강석경, 시인 김광규 최승호씨 등을 배출한 민음사 주관 문학상인 '오늘의 작가상'. 이 상의 제34회 수상작으로 뽑힌 장편소설 <제리>의 작가 김혜나(28)씨는 막 출간된 빨간 표지의 책을 매만지면서 "정말 기쁘고 신기하다"며 감격스러워했다. "어머니께서 딸이 신문에 나왔다고 친척들에게 말하니까 '이번엔 얼마나 큰 사고를 쳤길래' 하고 반응할 정도였어요. <제리>는 제가 그런 진창에서 통과해온 시간을 반영하고 있죠."
수도권의 2년제 야간대학 학생인 나와, 노래바나 호스트바에서 '선수'로 뛰는 제리. 출발부터 <제리>는 세상에 뒤처진 '신 프롤레타리아' 계급 청춘들의 무의미한 일상과 절망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희망을 갖는 것을 섹스보다 '비경제적'으로 여기는 88만원 세대의 고통을, 충격적인 성애 묘사 등을 통해 현실보다 더 사실적으로 그려낸 이 소설은 실로 불편하다. 김씨는 "명문대에 다니는 친구들도 그것을 진정으로 바라서가 아니라 선택할 것이 없기 때문에 공무원시험을 보거나 대학원에 진학하더라"면서 "희망을 가질 기회조차 없는 20대에게 이 소설을 통해 내 경험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제리>는 대담하게 까놓고 말한다는 점에서 언뜻 정이현씨의 소설 <낭만적 사랑과 사회>와 닮았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김씨는 "<낭만적…>의 인물은 사회적 지위나 기본적인 조건은 갖춘 사람이고, 내 소설은 그조차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말했다. "어디까지가 제 이야기냐고요? 그런 의문이 든다면 성공한 거네요." 에둘러 말했지만 그는 실업계 고등학교로 진학한 뒤 "가출, 정학이 우스웠던" 화려한(?) 이력을 갖고 있다. 스무 살 무렵엔 종로, 홍대 거리를 방황하며 매일같이 술에 찌들어 살았다고 했다.
"그날도 밤새 술 마시고 홍대입구역 계단에 앉아 첫 차를 기다리는데, 아침이 밝아오면서 푸르스름한 허무와 고독이 밀려들더라고요. 나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청주대 국문과에 들어갔다. 중학교 땐 교과서에 실린 '상록수'의 영신이 "잠자는 자 잠을 깨고 눈 먼 자 눈을 떠라"고 말한 문장에 눈이 번쩍 뜨여 근ㆍ현대 한국소설을 섭렵하다시피 했었다. 물론 아무도 '책 읽는 문제아'를 주시하지 않았다. 대학에 들어가서는 윤대녕, 은희경, 배수아씨 등의 동시대 소설과 세계문학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학창시절에는 시 '님의 침묵'에서 님의 뜻을 묻는 객관식 문제를, 문제조차 이해 못했다는 그는 대학에서는 한번도 장학금을 놓치지 않았다.
"글쓰기를 배우려면 백화점 문화강좌를 찾아가야 하는 줄 알았다"고 웃으며 말한 김씨는 "운좋게 윤후명 선생님의 소설교실을 찾아 5년 동안 기초를 닦았다"고 했다. 그 동안 일간지 신춘문예와 문예지 공모에 응모해 네댓 번 최종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좀체 기회는 없었고, 스스로 자신없어하는 단편소설은 접고 장편 창작에 몰두했다. <제리>는 4년 전에 쓴 거친 초고를 3년 동안 퇴고해 완성한 그의 첫 장편이다.
지금도 김씨는 홍대 거리를 누빈다고 했다. 그러나 욕망을 좇아서가 아니라 이제는 욕망을 잠재우기 위해서다. 그곳 요가원에서 강사로 일한다는 그는 "회사에 다니면서는 도저히 글 쓸 여력이 없었다"며 "시급이 세고 시간 활용이 자유로워 시작했는데, 요가는 글 쓰면서 생기는 스트레스를 비워내고 치유하는 데도 효과적"이라고 했다.
"프랑스 여작가 아멜리 노통브는 죽음으로 끌고 가는 강력한 문법, 힘을 다 빼버린 글 두 종류를 다 써냈어요. 저도 파괴적인 문법의 작품과 평이하면서 따뜻한 글을 다 쓰고 싶어요. 모두 소외된 사람들을 정면에서 이야기하려는 거죠."
김혜경기자 thank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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