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여, 가장 마지막까지 울어라 / 신형철(문학평론가)
정호승 시인의 <동아일보> 칼럼을 읽고…
시인은 북한 공격 물증이 없어 우울하고, 나는 ‘시인 비판론’ 물증 앞에 우울하네
우주에서 벌어지는 일의 원인까지도 계산해내는 세상이라고 알고 있는데, 이 나라의 바다에서 배가 부서져 사람이 46명이나 죽었는데도 원인을 알 수 없다고 한다. 차분하게 사실을 따지기보다는 거만하게 의견을 말하는 데 익숙한 일부 언론은 일찌감치 북한의 침공으로 단정하고 막무가내의 기사를 쏟아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답답하지만, ‘46명의 죽음’이라는 유일한 팩트에 근거해 그 죽음을 슬퍼하고 추모하는 것 외에 더 뭘 할 수 있을 것인가. 가까운 어떤 분께서 사람들이 타인의 죽음에 대해 점점 무감해지는 것 같다고 하는 말씀을 들었다. 그게 사실이라면 오늘날 시인들의 책무가 하나 더 늘어난 셈이다. 가장 먼저 울지는 못하더라도 가장 마지막까지 우는 일 말이다. 그러다 정호승 시인이 쓴 ‘절망보다 분노하라, 울기보다 다짐하라’(<동아일보> 4월29일치)라는 제목의 글을 읽었다.
그저 슬퍼하기만 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그 자신이 오래전에 시인의 책무로 떠맡은 일도 그것이었으니.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슬픔이 기쁨에게’에서) 그러나 시인은 그 이상을 하려다가 모든 것을 그르치고 말았다. “단호한 응징”을 촉구하면서 이런 문장을 덧붙이는 식이다. “부처님은 어디선가 독 묻은 화살이 날아와 허벅지에 박혔을 때 먼저 그 화살부터 빼라고 하셨다. 허벅지에 독 묻은 화살이 꽂혀 있는데도 화살을 쏜 사람이 누구인지, 왜 쏘았는지, 활을 만든 나무가 뽕나무인지 물푸레나무인지 먼저 알고 싶어한다면 그것을 알기도 전에 온몸에 독이 퍼져 죽고 말 것이라고 하셨다.” 부처님은 화살을 빼라고 하셨지 화살을 쏘았다는 증거가 없는 이에게 그 화살을 되쏘아버리라고 말씀하시지는 않았다. 망집과의 단호한 결별 혹은 중생 구원의 시급함을 말하는 귀한 말씀이 맹목적인 호전 논리로 각색되었다. 어리둥절한 아전인수다.
그리고 이어지는 문장. “적에게 기습 공격을 당해도 물증을 찾아야만 항의할 수 있는 시대에 사는 나는 우울하다.” 이 놀라운 문장을 초현실주의적이라거나 선(禪)적이라고 하면 그것은 초현실주의자나 선승들에게 예의가 아닐 것이다. 지금 이 시인은 ‘아무런 물증이 없다, 그러나 이것은 북한의 짓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상반되는 두 명제를 동시에 말하고 있다. 이 문장은 그냥 궤변이다. 물증이 없으면 침묵해야 한다. 물증이 없어서 피의사실을 유포하고 여론재판을 유도해 전 대통령을 자살로 몰고 간 검찰의 광태(狂態)와 무엇이 다른가. 시인들이 대개 논리에 연연하지 않는 것은 논리 너머의 진실을 말하기 위해서지 논리에 미달하는 선동에 미사여구를 제공하기 위해서가 아닐 것이다. 문학이 이렇게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이 글 덕분에 플라톤의 <국가>에 나오는 저 유명한 ‘시인 비판론’을 떠올려야만 했다. 진리로부터 두 걸음이나 떨어져 있다는 ‘철학적인’ 이유로 시인을 타박한 것이라 알려져 있지만, 플라톤의 본의는 ‘정치학적인’ 것에 더 가까웠다. 감정에 호소하는 시가 그 강력한 영향력으로 사람들의 이성을 마비시키면 “개개인의 혼 안에 나쁜 통치체제가 생기게끔 한다”(10권 605c)는 것, 그래서 결국 국가의 정체(政體)가 무너진다는 것이 ‘비판’의 깊숙한 이유였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부터 알랭 바디우에 이르기까지 많은 학자들이 이 주장을 논박하기 위해 애써왔다. 그러나 적어도 이번 일에서만큼은 플라톤의 말을 반박하기 어렵게 됐다. 시인은 북한을 공격해도 될 물증이 없어서 우울하지만, 나는 시인 비판론의 강력한 물증 앞에서 우울하다.
부기: 정호승 선생님께.
남의 허물을 탓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비판을 즐기지 않는 편입니다. 하물며 인생과 문학의 선배가 그 대상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플라톤은 시인 비판론의 도입부에서 “어릴 적부터 호메로스에 대해서 갖고 있는 일종의 사랑과 공경” 덕분에 말을 꺼내기가 쉽지 않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결국 그의 논지를 밀어붙입니다. “진리에 앞서 사람이 더 존중되어서는 아니 되겠기에 내 할 말은 해야만 하겠네.” 제 마음이 그와 같습니다. 덧붙여, 설사 천안함을 박살낸 것이 북한으로 밝혀진다 해도 이 글을 철회할 생각이 없습니다. 선생님의 글은 그 사실이 밝혀지기 전에 발표되었으니까요. 시인은 진실의 수호자이지 가설의 선동가가 아니라고 믿습니다. 선생님과 더불어 다시 한번 46명 수병들의 명복을 빕니다.
[2010.05.14. 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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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칼럼 전문
절망보다 분노하라, 울기보다 다짐하라 / 정호승
사건 한달이 넘도록 울분 토하는 한마디 못하는데 어떤 말인들 위로가 될까
우리가 두눈 부릅뜨지 않으면 저들의 두눈이 우리를 보리라
천안함 46명의 수병들을 보내며
봄비가 내린다. 연사흘 줄곧 내리는 이 비는 통곡의 봄비다. 적과 싸워보지도 못하고 일방적으로 당한 채 서해에 수장된 천안함 장병 46명이 흘리는 통한의 눈물이다. 어찌 이 봄비가 새봄을 알리는 생명의 봄비일 수 있겠는가.
‘대한민국은 당신을 영원히 잊지 않을 것입니다.’ 서울광장 분향소 앞에 내걸린 조문 구절이 허사(虛辭)처럼 느껴진다. 결코 잊지 않겠다는 약속의 말이라기보다 이번만은 꼭 잊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말처럼 들린다.
마음속으로 ‘대한민국은 당신들의 원수를 반드시 갚아드리겠습니다’라고 고쳐 읽어본다. 답답했던 속이 좀 풀린다. 그러나 한순간일 뿐이다. 추모 행렬 속에 줄을 서 있다가 국화 한 송이를 장병들의 영전에 정성껏 바쳐도, 이 꽃 한 송이가 그들의 영혼을 위로할 수 없다. 희생 장병에게 1계급 특진과 화랑무공훈장을 추서했지만 죽음을 대가로 한 것이기에 삶보다 더 큰 영광이 될 수는 없다.
묵념을 한 뒤 침묵의 영정을 바라본다. 입대 4개월 만에 희생된, 시신조차 찾지 못한 천안함의 막내 정태준 일병 영정은 차마 바라볼 수 없다. 전직 대통령 한 분께서는 “군에 가서 썩는다”고 했지만 이들은 군에 가서 아예 죽어서 돌아왔다. 아니, 시신으로도 귀환하지 못한 산화자가 6명이나 된다. 옷가지나 머리카락, 손발톱만으로 장례를 치르는 이 국가적 비극 앞에 누구의 무슨 말이 진정 위로가 될까. 신조차 어떤 이의 운명 앞에서는 어안이 벙벙해질 때가 있다는데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다.
시신 없는 영결식에 절망하기보다 분노해야 한다. 눈물을 흘리기보다 분연히 결의해야 한다. 주검으로 돌아온 천안함 장병은 국민과 대통령의 눈물을 원하는 게 아니라 단호한 응징을 원한다. “쿵!” 하는 소리가 들리고 순식간에 천장이 바닥이 되는 순간, 바닷물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필사적으로 살아남으려고 했을 장병들의 죽음의 순간을 상상하면 그렇다. 그들은 군인이었으므로 그 죽음의 순간에 “아, 북에게 당했구나” 하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차갑고 어두운 바닷속에서 20여 일이나 주검으로 놓여 있었다.
나는 지금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오늘을 살아가는 게 과연 자랑스러운 일인가 생각해본다. 어쩌면 그렇지 않을지 모른다. 적이 기습해 함정이 두 동강 나고 46명의 장병이 수장되었는데도 한 달이 다 되도록 적이 누구인지 말 못하는 나라. 그것도 누구의 소행인지 뻔히 알면서도 말할 수 없는 나라. 그 나라가 오늘의 대한민국이다.
돌다리를 두들기고 또 두들긴다 한들 ‘그 돌다리가 바로 그 돌다리’가 아니고 무엇인가. 답답하다. 언제까지 북한의 눈치를 보며 오늘을 살아야 하는가. 북한을 향한 분노의 경고 한마디가 그렇게 두려운가. 이는 마치 북한이 칼자루를 쥐고 남한이 칼날을 쥐고 있는 형국이다. 칼자루를 쥔 자가 칼을 휘두를 때마다 칼날을 쥔 자는 계속 피를 흘릴 수밖에 없다.
대통령은 국가안보 비상사태의 원인을 예단해야 할 고유한 책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천안함 사건 발발 초두에 섣부른 예단과 막연한 예측을 하지 말라고 했다. 그때 나는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자긍심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북한이 기습 공격한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북한의 소행일지도 모른다고 짐작만 하기에는 오늘 조국을 위해 전사한 천안함 장병의 슬픔은 너무 크다.
부처님은 어디선가 독 묻은 화살이 날아와 허벅지에 박혔을 때 먼저 그 화살부터 빼라고 하셨다. 허벅지에 독 묻은 화살이 꽂혀 있는데도 화살을 쏜 사람이 누구인지, 왜 쏘았는지, 활을 만든 나무가 뽕나무인지 물푸레나무인지 먼저 알고 싶어 한다면 그것을 알기도 전에 온몸에 독이 퍼져 죽고 말 것이라고 하셨다.
지금 꼭 우리가 그런 상황이다. 한마디 격노의 일성도 없이 물증을 찾는 데 시간을 보내고, 북한 소행이다 아니다 서로 갑론을박하는 동안 독은 점점 대한민국이라는 온몸에 퍼져 결국 우리를 죽게 만들 것이다.
적에게 기습 공격을 당해도 물증을 찾아야만 항의할 수 있는 시대에 사는 나는 우울하다. 햇볕정책의 결과가 바로 이것인가. 그동안 남한이 북한에 보낸 ‘화해의 햇빛’은 지금 ‘기습공격의 그늘’이 되어 우리 아들들을 수장시키고 말았다.
어떤 이는 그럴 것이다. 지난 정부에서 남북관계를 화해무드로 애써 조성해 놓았는데 이명박 정부가 그 무드를 해치는 바람에 결국 이런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고. 그래서 원인 제공은 이 정부의 잘못된 대북정책에 있다고. 설령 그렇다고 치자. 그렇다고 북한은 우리 장병을 저렇게 떼죽음 당하게 해야 하는가. 그들은 왜 북한의 잘못을 먼저 생각하지 않고 우리의 잘못부터 먼저 생각하는가.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천안함 사건만이라도 북한 소행이 아니라는 주장은 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잊기 잘하는 국민이다. 지금 천안함 장병을 영원히 잊지 않겠다고 하지만 어쩌면 곧 잊어버릴지 모른다. 살아서 영웅이 되지 못하고 죽어서 영웅이 된 천안함 장병들이여! 부디 눈 감지 마소서. 두 눈 부릅뜨고 행여 우리가 당신을 잊지는 않는지 면면히 살피소서. 그리하여 당신을 잊으면 벼락처럼 야단치소서. 당신을 죽음으로 몰고 간 적을 응징하지 못하고 유야무야 잊고 말 때에 천둥처럼 소리치소서. 그러나 오늘 이 영결의 순간만은 편히 쉬소서.
<정호승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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