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시인 白石 연보 ( 1912~ 1995) 1912년 7월1일 평안북도 정주군 갈산면 익성동에서 부친 백시박 (白時璞)과 모친 이봉우(李鳳宇) 씨의 장남으로 태어남. 본명은 기행(夔行)으로 알려져 있지만 기연(基衍)으로도 불렸다. 필명은 백석(白石, 白奭)인데 주로 白石으로 활동했다. 아버지 백용삼은 한국 사진계의 초기적인 인물로<조선일보>의 사진반장을 지냈으나, 퇴임 후에는 귀향하여 정주에서 하숙을 침. ☞ 시 와 사회 / 건국대학교출판부 자료참조 1918년(7세) 오산 소학교 입학. 1924년(13세) 오산 학교 입학. 동문들의 회고에 의하면 재학시절 오산 학교의 선배 시인인 김소월을 매우 선망했었고, 문학과 불교에 깊은 관심을 가짐. 1929년(18세) 오산 고등보통학교(오산학교의 바뀐이름)를 졸업. 1930년(19세) 조선일보의 작품 공모에 단편 소설 [그 모(母)와 아들]을 응모, 당선하여 소설가로서 문단에 데뷔함. 이해 3월에 조선일보사 후원 장학생 선발에 뽑혀 일본으로 유학. 토오쿄오의 아오야마(靑山) 학원 영어 사범과에 입학하여 영문학을 전공함. 이때 함께 선발된 인물은 후에 백석과 자주 교류했으며, 수필을 쓰던 정근양이었다(의과대학생). 당시 일본의 민중시인 이시카와 타쿠보쿠(石川啄木)의 문학에 심취하여 자신의 필명을 '이시카와(石川)'에서 따와 지음 1934년(23세) 아오야마학원 졸업. 귀국 후 조선일보사에 입사하면서 본격적인 서울 생활을 시작함. 출판부 일을 보면서 계열잡지인 <여성(女性)>지의 편집을 맡음. 조선일보를 통해 외국문학 작품(단편소설)과 논문을 번역하여 실음. 1935년(24세) 8월31일 시 [정주성(定州城)]을 조선일보에 발표하면서 이후 시작품에 더욱 정진함. <조광(朝光)>지 편집부 일을 봄. 1935년(24세) 6월의 어느 날, 친구 허준의 결혼식 피로연에서 평생 구원의 여인으로 남을 '란(蘭)'이라는 여인을 만나게 된다. 당시 이화고 학생이었던 통영 출신의 란은 백석의 마음을 온통 휘어잡는다. * 발표 詩 : * 발표 詩 : 定州城(조선일보 8.31), 山地(朝.光 1권1호),여우난 곬族, 統營, 힌밤(朝光 1권2호). 1936년(25세) 1월 20일 시집 {사슴}을 선광인쇄주식회사에서 100부 한정판으로 발간. 1월 29일 서울 태서관(太西館)에서 출판기념회를 가짐. 이 출판기념회의 발기인은 안석영, 함대훈, 홍기문, 김규택, 이원조, 이갑섭, 문동표, 김해균, 신현중, 허준, 김기림 등 11인임. 같은 해 4월에 조선일보사를 사직하고 함경남도 함흥 영생고보의 영어 교사로 옮겨 감. 이때의 생활 소감을 수필 [가재미, 나귀] (동아일보)에 발표함. 이 무렵, 함흥에 와 있던 조선 권번 출신의 기생 김진향을 만나서 사랑에 빠짐. 이때 김진향에게 '자야(子夜)'라는 아호를 지어줌. * 詩集 사슴(1. 21). 가즈랑집등 33편 수록. * 발표 詩 : 統營(조선일보 1. 23), 연자 ㅅ 간(朝光 2권3호), 統營(南行詩抄2)(조선일보 3.6), 固城街道(南行詩抄3)(조선일보 3.7), 三千浦(南行詩抄4) (조선일보 3.8) 1937년(26세) 영생고보 교사로 재직하면서 함흥시의 러시아인이 경영하는 상점에 자주 나가 러시아말을 배움. 고향에서 결혼하라는 독촉을 받고 혼례식을 했으나 초례만 치른 후, 다시 함흥의 자야에게 돌아옴. 그러나 자야는 이 사실을 알고 혼자 서울로 떠남. * 발표 詩 : 北關, 노루, 古寺, 膳友辭, 山谷 (咸州詩抄 1~5)(朝光 3권10호), 바다(咸州詩抄6)(女性 2권10호) 1938년(27세) 영생고보 축구부 지도 교사였던 백석은 전선(全鮮)고보 축구대회에 선수들을 인솔하여 참가함. 이때 자야와의 재회. 그러나 축구부 선수들의 유흥장 출입으로 말썽이 나서 지도교사였던 백석은 함흥학원 측으로 부터 영생여고보로 문책 전보됨. 몇 달 후 영생여고보를 사임하고 다시 서울로 와서 여성지를 편집함. * 발표 詩 : 秋夜一景(三千里文學 1호), 나와 나타사와 힌 당나귀(女性 3권3호). 1939년(28세) 다시 두번째 결혼식을 올리나 다시 혼자서 서울로 올라옴. 이 사실을 알 게 된 자야는 다시 백석 곁을 떠남. 조선일보에 재입사하여 <여성>지의 편집을 돌보다가 다시 사임함. 이 해 말 만주의 신경(당시만주국의 수도, 현재의 명칭은 장춘)으로 가서, 신경시 동삼마로 시영주택의 황씨방에 거처함. 만주국 국무원 경제부에서 얼마동안 근무함. 1939년(28세) 1월 26일 조선일보에 재입사. 백석의 부친 백영옥은 비슷한 시기에 신문사를 그만둠. 백석은 최선을 다하여 월간 [여성]의 편집을 보았다. 백석은 오랜만에 만난 신현중에 이끌려 함께 '란'이 있는 그의 집에 갔다. 10월 21일에는 조선일보를 다시 사임. 그리고는 고향 근처의 평안북도를 여행 하였다. 백석은 친구 허준과 정현웅에게 "만주라는 넓은 벌판에 가 시 백 편을 가지고 오리라"는 다짐을 하고 만주로 향했다. 1940년(29세) 만주의 신찡(新京,지금의 長春)으로 옮겨 가서 '신경시 동삼마로 시영주택 35번지'의 중국인 황씨 집에 거처를 정함. 만주국 국무원 경제부에서 6개월 가량 근무하다가 창씨개명 강요로 곧 사직하고, 북만주의 산간오지를 기행 함. 평론 [슬픔과 진실]을 만선일보에 발표함. 함께 신경에 와 있던 시인 박팔양이 발간한 {여수시초(麗水詩抄)}의 출판기념회에 발기인으로 참가함. 만주 시절 소설가 김사량, 박팔양, 송지영, 안막 등과 교제함. 토마스 하디의 장편 소설 {테스}를 서울 조광사에서 번역 출간함. 이 출판 사업차 서울을 잠시 다녀감. 1940년(29세) 1월 경. 만주 신경에 도착하여 집을 얻느라고 고생을 하였다. 3월부터는 친구들의 도움으로 만주국 경제부에서 근무를 하였으나 백석은 집 문제로 고민을 하였다. 당시 황씨 집은 친구인 이형주와 함께 방 하나를 썼는데 가히 토굴 같은 집이었다. 백석은 이 집에서 벗어나려고 신경 근교의 러시아인들이 사는 집을 얻기 위해 주말이면 집을 구하러 나가기도 하였다. 백석은 북만주의 산간 오지를 방문하여 원시 부족인 오로촌과 솔론들과의 교류를 맺었다. 40년도에 들어와서 백석은 명실공히 한국 최고의 시인으로 자리를 굳건히 한다. 시적 반경도 지리적으로 정신적으로 대단히 깊고 넓어졌다. 1941년(30세) 생계유지를 위해 측량 보조원, 측량 서기, 중국인 토지의 소작인 생활까지 하면서 고생함. * 발표 詩: 힌 바람 벽이 있어(文章 3권4호), 杜甫나 李伯같이(人文評論 3권3호). 1942년(31세) 만주의 안동에서 세관 업무에 종사함. 러시아 작가 바이코프의 작품 [밀림유정] 등을 번역함. 1944년(33세) 일제의 강제징용을 피하기 위해 산간 오지의 광산에 숨어서 일함. 1945년(34세) 해방과 더불어 귀국, 신의주에서 잠시 거주하다 고향 정주로 돌아와 남의 집 과수원에서 일함. 1946년(35세) 고당 조만식 선생의 요청으로 평양으로 나와 고당 선생의 통역비서로서 조선 민주당의 일을 돌봄. 고정훈의 증언에 의하면 이 해 12월 고정훈이 만주에서 귀국길에 차중에서 아들이 열병으로 죽었고, 아들의 시신을 안은 채 평양 대동강변 돌각담 집에서 살고 있던 백석을 찾아가 장례를 논의했다고 함. 당시 백석은 평양 권번 동기 출신의 여성과 동거 중이었다고 함. 1947년(36세) 시 [적막강산]이 그의 벗 허준에 의해 <신천지>에 발표됨. 분단 이후 그의 모든 문학적 성과와 활동이 한국의 문학사에서 완전히 매몰 됨. 1947년(36세) 10월에 열린 문학예술 총동맹 제 4차 중앙위원회의 개편된 조직에서 외국 문학분과원에 올라 있음. 러시아 작가 씨모노프의 『낮과 밤』 을 번역하여 출판 1948년(37세) 김일성 대학에서 영어와 러시아어를 강의했다고 전해짐. * 南新義州 柳洞 朴時逢方(學風 1호). 1949년(38세) 숄로호프의 소설 {고요한 돈강}을 번역 출간함. 숄로호프의 {그들은 조국을 위하여 싸웠다}를 번역 출간함(191면). 고정훈의 증언에 의하면 이화여전 출신의 아내가 있었으나 남편을 몹시 증오하여 외아들을 데리고 월남했다고 함. 이때 남편에게 만약 월남하면 가만 두지 않겠다고 위협했다고 전함. 1950년(39세) 국군이 평안도를 수복했을 때 주민들이 그를 정주군수로 추대했다고 전함. 1953년(42세) 파블렌코의 {행복}을 번역 출간함. 1954년(43세) 러시아의 농민시인 이사코프스키의 시선집을 연변교육출판사에서 번역 출간함. 1956년(45세) 아동문학에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동화문학의 발전을 위하여]등의 평론을 발표함. 1956년(45세) 10월에 열린 제 2차 작가대회에서 『문학신문』의 편집위원이 되어 활발하게 일함. 이후『문학신문』을 무대로 하여 다양한 활동을 함. 1957년(46세) 동화시집 『집게네 네 형제』를 발간함. 『아동문학』4월호에 「멧돼지」외 동시 3편을 발표하여 아동문학 논쟁을 촉발시킴. 「아동문학의 협소화를 반대하는 위치에서」를 발표하여 본격적인 논쟁을 함. : 북한에서 간행된 동화시집 『집게네 네 형제』는 일본에 소개되어 세계적 수준의 작품성이 있다는 높은 평가를 받은 바 있음. ☞ 계집아이 / 이상일 / 도서출판 정상 1958년(47세) 8월 시평 [사회주의적 도덕에 대한 단상]을 발표함. 10월 이후 부르주아 잔재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면서 위축 됨. 1959년(48세) 이전까지 평양 동대원구역에 살면서 ‘조선작가동맹 중앙위원회 외국문학 번역 창작실’에서 러시아 소설과 시 등 번역과 창작에 몰두한 것으로 밝혀졌다. ☞ 2001/04/30 동아일보 1959년(48세) 1월 삼수군 관평리에 있는 국영협동조합으로 내려가 양치기 일을 함. 그동안 전혀 발표하지 않았던 시를 쓰기 시작함. 시 [이른 봄] 등 7편을 <조선문학>에 발표함. 1960년(49세) 이해 12월 북한의 <조선문학>지에 시 [전별] 등 2편을 발표함. 1961년(50세) 12월에 그의 마지막 시작품 [돌아온 사람] 등 3편을 <조선문학> 지에 발표함. 그 이후의 생사는 전혀 확인되지 않음. 아마도 숙청된 것으로 짐작됨. 1962년(51세) 10월 무렵 북한의 문화계 전반에 내려진 복고주의에 대한 비판과 연관되어 일체의 창작활동을 중단. 1963년(52세) 이해에 사망했다는 설이 있었음. 1987년 첫 시집 {사슴} 이후에 발표된 시 작품 등 도합 94편을 정리한 {백석시전집}(이동순 편)이 서울의 창작과비평사에서 발간됨. 이후 월북문인에 대한 해금조치가 단행됨. 그로부터 한국의 많은 독자들에게 그의 작품이 아낌과 사랑을 받음. 1987년 시집 {박각시 오는 저녁}(김학동 편)과 {백석전집}이 새문사에서 출간됨. 1988년 김자야 여사의 회고 기록 [백석, 내 가슴 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이 <창작과비평>지에 발표됨. 1988년 백석 전작시집 [가즈랑집할머니] (새문사) 간행. 1989년 백석 전작시집 [흰 바람벽이 있어] (고려원) 간행. 1990년 시선집 {멧새소리}가 미래사에서 출간됨 1990년 송준에 의해 백석에 관한 많은 자료가 수집되어 실린 [ 詩人 백석 일대기 ] (지나) 1,2권으로 발간. 1992년 흰 바람벽이 있어 - 고려원 시문고 008 | 고려원 | 1994년 {백석일대기1·2}(송준 편)가 도서출판 지나에서 출간됨. 1995년 {백석시전집}(송준 편)이 학영사에서 출간됨. 1995년 백석: 우리 문화의 원형탐구와 떠돌이 삶 (박혜숙) 건국대학교출판부에서 출간됨 1995년 {내 사랑 백석}(김자야 저)이 문학동네사에서 발간됨. 1995년 1월 8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것으로 밝혀짐. 1996년 {백석}(정효구 편)이 문학세계사에서 간행됨. 1996년 백석시전집 {여우난골족}(이동순 편)이 솔출판사에서 간행됨. 1996년 백석문학론집 {백석}(고형진 엮음)이 도서출판 새미에서 출간됨. 1997년 동화시집 {집게네 네 형제}가 도서출판 시와 사회에서 출간됨. 1997년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가 도서출판 시와 사회에서 출간됨. 1997년 {백석전집}(김재용 엮음)이 실천문학사에서 출간됨. 1998년 백석문학상이 제정되어 창작과비평사 주관으로 시행됨. 1998년 정본 백석시전집 {모닥불}(이동순 편)이 솔출판사에서 발간됨. 1999년 백석문학상 제정 시행. 1999년 제1회 백석문학상 공동 수상작 : 집은 아직 따뜻하다 [창작과비평사] | 이상국 : 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 [문학사상사] | 황지우 2000년 제2회 백석문학상 수상작 : 일광욕하는 가구 [문학과지성사] | 최영철 2001년 제3회 백석문학상 수상작 : 가상현실 - 문학동네시선 53 [문학동네] | 김영무 2002년 시인열전 (박덕규) | 청동거울 | 2002년 멧새 소리 - 한국대표시인 100인선집 | 미래사 | 2002년 제4회 백석문학상 수상작 : 신대철 시집『개마고원에서 온 친구에게』(문학과지성사 2001) 2003년 백석 산문집 | 위즈북(ebook) | 2003년 제5회 백석문학상 수상작 : 시인 박영근 (시집 「저 꽃이 불편하다」) 2004년 계집아이 백석 원작/이상일 해설 | 정상 | 2004년 제6회 백석문학상 : 이시영(李時英ㆍ55) 씨의 시집 '바다 호수' 2005년 제7회 백석문학상 : 정양(63) 전주 우석대 교수 / 수상작은 시집 ‘길을 잃고 싶을 때가 많았다’(문학동네). 2. 白石의 詩 가. 여우난곬族 명정날나는 엄매아배따라 우리집개는 나를따라 진할머니 진할아버지가 있는 큰집으로가면 얼굴에별자국이솜솜난 말수와같이눈도껌벅걸이는 하로에베한필을짠다는 벌하나건너집엔 복숭아가많은 新里고무 고무의딸李女 작은李女 열여섯에 四十이넘은홍아비의 후처가된 포족족하니 성이잘나는 살빛이 매감탕같은 입술과 젓꼭지는더깜안 예수쟁이마을가까이사는 土山고무 고무의딸承女 아들承동이 六十里라고해서 파랗게뵈이는山을넘어있다는 해변에서 과부가된 코끝이빩안 언제나힌옷이정하든 말끝에설게 눈물을짤때가많은 큰곬고무 고무의딸洪女 아들洪동이 작은洪동이 배나무접을잘하는 주정을하면 토방돌을뽑는 오리치를잘놓는 먼섬에 반디젓담ㄱ으려가기를좋아하는삼춘 삼춘엄매 사춘누이 사춘동생들 이그득히들 할아버지와할머니가있는 인간에들뫃여서 방안에서는 새옷의내음새가나고 또 인절미 송구떡 콩가루차떡의내음새도나고 끼때의두부와 콩나물과 뽁은잔디와고사리와 도야지비게는모두 선득선득하니 찬것들이다 저녁술을놓은아이들은 외양간섶 발마당에달린 배나무동산에서 쥐잡이를하고 숨굴막질을하고 꼬리잡이를 하고 가마타고시집가는노름 말타고장가가는 노름을하고 이렇게 밤이어둡도록 북적하니 논다. 밤이깊어가는집안엔 엄매는엄매들끼리 아르간에서들웃고 이야기하고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웋간한방을잡고 조아질하고 쌈방이굴리고 바리깨돌림하고 호박떼기하고 제비손이구손이하고 이렇게화디의사기방등에 심지를 몇번이나독구고 홍게닭이멫번이나울어서 조름이오면 아룻목싸움 자리싸움을하며 히드득거리다 잠이든다 그래서는 문창에 텅납새의그림자가치는아츰 시누이동세들이 욱적하니 홍성거리는 부엌으론 샛문틈으로 장지문틈으로 무이징게국을끄리는 맛잇는내음새가 올라오도록잔다 (朝光 1권 2호 1935.) 나.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燒酒를 마신다 燒酒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밤 흰당나귀타고 산골로가쟈 출출이 우는 깊은산골로가 마가리에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올리 없다 언제벌서 내속에 고조곤히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것은 세상한테 지는것이아니다 세상같은건 더러워 버리는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힌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웅앙 웅앙 울을것이다 (女性 3권 3호, 1938. 3) 다. 南新義州 柳洞 朴時逢方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끝에 헤메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木手)네 집 헌 삿을 깐, 한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 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위에 뜻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 밖에 나가디두 않구 자리에 누어서, 머리에 손깍지 베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 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어 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 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턴정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 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이 힘든 일 인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 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 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꿀어 보며, 어니 먼 산 뒷옆에 바우 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어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學風 1권 1호, 1948. 10) 라. 힌 바람벽이 있어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힌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것만이 오고 간다 이 힌 바람벽에 히미한 十五燭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낡은 무명TIT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힌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씿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늬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조 앉어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늬사이엔가 이 힌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골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어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또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하며 주먹질을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하눌이 이 세상을 내일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 쨈'과 陶淵明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文章 3권4호. 1941. 4) 마. 가즈랑집 승냥이가새끼를치는 전에는쇠메돐도적이났다는 가즈랑고개 가즈랑집은 고개밑의 山넘어마을서 도야지를 잃은밤 즘생을쫓는 깽제미소리가 무서웁게 들려오는집 닭개즘생을 못놓는 멧도야지와 이웃사춘을지나는집 예순이넘은 아들없는가즈랑집할머니는 중같이 정해서 할머니가 마을을 가면 긴담배에 독하다는막써레기를 멫대라도 붗이라고하며 간밤엔 셤돌아래 숭냥이가왔었다는이야기 어느메山곬에선가 곰이 아이를본다는이야기 나는 돌나물김치에 백설기를먹으며 넷말의구신집에있는듯이 가즈랑집할머니 내가날때 죽은누이도날때 무명필에 이름을써서 백지달어서 구신간시렁의 당즈깨에넣어 대감님께 수영을들였다는 가즈랑집할머니 언제나병을앓을때면 신장님달련이라고하는 가즈랑집할머니 구신의딸이라고생각하면 슳버졌다 토끼도살이올은다는때 아르대즘퍼리에서 제비꼬리 마타리 쇠조지 가지취 고비 고사리 두릅순 회순 山나물을하는 가즈랑집할머니를딸으며 나는벌서 달디단물구지우림 둥글레우림을 생각하고 아직멀은 도토리묵 도토리법벅까지도 그리우한다. 뒤우란 살구나무아레서 광살구를찾다가 살구벼락을맞고 울다가웃는나를보고 미꾸멍에 털이멫자나났나보자고한것은 가즈랑집할머니다 찰복숭아를먹다가 씨를삼키고 죽는것만같어 하루종일 놀지도못하고 밥도안먹은것도 가즈랑집에 마을을가서 당세먹은강아지같이 좋아라고집오래를 설레다가였다 ( 시집 사슴 1936 ) 바. 統 營 녯날엔 統制使가있었다는 낡은 港口의 처녀들에겐 녯날이가지않은 千姬라는이름이많다 미억오리같이말라서 굴껍지처럼말없시 사랑하다죽는다는 이千姬의하나를 나는어의오랜客主집의 생선가시가있는 마루방에서맞났다 저문 六月의 바다가에선조개도울을저녁 소라방둥이붉으레한마당에 김냄새나는비가날였다 사. 統 營 (南行詩抄) 舊馬山의 선창에선 조아하는사람이 울며날이는배에 올라서오는 물길이반날 갓나는고당은 갓갓기도하다 바람맛도 짭짤한 물맛도짭짤한 전북에 해삼에 도마 가재미의 생선이조코 파래에 아개미에 호루기의 젓갈이조코 새벽녁의거리엔 쾅쾅 북이울고 밤새ㅅ것 바다에선 뿡뿡 배가울고 자다가도 일어나 바다로 가고싶흔곳이다 집집이 아이만한 피도안간 대그를말리는곳 황화장사령감이 일본말을 잘도하는곳 처녀들은 모두 漁場主한테 시집을가고십허한다는곳 山넘어로가는길 돌각담에 갸웃하는 처녀는 蘭이라든이갓고 내가들은 馬山客主집의 어린딸은 蘭이라든이갓고 蘭이라는 이는 明井골에산다든데 明井골은 산을넘어 冬栢나무푸르른 甘露가튼 물이솟는 明井샘이잇는 마을인데 샘터엔 오구작작 물을깃는처녀며 새악시들 가운데 내가조아하는 그이가잇슬것만갓고 내가조아하는 그이는 푸른가지 붉게붉게 冬栢꼿 피는철엔 타관시집을 갈것만가튼데 긴토시끼고 큰머리언고 오물고물 넘엣거리로가는 女人은 平安道서오신듯한데 冬栢꼿피는철이 그언제요 녯 장수모신 날근사당의 돌층계에 주저안저서 나는 이저녁 울듯울듯 閑山島바다에 뱃사공이되여가며 녕나즌집 담나즌집 마당만노픈집에서 열나흘을업고 손방아만찟는 내사람을생각한다. (조선일보 1936. 1. 23 ) 아. 내가생각하는것은 포근한 봄철날 따디기의 누굿하니 푹석한 밤이다 거리에는 사람두 많이나서 흥성 흥성 할것이다 어쩐지 이사람들과 친하니 싸단니고 싶은 밤이다 그렇건만 나는 하이얀 자리우에서 마른 팔뚝의 새파란 피ㅅ대를 바라보며 나는 가난한 아버지를 가진것과 내가 오래 그려오던 처녀가 시집을간것과 그렇게도 살틀하든 동무가 나를 벌인일을 생각한다 또 내가 아는 그 몸이성하고 돈도있는 사람들이 즐거이 술을 먹으려 단닐 것과 내손에는 新刊書 하나도 없는것과 그리고 그 <아서라 世上事>라도 들을 류성기도 없는것을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이 내눈가를 내가슴가를 뜨겁게 하는것도 생각한다 (女性 3권 4호 1938. 4) 자. 바 다 바다ㅅ가에 왔드니 바다와 같이 당신이 생각만 나는구려 바다와 같이 당신을 사랑하고만 싶구려 구붓하고 모래톱을 올으면 당신이 앞선것만 같구려 당신이 뒤선것만 같구려 그리고 지중지중 물가를 거닐면 당신이 이야기를 하는것만 같구려 당신이 이야기를 끊는것만 같구려 바다ㅅ가는 개지꽃에 개지 아니 나오고 고기비눌에 하이얀 해ㅅ볓만 쇠리쇠리하야 어쩐지 쓸쓸만 하구려 섧기만 하구려 (女性 2권 10호 1937. 10) 차. 그 사람을 사랑한 이유 詩 / 이생진 여기서는 실명이 좋겠다 그녀가 사랑한 남자는 백석白石이고 백석이 사랑했던 여자는 김영한金英韓이라고 한데 백석은 그녀를 자야子夜라고 불렀지 이들이 만난 것은 20대 초 백석은 시 쓰는 영어 선생이었고 자야는 춤추고 노래하는 기생이었다 그들은 죽자사자 사랑한 후 백석은 만주땅을 헤매다 북한에서 죽었고 자야는 남한에서 무진 돈을 벌어 길상사에 시주했다 자야가 죽기 열흘 전 기운 없이 누워 있는 노령의 여사에게 젊은 기자가 이렇게 물었다 천억을 내놓고 후회되지 않으세요? 무슨 후회? 그 사람 생각 언제 많이 하셨나요?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는데 때가 있나? 기자는 어리둥절했다 천금을 내놨으니 이제 만복을 받으셔야죠 ' 그게 무슨 소용있어 '기자는 또 한번 어리둥절했다 다시 태어나신다면? ' 어디서? 한국에서? 에 한국? 나 한국에서 태어나기 싫어 영국쯤에서 태어나서 문학 할거야' 그 사람 어디가 그렇게 좋았어요? ' 1000억이 그 사람 시 한 줄만 못해 다시 태어나면 나도 시 쓸 거야 ' 이번엔 내가 어리둥절했다 사랑을 간직하는데 시밖에 없다는 말에 시 쓰는 내가 어리둥절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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