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과 삶과 자유의 행복한 만남, 그리고 영면
- 중편 「내일」(1957)에서 시 「죽음에 대하여」(1992)까지
오태호
1. 생명주의에서 죽음에의 응시까지
황순원은 인간 내면의 다양한 심성을 미학적 염결성과 절제의 문체로 표현해왔다고 평가받는 작가이다. 하지만 그러한 내면화와 문체적 특성에 대한 평가는 우리 민족의 역사적 상처와 그 기억의 흔적과 현재적 실존에 대해 반세기가 넘도록 장인(匠人) 정신으로 탐구해왔던 작가임을 외면하도록 만들 수도 있다. 시에서 단편소설을 거쳐 장편소설로 문학적 영역을 확장해왔던 그의 작업은 하나의 명명으로 자리매김되기가 어렵다. 그만큼 그는 다양한 평가와 해석 속에 현재에도 끊임없는 논구의 대상으로 모색된다.
‘겨레의 기억의 전수자’로 평가받는 “소설가 황순원을 말한다는 것은 해방 이후 한국 소설사의 전부를 말하는 것과 다름없다”는 표현에서도 알 수 있다시피, 황순원 문학은 일제강점기로부터 해방과 전쟁, 분단과 독재 시대를 거치면서도 미학적 완결성과 염결성을 놓치지 않았다. “우리말이 갖는 아름다움의 한 극치”, “한국 산문문체의 모범”, “文章에 대한 세심한 意匠” 등의 문체에 대한 평가는 ‘문학의 순수성과 완결성’, ‘범생명주의’라는 작가주의에 대한 평가와 함께 ‘작가 황순원’이라는 이름을 수놓아왔다.
이 글은 황순원의 중기 이후 작고하기까지의 문학 작품과 생애를 거울처럼 비춰보려는 작업의 일차적 소산이다. 그의 작품세계는 유현(幽玄)함 속에서 명제적 접근을 거부하기에 지속적인 논구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이 글은 중기 이후를 다시 1960년대 전후(43~50세), 1970년대 전후(51~65세), 1980년대 이후(66~86세) 등의 세 시기로 구분하여 작가와 작품의 상관성 속에서 그 문학사적 의미를 검토하고자 한다.
2. 낭만성과 생명주의로 전쟁의 상처 보듬기(1957~1964)
(1) 시대적 배경
한국전쟁이 끝나고 난 후의 전후 복구시기와 근대화 초기에 해당하는 이 시기는 한국전쟁의 상처가 어느 정도 수습되고, 민족 전체의 민주와 통일에 대한 내재적인 요구가 4.19 혁명으로 현실화되면서, 작가들도 자기 변모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일반적으로 1960년대란 시대사적으로 1960년의 4.19 혁명과 1961년의 5.16 군사쿠데타의 대립적 자장 안에서 규명되는 시기이다. 따라서 분단과 전쟁이라는 1950년대적 상황과 민주와 군부독재의 대립이라는 1960년대적 상황은 분명 불연속적 단절의 계기가 작동한다. 하지만 작가 황순원에게 이 시기는 ‘낭만적 사랑’에 주목한 중편 「내일」(1957. 11)에서부터 백정이야기를 통해 존재론적 숙명과의 싸움을 그린 장편 ?일월?(1964. 11)에 이르기까지, 개인이나 시대의 운명적 상황을 낭만성과 생명주의로 보듬어내고자 다채로운 문학적 시도를 진행한 ‘순수의 지대’이다.
(2) 작가의 생애
1957년(43세) 4월 경희대 문리대 국문과 교수로 취임하고 예술원 회원으로 피선된다.
1958년(44세)에는 소년 과부와 처녀 과부의 안타까운 생을 겹쳐 그린 단편 「과부」(1952. 12)가 영화화된다.
1959년(45세)에는 단편 「소나기」(1952. 10)가 유의상의 영역으로 영국 ?인카운터?지에 수상 게재된다.
1960년(46세)에 시 「세레나데」(1960. 3)를 발표, ?한국시집?에 수록한다.
1961년(47세)에는 단편 「잃어버린 사람들」(1955. 11)이 주요섭의 영역으로 ?Collected Short Stories from Korea?(국제 펜클럽 한국본부 간) 1권에 수록된다. 7월에는 장편 ?나무들 비탈에 서다?로 예술원상을 수상한다.
1962년(48세)에는 단편 「과부」가 ‘열녀문’이라는 제목으로 재영화화된다.
1963년(49세)에는 단편 「학」(1953. 1)이 유의상의 영역으로 미국 계간지 ?Prairie Schooner? 가을호에 게재된다.
1964년(50세)에는 ?황순원전집?이 전6권으로 창우사에서 간행된다.
(3) 작품 목록
1) 중편 「내일」(1957. 11) : 번역가 선생과 젊은 여자의 만남에서 드러나는 ‘낭만’과 생활, 사랑과 욕망
2) 「링반데룽」(1958. 2) : 남녀 간의 환상방황 관계 극복하기
3) 「모든 영광은」(1958. 5) : 전쟁의 상처를 휴머니티로 극복하기
4) 「이삭주이」(1958. 5) : 꽁트 세 편에서 드러나는 따뜻한 인간애와 생명애 형상화
5) 「너와 나만의 시간」(1958. 7) : 전장에서 낙오병의 진지 찾아가기
6) 「한 벤치에서」(1958. 10) : 권투 챔피언과 그녀의 친밀감과 거리감에 대한 동상이몽
7) 「안개구름끼다」(1958. 11) : 부산 피난지에서 오누이 같은 사창가 소년과 창녀 이야기
8) 「할아버지가 있는 데쌍」(1959. 8) : 씨줄로 남아 있는 가족사를 애정과 신뢰로 풀어쓰기
9) 시 「세레나데」(1960. 3) : 미지의 당신과 나와의 관계를 “가깝고도 먼 서러운 별들”의 허허로움으로 바라보기
10) 장편 ?나무들 비탈에 서다?(1960. 5) : 1950년대 젊은이들을 통해 역사 속의 개인과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실존적 탐색, 전쟁의 폭력성과 사랑, 죄의식 형상화
11) 「손톱에 쓰다」(1960. 12) : 꽁트 두 편으로 수염 모델과 거지의 삶에서 비롯된 역설적 상황에 대한 단상,
12) 「내 고향 사람들」(1961. 1) : 태평양전쟁 시기 나약한 인텔리와 전쟁으로 인해 인성이 변해가는 지주 형상화
13) 「가랑비」(1961. 3) : 가족 잃은 경찰관의 빨치산 가족 살려주기
14) 「송아지」(1961. 10) : 6.25 피난길에 송아지와 돌이의 우정 형상화
15) 「그래도 우리끼리는」(1963. 5) : 술꾼의 자기 변호 넋두리
16) 「비늘」(1963. 7) : 잉어 낚시에서 만난 호숫가 처녀 은영이의 헌비늘 털기
17) 「달과 발과」(1963. 11) : 새끼 게의 여행
18) 장편 ?日月?(1964. 11) : 백정 이야기를 통한 존재의 기원과 구원에 대한 성찰
(4) 대표작 발췌
거기 계단에는 눈이 소복이 쌓여있었다. 그는 무엇을 생각했는지 허리를 굽혀 두 손으로 눈을 움켜가지고 얼굴을 문지르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이 동작이 끝나자 그는 이번에는 또 바지 앞을 헤치더니 다시금 두 손으로 눈을 움켜다 문지르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나는 계단 위의 이 광경을 바라보는 동안 갑자기 어떤 아지못할 즐거움이 가슴에 충만해옴을 느꼈다. 그리고 나는 이 가슴에 충만해진 즐거움을 전신에 골고루 퍼치기라도 하려는 듯이 몸을 몇번이고 전후 좌우로 흔들었다. 그러면서 혼잣속으로 중얼거렸다. 모든 영광은 술에게, 그리고 모든 영광은 오늘밤 이렇게 파닥거리며 그러나 결국은 조용히 내려쌓이는 눈에게, 그리고 다시 모든 영광은 지금 새로운 생활을 향해 어두운 계단 위에서 저렇듯 자기 신체의 한 부분을 닦달질하고 있는 저 가엾도록 착한 한 사람의 사내에게.
- 「모든 영광은」 중에서 (전집 4권, 48쪽)
“선생님이 받으신 피해가 어떤 종류의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큰 의미에서 이번 동란에 젊은 사람치구 어느 모로나 상처를 받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요. 현태씨두 그중의 한사람이라구 봅니다. 그리구 저두 또 그중의 한 사람인지 모르구요.”
“네…… 그런 생각에서 그친구의 애를 낳아 기르시겠다는 겁니까?”
그네는 윤구에게 주던 시선을 한옆으로 비키면서,
“모르겠어요. ……어쨌든 제가 이일을 마지막까지 감당해야 한다는 것 외에는. ……그럼 실례했습니다.”
숙이는 가만히 대문께로 몸을 돌렸다.
- ?나무들 비탈에 서다?(전집 7권, 393~394쪽)
이대로 나는 관객의 입장에서 다혜와 나미를 대해야 하는가. 나는 나, 너는 너라는 인간 관계란 있을 수 없지 않은가. 인간이 소외당한 자기자신을 도루 찾으려면 우선 각자에 주어진 외로움을 참구 견뎌나가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할 거야. 기룡이의 말이었다. ……그건 그렇다. 하지만 그 외로움이란 인간과 인간이 격려돼있는 상태에서만 오는 게 아니지 않는가. 서로 부딪칠 수 있는 데까지 부딪쳐본 다음에 처리돼야만 할 문제가 아닌가. 기룡을 만나야 한다. 만나 얘기해야 한다.
- ?일월?(전집 8권, 343쪽)
(5) 문학사적 의미
이 시기 황순원 문학의 특색은 전쟁에 대한 거리감의 확보 속에 상흔을 감싸안는 작업을 진행하면서, 낭만성과 생명주의에 대한 본원적 천착이 지속되고 있다는 점이다.
「모든 영광은」의 결말부분에서 사내는 눈이 소복이 쌓인 집앞 계단에서 얼굴과 성기에 눈을 문지르면서 ‘형식을 실제화하는 절차’를 밟으려고 한다. ‘가엾도록 착한 사내’가 눈으로 바지 앞을 헤치고 성기를 문지르는 행위는 6. 25 전쟁이 낳은 두 피해자 가족의 온전한 일체화를 통해 상처를 아물고 새로운 생활로 나아가게 만드는 하나의 상징적 제의가 된다. 「모든 영광은」은 ‘사내’의 이야기 속에서 전란의 죄의식을 이겨내는 에로스적 충동의 힘이 새로운 미래를 잉태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것은 남성의 성 불능이 생의 위축을 가져오며, 반대로 성적 능력의 확인이 새로운 생의 가능성을 암시하는 가운데, 인간에게서 ‘성’과 ‘생’이 생명의지를 추동하는 불가분의 관계임을 확인하게 한다.
?나무들 비탈에 서다? 제일부에서는 동호의 순정과 현태의 소영심이 대비되지만 제이부로 건너가면 현태의 부적응성과 윤구의 현실주의가 대비를 이룬다. 이러한 대비의 발전으로 제일부에서 대립적이었던 동호와 현태가 제이부에서는 두 사람이 함께 현실 부적응을 앓는 동류임이 밝혀진다. 두 사람 모두 자살 혹은 자살적 자학을 하는 것으로 되어 있음도 우연이 아니다. 자살은 사람들이 스스로 짊어진 문제를 감당하지 못할 때 저질러지는 사건으로서 삶의 유연성이 신통치 못하다는 사실은 진지함과 표리적일 수 있다. 결국 이 작품은 전쟁 상황에서 순정과 위악, 좌절과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는 젊은이들을 통해 1950년대 한국 사회의 실존적 자화상을 그려내었다고 할 수 있다.
초기 단편 이래의 황순원의 낭만주의적 성격-즉, 순수한 것, 아름다운 것에의 경도로 나타나는 순정적 인간애가, 6.25라는 비극적 현실의 체험 이후 짙은 좌절감으로 바뀌는 모습을 그의 일련의 장편소설들로부터 읽어낼 수 있는데, ?일월?은 그 짙은 좌절감을 다시 구원의 미학으로 승화시키려는 작가적 노력의 소산이라 하겠다. 결국 이 작품은 백정의 아들인 인철을 통해 선험적 자기 운명과의 싸움, 존재론적 고독에 대한 질문과 회의를 그려내고 있다.
3. 모성과 욕망, 환멸과 구원, 노년의 풍경(1965~1979)
(1) 시대적 배경
1960년대 중반 이후부터 1970년대까지는 박정희 정권이 주도한 도시화․산업화․근대화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이농 현상에 따른 도시 빈민의 확대와 노동 인력의 확충이 진행되던 시기이다. 따라서 시대적으로 노동자, 농민, 도시 빈민의 문제가 사회화되면서 사회적 모순에 대한 비판 속에 분단과 독재를 넘어서려는 다양한 시도가 지속된다. 문학에서도 1960년대 중반 이래로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에 대한 탐색이 이뤄지면서 민족과 민중 문제의 대두 속에 농민, 노동자, 도시빈민에 대한 형상화가 서서히 분출되던 시기이다. 하지만 황순원의 경우 시대적 모순이나 소외된 현실에 대한 밀착보다는 인간의 본원적 심성으로서의 모성, 욕망, 생명 의지 등에 주목하는 작품을 지속적으로 생산한다. 분노와 웃음, 소리와 그림의 변주로 회억되는 40년 전 웃음에 대한 해학적 성찰을 다룬 「소리 그림자」(1965. 1)에서 노년의 고독한 풍경을 모란과 화자의 교감으로 그려낸 시 「모란Ⅱ」(1979. 5)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에피소드들을 집적하면서도 그 밑면에는 모성 담론, 생명주의, 욕망, 사랑과 구원, 존재론적 죽음에 대한 단상 등이 버무려져 있다.
(2) 작가의 생애
1965년(51세)에는 단편 「너와 나만의 시간」(1958. 7)이 김종운의 영역으로 ?코리아 저널?에 게재된다.
1966년(52세) 3월 장편 ?일월?로 3.1 문화상을 수상한다. 같은 해 5월에는 단편 「원색오뚜기」(1965. 11)가 김종출의 영역으로, 같은 해 9월에는 단편 「온기 있는 파편」(1965. 4)이 송요인의 영역으로 ?코리아 저널?에 게재된다. 같은 해 9월 17일에는 부모의 회혼례를 치른다. 이 해에 단편 「소나기」가 인문계 중학교 국3에, 단편 「학」이 실업계 고교 국3에 각각 수록된다. 3.1 문화상 심사위원에 피촉되고, 단편 「잃어버린 사람들」, 「소나기」, 「왕모래」(1953. 10)가 이장범의 독역으로 Die Bunten Schuhe (Horst Erdmann Verlag 간)에 수록된다.
1967년(53세) 단편 「잃어버린 사람들」과 장편 ?일월?(1964. 1)이 영화화된다.
1968년(54세)에는 단편 「가랑비」가 김종운의 영역으로 ?코리아 저널?에 게재되고, ?월간문학? 편집위원과 한글전용 심의위원에 피촉된다. 장편 ?나무들 비탈에 서다?(1960. 5)와 ?카인의 후예?(1954. 5)가 영화화된다.
1969년(55세)에는 ?황순원대표작선집? 전6권을 조광출판사에서 간행되고, 콩트 「무서운 웃음」이 최해춘의 영역으로 ?코리아 타임즈?에 게재된다.
1970년(56세) 5월에 단편 「너와 나만의 시간」이 정종화의 영역으로 필리핀 ?Solidarity?지에 게재되고, 6월에 단편 「학」이 김세영의 영역으로 ?Modern Korean Short Stories and Plays?(국제펜클럽한국본부 간)에 수록된다. 같은 해 6월 국제 펜클럽 제37차 서울대회에서 한국대표로 「한국문학에 있어서의 해학의 특성」이란 제목으로 주제 발표를 한다. 8월 15일에는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고, 11월에는 장편 ?나무들 비탈에 서다?가 장왕록의 발췌 영역으로 ?코리아 타임즈?에 게재된다.
1971년(57세)에는 외솔회 이사에 피촉된다.
1972년(58세) 2월에는 단편 「산골아이」 중의 「도토리」가 Norman Thorpe의 영역으로 ?코리아 저널?에 게재되고, 8월에는 단편 「목숨」이 김세영의 영역으로 같은 잡지에 게재된다. 같은 해 12월 19일 부친이 서거한다.
1973년(59세) 단편 「학」과 장편 ?일월?이 김소운의 일역으로 ?현대한국문학선집?(일본 동수사간) 3권과 1권에 수록된다. 같은 해 6월 단편 「학」이 Kevin O'Rourke의 영역으로 ?Ten Korean Short Stories?(Korean Studies Institute 간)에 수록된다. 같은 해 12월 5일 친구 원응서가 별세한다. 같은 해 12월 단편 「황노인」이 D. Bouchez의 불역으로, 단편 「곡예사」가 H. Roumegoux의 불역으로 ?Revue de COREE? 겨울호에 게재된다. 같은 해 ?황순원문학전집? 전7권이 삼중당에서 간행된다.
1974년(60세) 1월 모친이 서거한다. 3월에 시 「동화」, 「초상화」, 「헌가」, 12월에 시 「공(空)에의 의미」를 발표한다. 단편 「별」이 최철리의 영역으로 ?코리아 타임즈?에 게재되고, 단편 「너와 나만의 시간」이 김종운의 영역으로 ?Postwar Korean Short Stories?(서울대학 출판부 간)에 수록되며, 단편 「학」이 Peter H. Lee의 영역으로, 단편 「소나기」가 유의상의 영역으로 ?Flowers of Fire : Twentieth Century Korean Stories?(하와이대학 출판부 간)에 수록된다. 단편 「비바리」가 ‘갈매기의 꿈’이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된다.
1975년(61세) 회갑이지만 다른 행사를 사양하고 예년처럼 지낸다. 단편 「독 짓는 늙은이」가 Norman Thorpe의 영역으로 ?코리아 타임즈?에 게재되고, 장편 ?카인의 후예?가 장영숙과 Robert P. Miller의 공역(영역)으로 ?The Cry of the Cuckoo?(Pan Korea Book Corporation 간)라는 표제로 간행된다.
1976년(62세) 3월 부인 양정길 여사가 여의도 순복음교회 권사회장에 임명된다. 단편 「달과 발과」가 Genell Y. Poitras의 영역으로 ?코리아 저널?에 게재되고, 단편 「이날의 지각」이 장왕록의 영역으로 ?코리아 타임즈?에 게재된다.
1977년(63세)에는 시 「돌」, 「늙는다는 것」, 「고열로 앓으며」, 「겨울 풍경」, 「전쟁」, 「링컨이 숨진 집을 나와」, 「위치」, 「숙제」를 발표한다.
1979년(65세)에는 시 「모란Ⅰ」, 「모란Ⅱ」를 발표한다.
(3) 작품 목록
1) 「소리 그림자」(1965. 1) : 분노에서 즐거운 붓놀림의 연상으로 40여 년 전 티없는 웃음을 되살아오게 만든 그림 속 교접 장면
2) 「온기 있는 破片」(1965. 4) : 대학생의 행동과 양심, 용기와 비겁에 대한 성찰
3) 「어머니가 있는 유월의 對話」(1965. 6) : 세 가지 모성 담론
4) 「아내의 눈길」(1965. 7) : 돼지새끼를 소재로 본 모성과 새끼, 생명에 대한 성찰
5) 「조그만 섬마을에서」(1965. 8) : 뱃사람의 숙명에 대하여
6) 「原色오뚜기」(1965. 11) : 윤노인과 임신한 채 도망갔던 며느리의 해후
7) 「수컷 退化說」(1966. 5) : 늙어감과 실존적 외로움, 죽음의식에 대한 단상,
8) 「自然」(1966. 6) : 몸냄새를 매개로 한 애정 관계
9) 「닥터 장의 境遇」(1966. 8) : 낙태수술과 성전환수술, 생명에 대한 단상
10) 「雨傘을 접으며」(1966. 9) : 관상어 블랙몰리와 외로움, 존재론적 죽음에 대한 단상
11) 「피」(1966. 11) : 수재민들의 실존과 생존의 어려움, 종족의 피 빨아먹기
12) 「겨울개나리」(1967. 1) : 성심을 다하는 간호보조원 아줌마 이야기
13) 「차라리 내 목을」(1967. 2) : 말의 시점으로 들여다본 김유신 이야기
14) 「幕은 내렸는데」(1967. 7) : 친구의 배반으로 절망에 빠진 남자가 창녀의 불은 젖가슴으로 새 인생길 모색
15) 「탈」(1971. 9) : 죽은 자의 영혼이 계속 변신하여 죽인 자의 육신에 들기
16) 장편 ?움직이는 城?(1972. 8) : 기독교와 샤머니즘의 갈등 속에 유랑하는 인간들의 비극적 사랑과 구원의 문제 형상화
17) 시 「동화」(1974. 3) : 모순적 이미지의 결합, 동화적 상상력
18) 「숫자풀이」(1974. 5) : 4.19에 불참한 자의 죄의식과 환멸적 세계인식
19) 「마지막잔-원응서형에게」(1974. 8) : 원응서와의 우정과 이산가족의 슬픔에 대한 자전적 기록
20) 「이날의 遲刻」(1974. 12) : 무위와 권태, 욕망과 물질에 잠식당한 소외된 존재의 자의식 그리기
21) 시 「공(空)에의 의미-서정주에게」(1974. 12) : 색즉시공, 공즉시색하는 서정주 예찬,
22) 「뿌리」(1975. 6) : 죽은 자식의 환영을 그리며 죽어가는 모성상
23) 「주검의 場所」(1975. 10) : 현실의 모순과 부조리 반영
24) 「나무와 돌, 그리고」(1975. 11) : 죽음에 대한 수용, 장엄한 생명력,
25) 시 「겨울 풍경」(1977. 3) : 눈 내리는 날 홀로 서 있는 노인의 풍경, 정물화 느낌,
26) 시 「숙제」(1977. 4) : 어림과 늙음, 그리고 죽어감에 대하여
27) 「그물을 거둔 자리」(1977. 7) : 고통과 구원의 양가적 사랑, 욕망과 애정 사이
28) 시 「모란Ⅱ」(1979. 5) : 빛과 어둠, 모란과 노인 화자의 교감,
(4) 대표작 발췌
이 두 여자만이 아니고, 이러한 눈을 한 모든 인간의 눈은 창조주의 것이다. 어찌 이러한 눈뿐이랴. 인간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 삶이든 죽음이든 선이든 악이든 이밖의 모두 다 창조주의 것이다. 이렇게 창조주는 자기 형상과 마음가짐처럼 만든 인간을 통해 스스로 지니고 있는 정과 반의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세상에 사랑이라는 합의 세계를 이루기 위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다각다양하게, 그리고 끊임없이 싸우고 있는 것이다.
- ?움직이는 성?(347쪽)
석양 그늘속에 은행나무는 한창 황금빛으로 물들어있었다. 가을이 온통 한데 응결된 듯만 싶었다. 얼마든지 풍성하고 풍요했다.
그 둘레를 서성거리고 있는데 난데없는 회오리바람이 일어 은행나무를 휘몰아쳤다. 순식간에 높다란 나무 꼭대기 위에 새로운 장대하고도 찬란한 황금빛 기둥을 세웠는가 하자, 무수한 잎을 산산이 흩뿌려놓았다. 아무런 미련도 없는 장엄한 흩어짐이었다.
뭔가 그는 속깊은 즐거움에 젖어 한동안 나뭇가를 떠날 수가 없었다.
- 「나무와 돌, 그리고」(전집 5, 238~239쪽)
눈은 내리고 / 해거름에서 담배 한 대 참은 족히 지난 시각 / 철부지 아이들의 떠드는 모양 멀리 물러나고 / 팔 낀 연인들 어룽히 드러났다 그냥 풀리어드는 / 뭉크보다 조금은 더 어둑신한 속에 / 노인이 하나 서 있다 / 눈은 내리고
- 시 「겨울풍경」 전문 (전집 11, 126쪽)
어려서 어머니 따라 여탕에 목욕을 다닐 무렵, 한번은 옆 아주머니가 불시에 내 샅을 손끝으로 쓸며, 어머 잘두 생겼네, 하고 수선을 떨어 처음으로 나는 내 거기를 조고만 두 손바닥으로 가렸다. // 무척 늙으셨습니다, 머리두 많이 빠지시구요, 길거리에서 오래간만에 만난 옛 제자가 사뭇 걱정스런 낯으로 하는 말을 들은 후 나는 베레모를 마련했다. // 언제고 어느 한 소리가 슬쩍 내 귀에다 대고, 이제 그만큼 살았으면 되지 않느냐고 속삭인다면, 나는 그때 무얼로 어디를 가릴 것인가.
- 시 「숙제」 전문(전집 11, 130쪽)
너는 어둠이다. 너의 그 어둠을 주체치 못해 너는 내 속에 꽃망울을 벙을려놓고 온날 진종일 흙비를 뿌려댔다. 건공중에 걸린 달무리. 나는 철부지로 나의 심장을 너의 가슴에 이식시킨다. // 중풍에 잘 듣는다고 더덕뿌리를 옆집 노인은 질겅거리는데 숫제 나는 심장이 없어 두루 한갓지다. 달이 지고 어둠이 남은 밤. 술취한 노인이 하나 네 안에 비틀거린다. 언제나 빛은 어둠의 껍데기인 걸.
- 시 「모란 Ⅱ」 전문(전집 11, 132쪽)
(5) 문학사적 의미
?움직이는 성?을 통해 작가는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려는 노력과 인간의 숙명적인 고독의 의미 및 인간 관계의 의미를 추구하려는 노력을 하나로 종합해보려고 시도한다. 이 작품의 중심인물인 민구(샤머니즘 연구)․성호(기독교 전도사업)․준태(방황하는 농학도)는 오늘의 한국 지식인을 대표하는 세 가지 유형이다. 이러한 인물들을 통해 작가가 ?움직이는 성?에서 대담하게 제기한 문제는 ‘한국인의 유랑민 근성’에 관한 것이다.
「나무와 돌, 그리고」는 인생의 노년에 서 있는 ‘그’가 ‘까닭 모를 서글픔’과 ‘공허감’, 속에 기억 속의 실수를 떠올리며 ‘뉘우침’을 실천하다가, 어제 만난 용문산 은행나무의 가을맞이를 풍성하고 풍요롭게 맞이하는 부분을 그리고 있다. 회오리바람에 무수한 잎을 산산이 흩뿌려놓는 은행나무의 순간적 움직임을 본 ‘그’가 “아무런 미련도 없는 장엄한 흩어짐”이라고 감상하면서 속깊은 즐거움에 젖어들면서 나무 주위를 떠날 수가 없게 된다는 이야기인데, 이 소설은 노년의 공허감을 은행나무의 찬란한 빛 속에 버무림으로써 노년의 아름다운 생 풍경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1970년대 후반에 쓰여진 「겨울풍경」, 「숙제」, 「모란Ⅱ」 등은 작가 황순원이 시로 출발한 소설가임을 새삼 깨닫게 한다. 눈 내리는 해거름 무렵의 어둑신한 풍경 속에 뭉크보다 어둑신한 한 노인이 직립한 모습을 겹쳐보고 있는 「겨울풍경」, 어릴 적 ‘거기’에 대한 부끄러움과 무척 늙어 빠지게 된 머리카락을 모자로 감추려는 마음을 겹쳐보면서 미래의 죽음을 자연스레 예비하려는 화자의 태도를 그린 「숙제」, 어두운 모란과 심장을 모란에 이식시킨 껍데기뿐인 노인의 교감 속에 심장을 벗어버리려는 화자의 허허로움을 그린 「모란 Ⅱ」 등은 그가 시적 서정을 담보한 소설가이자 작가였음을 보여준다.
4. 1980년대 이후 작품(1980~2000)
(1) 시대적 배경
시대적으로 1980년대는 박정희 유신독재정권과의 멀어짐이면서 동시에 광주를 짓밟고 권력을 장악한 새로운 군부 정권의 등장으로 민주와 반민주의 갈등 구조가 첨예하게 대두되던 시기이다. 그리하여 문학에서도 민족민중문학론이 대두되면서 민족모순과 계급모순을 극복하려는 다양한 문학적 모색이 필요하다는 점이 제기된다. 그러나 체제변혁적 담론에 기댄 이러한 거대담론의 모색은 1990년대 동구 사회주의권의 몰락과 더불어 다원주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섹슈얼리티와 몸 문제를 비롯한, 다양한 미시담론의 분출을 맞이하게 된다. 하지만 황순원의 경우 1970년대 산업화 과정에 휩쓸리는 마을을 배경으로 삼대에 걸친 가족사를 다룬 ‘사회사 소설’인 장편 ?신들의 주사위?(1982. 3)로부터 시 「죽음에 대하여」(1992. 9)에 이르기까지
(2) 작가의 생애
1980년(66세) 1월 장편 ?나무들 비탈에 서다?가 장왕록의 영역으로 ?Trees on the Cliff?(미국 Larchwood사 간)라는 표제로 간행된다. 6월에 시 「꽃」을 발표한다. 9월 단편 「풍속」, 「소라」, 「닭제」, 「별」, 「황노인」, 「독 짓는 늙은이」, 「소나기」, 「학」, 「오아모래」, 「비바리」, 「송아지」, 「숫자풀이」가 Edward W. Poitras의 영역으로 ?The Stars?(영국 Heinemann 홍콩지사 간)라는 표제로 간행된다. 경희대 교수 정년 퇴임과 동시에 명예교수로 취임한다.
1983년(69세) 3월 시 「낭만적」, 「관계」, 「메모」를 발표하고, 12월 장편 ?신들의 주사위?로 대한민국 문학상 본상을 수상한다.
1984년(70세) 시 「우리들의 세월」, 「도박」, 「밀어」, 「한 풍경」, 「고백」, 「기운다는 것」을 발표한다.
1985년(71세) 1월 단편 「학」이 인문계 실업계 구분 없이 편찬한 고등학교 국2에 수록된다. 3월에 산문 「말과 삶과 자유」를 ?말과 삶과 자유?에 수록한다. 7월 장편 ?움직이는 성?이 Bruce and Ju-Ch'an Fulton의 영역으로 ?THE MOVING CASTLE?(시사영어사 간)이라는 표제로 간행된다.
1986년(72세) 2월에 단편 「겨울 개나리」가 Bruce and Ju-Ch'an Fulton의 영역으로 ?한국문학?에 게재되고, 같은 달에 단편 「눈」이 J. Martin Holman의 영역으로 ?코리아 저널?에 게재된다. 5월과 9월에 산문 「말과 삶과 자유 Ⅱ.Ⅲ」를 발표한다.
1987년(73세) 1월과 5월에 산문 「말과 삶과 자유 ⅣⅤ」를 발표하고, 8월에 단편 「소리그림자」가 J. Martin Holman의 영역으로 ?코리아 저널?에 게재된다. 10월에는 제1회 인촌상 문학 부문을 수상하고, 12월에는 예술원 원로회원에 추대된다.
1988년(74세) 3월에 산문 「말과 삶과 자유 Ⅵ」을 발표한다.
1989년(75세) 7월에 단편 「탈」, 「어머니가 있는 유월의 대화」, 「숫자풀이」, 「겨울 개나리」, 「우산을 접으며」, 「온기 있는 파편」, 「피」, 「이날의 지각」, 「조그만 섬마을에서」, 「소리 그림자」, 「원색 오뚜기」, 「자연」, 「막은 내렸는데」, 「주검은 장소」, 「나무와 돌, 그리고」가 여러 사람에 의해 영역되어 ?The Book of Masks?라는 표제로 영국 READERS INTERNATIONAL사에서 간행된다.
1990년(76세) 1월에 단편 「학」, 「소리 그림자」 등이 여러 사람에 의해 영역되어 J. Martin Holman의 편집으로 ?SHADOWS OF A SOUND?라는 표제로 미국 MERCURY HOUSE사에서 간행된다. 11월에는 장편 ?일월?이 설순봉의 영역으로 ?Sunlight, Moonlight?(시사영어사 간)라는 표제로 간행된다.
1992년(78세) 9월에 시 「산책길에서 1」, 「산책길에서 2」, 「죽음에 대하여」, 「미열이 있는 날 밤」, 「밤늦어」, 「기쁨은 그냥」, 「숫돌」, 「무서운 아이」를 발표한다.
1996년(82세) 정부의 문화훈장 수여를 거부한다.
2000년(86세) 9월 14일 오전 8시경 잠을 자던 상태로 영면, 9월 18일 장지인 충남 청원군 병천면 풍산공원 묘원에 안장된다.
(3) 작품 목록
1) 장편 ?신들의 주사위?(1982. 3) : 도시화에 물들어가는 전통적인 농촌 가정의 해체와 환경오염 문제 등의 형상화
2) 「그림자풀이」(1983. 11) : 잃어버린 자아의 정체성, 본질과 현상에 대한 존재론적 질문, 자기 그림자 찾기
3) 「나의 竹夫人傳」(1985. 7) : 영원주의와 생명주의가 반영된 작품, 죽부인은 사랑과 구원의 표상, 죽부인과의 교접,
4) 「땅울림」(1985. 8) : 이산의 아픔과 그 내밀한 심정의 무늬
5) ?세월? 자선시 24편(1974~1984) : 「낭만적」(외설건강법과 ‘낭만적’에 대한 에피소드), 「도박」(‘얼굴이 없는 사나이(자기 자신, 데드 마스크)’와의 노름),
6) ‘세월 이후’ 시 8편(1992. 9) : 죽음을 앞둔 노년의 자세에 대하여
7) 산문 「말과 삶과 자유Ⅰ~Ⅵ」(1984. 12 ~ 1988. 2) : 산문으로 풀어내는 ‘말, 글, 삶, 자유’에 대한 단상들
(4) 대표작 발췌
퇴원보따리를 든 신씨 부부가 일행을 앞선다.
한수는 다시 걸음을 옮겨 정문께로 향했다. 천천히 걸어가던 한수가 문득 한 곳에서 발길을 멈췄다. 그리고 발 아래를 내려다본다.
함께 가던 일행도 걸음을 멈추었다.
콘크리트 포장길에 가느다란 금이 나있고, 그 틈새기로 풀잎들이 돋아나있었다. 제법 파랬다. 어쩌면 이런 데서?
“자기 그림자가 신기해서 그러는 거냐?” 병배가 툭 한마디 했다.
한수 앞에 뭉툭한 그림자가 져있었다.
사람들이 오가는 가운데 한 청년이 한수네 곁으로 다가섰다.
“무얼 잃어버렸습니까?”
- 장편 ?신들의 주사위?(305쪽)
그런 땐 이렇게 하세요. 우주반딧불이란 거 아시죠? 이쁘기 이를데없는 자디잔 입자들이 빛나면서 우주선 곁을 날아다닌다지 않아요? 우주비행사가 밖으루 내보낸 오줌이 우주반딧불이 된 거죠. 재미있잖아요? 그런 거라두 생각하면서 여유를 가지세요.
그러지.
아마 앞으루두 그림자 찾기는 계속될 것같네요.
그럴 것 같애. 그런데 본체가 그림잘 찾아다니는 건지, 그림자가 본첼 찾아다니는 건지 그것부터 다시 알아야 될까봐.
둘 다일 거예요. 고요새는 그가 좋아 못견디겠다는 듯 긴 목을 그의 목에 새로 몇 번 비벼댔다.
- 「그림자풀이」(전집 5, 266쪽) 중에서
어머니가 김을 매는 조밭머리 긴긴 한여름 뙤약볕 속에 혼자 메뚜기와 놀던 다섯 살짜리 아이가, 눈이 좀 어두운 어머니의 길잡이로 말승냥이 늘쌍 떠나지 않는다는 함박골을 앞장서 외가에 오가던 다섯 살짜리 아이가, 장차 어떻게 살아가나 어머니가 짐짓 걱정할라치면 나귀로 장사해서 돈을 많이 벌겠다던 다섯 살짜리 아이가, 기미운동으로 옥살이하는 아버지를 힘들여 면회 가선 내내 어머니 젖가슴만 더듬었네. 불도 켜 있지 않은데 눈이 부셔 부셔 아버지가 눈부셔 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네. 지금은 일흔 살짜리 아이가 되어 이 추운 거리 다시 한번 아버지를 면회 가서 당신의 젖가슴을 더듬어봤으면, 어머님이여 나의 어머님이여.
- 시 「우리들의 세월」 전문(전집 11, 140쪽)
나와 마누라는 죽음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 한날 한시에 같이 죽으면 다시없이 좋으련만 / 그러기를 바랄 수는 없는 일이고 / 누구고 앞서가는 길밖에 없다 / 마누라가 아주 담담한 말씨로 / 여자 노인 혼자 남는 것보다 남자 노인 혼자 남는 것은 / 불쌍하고 처량하다고 한다 / 나는 전적으로 이에 동의하여 / 내가 앞서가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 우리 둘이 같이 일흔일곱이라는 나이에
- 시 「죽음에 대하여」 전문(전집 11, 155쪽)
「말과 삶과 자유」 중에서
작품다운 작품을 쓰지 못할 바에는 오히려 안 쓰는 편이 낫다는 작가적 양심이 그저 쓰고 싶다는 욕심 앞에 제발 무릎을 꿇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전집 11, 175쪽)
젊음이란 아름답다. 젊음이 지닌 방황과 오뇌마저도 아름답다. 그러나 늙음 속에는 이미 그러한 젊음을 비롯해 많은 값을 치르고야 얻을 수 있는 것들이 간직돼 있어서, 이 늙음을 단지 젊음과만 맞바꿀 수는 없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전집 11, 181쪽)
대패질을 하는 시간보다 대팻날을 가는 시간이 더 길 수도 있다.(전집 11, 191쪽)
작가의 의식은 언제나 깨어 있어야 한다. 무의식의 세계를 그릴 때도 작가는 그걸 분명히 의식하고 있어야 한다.(전집 11, 192쪽)
오늘의 소설은 리얼리즘이어야 한다고 한다. 그렇더라도 로맨티시즘을 옳게 거치지 않은 작가의 리얼리즘 작품을 나는 신용하지 않는다. 그림에서 데생을 옳게 거치지 않은 화가의 비구상을 신용하지 않듯이.(전집 11, 205쪽)
소설에서 우리가 감동하게 되는 것은 그 작품 속에 깔려 있는 시와 마주치기 때문이다.(전집 11, 205쪽)
육체적 소아마비는 그 장애가 자기 혼자로 그치지만 정신적 소아마비는 그 장애가 남에게까지 파급되게 마련이다.(전집 11, 258쪽)
(5) 문학사적 의미
?신들의 주사위?는 ‘한수’라는 개인의 사랑의 고뇌와 방황을 주축으로 그려진다. 즉 주인공의 사랑과, 병배․중섭․건호 등과 나누는 우정과, 형 한영에게 느끼는 우애와 연민, 그리고 할아버지와 맺고 있는 수직 관계 등은 모두 극히 개인적인 차원의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가족문제․농촌문제․공해문제․통치문제 등으로 확대되고 사회 변동의 내면을 보여주는 것은, 작가 자신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무질서 속에서 어떤 질서를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중략) 이 작품의 조직의 다양성은 그러한 에피소드들의 층위나 차원이 다르면서도 모두 얽어맬 수 있었던 작가의 탁월한 구성을 확인하게 한다. 그것은 바로 선배 작가의 정신 속에 ‘소설이 척추뼈’라는 인식이 살아서 움직이고 있음을 이야기하며 소설이 소설로서의 힘을 유지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한 것이다. 소설이란 아무것도 아닐 수 있으면서도 모든 것이라는 말도 거기에서 나온 것이다.
「그림자풀이」에서 보이듯 작가는 인생이란 자신의 잃어버린 그림자를 찾아 떠도는 본체의 유랑으로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유랑하는 것이 그림자일 수도 본체일 수도 있다는 양가적 인식은 노년에 이른 작가가 삶과 죽음, 사랑과 이별, 절망과 희망, 미와 추, 늙음과 젊음 등의 대립적 개념들을 관념적으로 이미 초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시 「우리들의 세월」에서는 유년으로 돌아가고 싶은 노년의 마음을 살갑게 표현하고 있으며, 시 「죽음에 대하여」에서는 일흔일곱에 이른 노부부의 죽음에 대한 담담한 태도를 일상어로 표현함으로써 오히려 죽음이 일상적인 것임을 실증적으로 보여준다.
이렇게 황순원의 문학적 생애는 시 「나의 꿈」으로 시작되어 단편과 장편소설의 시대를 지나 시 「죽음에 대하여」로 마무리된다고 할 수 있다. 시 제목으로만 요약한다면 낭만주의자에서 현실주의자로 자신의 생을 깔끔히 마무리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것은 요약일 뿐이다. 이름 붙여지지도 않은 채 아직 우리가 찾아내어 공유해야 할 숱한 문학적 삶의 무늬가 길어올려지길 기대하며 그의 작품 안에 아로새겨져 있음이 너무도 자명하기 때문이다.
5. 문학과 삶의 행복한 만남, 그리고 영면
황순원 문학은 우리 겨레가 지나온 20세기의 굴곡진 역사를 추체험하게 한다. 때로는 소년들의 순진무구하면서도 영악한 몸짓으로, 때로는 젊은이들의 위악에 찬 실존적 몸부림으로, 때로는 동물들의 우의적 형상화로, 때로는 자전적 관찰기로 그 형식과 내용을 달리하면서도 작품의 저변에는 줄곧 인간에 대한 끊임없는 신뢰와 애정이 깔려 있다는 점에서 그 추체험은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이 글을 준비하면서 황순원의 문학은 여전히 젊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아무리 짧은 꽁트라 할지라도 문장 하나 하나에 정성을 들여 세공한 흔적이 너무도 역력히 보였기 때문이다. 깨어 있는 작가 의식으로 살아서도 작고한 이후에도 끊임없는 모범으로 회자되는 황순원은 문학과 삶의 행복한 만남을 보여주는 흔치 않은 사례에 해당한다. 그렇기에 그의 실존적 죽음은 부인할 수 없지만, 그의 문학적 죽음은 거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