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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리의 수업/작가, 작품론

[스크랩] 이문구/연보와 생애

by 拏俐♡나리 2012. 11. 20.

Ⅰ. 작가의 생애

 

1. 작가 연보

 

1941년 충남 보령군 대천면 대천리 387번지 관촌부락에서 4남 1녀 중 4남으로 출생.

1950년 6.25전쟁 발발과 함께 남로당 보령군 총책이었던 부친과 두 형을 잃음.

1956년 모친 사망으로 가장이 됨.

1961년 서라벌예술대학교 문예창작학과에 진학. 스승 김동리와 만남.

1966년 「현대문학」에 단편 '백결'이 추천되어 등단

1968년 단편 「이삭」(《사상계》 등 발표.

1970년 《월간문학》 편집장. 장편소설인「장한몽」을 《창작과 비평》에 연재. 단편 「이 풍진 세상을」(《신동아》), 「암소」(《월간중앙》, 등 발표.

1972년 『장한몽』으로 제5회 한국창작문학상 수상. 중편 「해벽」(《세대》), 단편 「추야장」(《월간중앙》), 대표작 「관촌수필」 연작의 1, 2, 3 발표.

1973년 《월간문학》 편집장을 사임한 뒤 《한국문학》 편집장. 연작소설 「관촌수필4, 5」, 등 발표

1974년 11월 18일에 발족한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실무간사가 됨.「백면서생」등 발표.

1975년 《한국문학》 편집장 사임.

1976년 단편 「관촌수필 6,7」, 중편 「엉겅퀴 잎새」 발표. 임경애와 결혼.

1977년 한진출판사 편집장으로 취임. 경기도 화성군 향남면으로 이사.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이사. 단편 「관촌수필8」,「우악새 우는 사연」(‘우리동네 황씨’로 개제) 발표,「우리 동네 김씨」(《한국문학》)를 발표하면서「우리 동네」연작시작.

1978년 단편 「우리 동네 리씨」(《한국문학》), 「우리 동네 최씨」(《창작과 비평》),「우리 동네 정씨」(《문학과 지성》) 발표.

제5회 한국문학작가상 수상(수상작 ‘우리동네 리씨’)

1979년 중편 「우리 동네 유씨」(《YWCA》) 발표. 《실천문학》 편집위원 취임.

1980년 단편 「우리 동네 강씨」(《실천문학》), 「우리 동네 장씨」(《창작과비평》,「소설 김주영」 발표. 「정치활동규제법」에 문인으로서는 유일하게 묶임.

1981년 단편「우리 동네 조씨」(《세계의문학》) 발표. 국제펜클럽 한국본부이사 피선.

1982년 단편 「변사또의 약력」(《문학사상》), 「강변의 빈터」 발표.

제1회 신동엽창작기금을 받음.

1983년 정치활동 규제자에서 해금. 《시인》에 동요 25편 발표.

1984년 장편 「산너머 남촌」을 《농민신문》에 연재. 단편「강동만필1」,「명천유사」발표. 7월, 한진출판사 편집고문 사임. 실천문학사 발행인 취임.

 

1985년 단편「강동만필2」발표.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집행위원.

1987년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

1988년 동시집 『개구쟁이 산복이』(창작과비평사) 간행. 민족작가회의 탈퇴.

1989년 1부(스포츠서울사), 『산너머 남촌』(창작과 비평사) 간행. 제7회 요산 문학상 수상.

1991년 단편「장곡리 고욤나무」(『우정 반세기』), 「유자소전」(《세계의 문학》) 발표.「장곡리 고욤나무」로 제9회 흙의 문예상 수상. 펜문학상 수상.

1992년 제2회 서라벌문학상 수상. 장편 『매월당 김시습』(문이당) 간행.

1993년 제8회 만해문학상 수상.

1994년 「더더대를 찾아서」, 「장척리 으름나무」 발표.

1995년 한국소설가협회 상임이사. 「장동리 싸리나무」 발표.

1996년 문학의 해 집행위원회 출판 홍보분과위원장

1998년 「장천리 소태나무」 발표. 민족문학작가회의 부이사장

1999년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

2000년 [내 몸은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왔다]로 동인문학상 수상

2003년 2월 25일 사망.

 

2. 작품에 반영된 작가의 생애

 

이문구는 농촌에서 태어나 6.25를 겪은 후, 서울로 이주한 탈향민이다. 이문구의 삶에는 충족과 결핍, 행복과 고난의 대조가 뚜렷하게 나타난다. 이문구에게 있어 명문거족의 후손, 풍요로운 유년기의 기억은 풍요를 느끼게 하여, 농촌 공동체에 대한 지향으로 나아가게 한다. 반면에 6․25로 가족사의 파탄, 소년 가장으로 전락, 서울 이주 뒤 떠돌이 행상, 막노동으로 20대를 보낸 것은 결핍적인 체험이다. 유년기에는 농촌공동체의 풍속과 인정을 경험했는데, 이러한 행복한 경험은 『관촌수필』 연작에서 그려낸다. 반면에 농촌을 떠나 공사판을 전전하며 겪은 밑바닥 인생의 원한과 울분도 소설화하였는데, 장편소설 『장한몽』이 그러한 성향을 대표적으로 나타내는 예이다.

 

① 가족사의 반영

군서기, 등기소서기, 사법서사 등을 지낸 이문구의 아버지는 남로당 보령군 총책을 맡았는데, 6.25 직후 예비 검속되어 치안 기관에 의해서 살해된다. 이 때 둘째 형, 셋째 형도 죽음을 당한다. 이러한 집안 사정은 이문구가 문학을 하게 한 중요한 이유가 된다. 어느 작가가 빨갱이로 몰려 죽게 되었을 때, 문인들의 구명으로 살아나게 된 것을 보고 문학을 하게 되었다고 술회한다. 이문구는 ‘문학을 하면 개죽음만은 면할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하여, 마침내 작가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좌익활동을 하면서 이데올로기를 추구한 아버지와 달리, 이문구는 이념을 거부하고 인간다운 삶, 순박한 심성에 가치를 둔다.

유년기의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이는 조부이다. 유생이자 향교의 직원이었던 할아버지로부터 천자문을 익혔고, 재래적 가정교육을 받는다. 할아버지는 이문구에게 성장기의 인격을 형성하게 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작가로서 성장하는 데 고유한 토대를 마련하고 있다. 이문구의 소설에 나타나는 농촌공동체의 인정주의, 또는 보수적 근성도 조부의 인격적 감화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작품에서 옛글투도 가풍의 내림(『토정비결』의 저자, 이지함의 13대조)과 지방의 문장가로 활동한 할아버지의 교육에 의한 것이다.

 

② 농촌생활 경험의 반영

근대화, 도시화, 산업화가 진행되던 1970년대에는 전통적 질서가 붕괴되고, 농촌공동체가 재편되어 농촌이 황폐화된다. 절대적 가난은 해소되었지만, 농촌은 산업화의 희생양이자 도시 수탈의 대상으로서 상대적 빈곤에 시달린다. 1970년대에 이문구는 창작활동을 활발히 하여, 비중 있는 농촌소설 작가로서 주목받는다.

이문구는 농촌소설을 썼는데, 그 이유를 ‘첫째, 농촌은 자신이 너무 익히 아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둘째, 농촌을 소설로 취재하는 작가가 드물기 때문이다. 셋째, 농촌이 관념적 대상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것에 대한 반발감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이문구는 1941년 4월 12일, 충청남도 보령군 대천면 대천리 387번지 관촌마을에서 태어났다. 농촌에서 출생하고 성장한 사실은 농촌작가로서의 토대를 마련해준 것이다. 『관촌수필』연작은 유년기의 체험을 서술하는데, 고향인 관촌은 그에게서 목가적인 낙원이다. 인심, 인정의 인정주의 세계는 토착적이고 재래적인 정서이다. 이에 근대화된 사회에서 공동체적 삶이 회복될 수 없음을 아쉬워한다.

36세(1977)에 이문구는 경기도 화성군 향남면 행정리 205번지로 이거한다. 본래 농민 출신인 그가 농민들 속에서 어울려 살게 된 것인데, 이를 통해 상업주의와 소비문화에 잠식당하는 농촌현실을 파악하게 된다. 화성군 발안에서의 생활이 연작 『우리 동네』의 창작 모티프와도 깊게 관련된다. 「우리 동네」는 70년대 한국농촌을 배경으로 도시경제의 허황된 물결이 농촌에까지 침투되었음을 실감나게 묘파하는 대표적인 예이다.

 

③ 도시생활 경험의 반영

대학을 졸업한 23살(1964년)에는 험악한 노가다판에서 5년간 막일을 했다. 변두리나 밑바닥에 전전하는 뜨내기들로부터 들은 얘깃거리, 열악한 노동현장에서의 사람사는 이야기는 작가지망생이었던 그에게 큰 도움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의 작품에 이 시기의 현장체험이 구체적으로 되살려지기도 했다. 이문구는 특히 연희동 소재 주한외국인학교 터에 있었던 공동묘지 3,000기를 옮겼던 일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한다. 1970년(29세)에 쓴 『장한몽』은 1966년 연희동 공동묘지 이장공사판에서 인부로 일할 때 얻은 소재를 바탕으로 창작한 장편소설이다. 이문구는 묘지 이장 공사판에 모인 인부들을 통해 전쟁과 빈곤으로 얼룩진 한국현대사의 비극적 근원을 캐내고자 한다. 관념성이나 추상성을 배제한 야생적 사실주의를 성취시키고, 삶의 이면과 표면을 파헤침으로써 개인의 삶과 제도의 운영 사이에 야기된 모순의 관계 의미를 분명하게 나타낸다.

39세(1980년)에 국보위에서 정치 활동규제자를 발표했는데, 이문구는 문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정치 활동규제자로 지목된다. 이것은 문협 이사장 선거 때마다 깊이 관여했던 이문구를 국보위가 문단조직력이 있는 걸로 오인한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1989년에 서울생활을 청산하고 충남 보령군 장산리로 내려와서 매월당 김시습과 이지함을 역사소설로 재구성한다. 『매월당 김시습』은 80년대 사건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매월당 김시습은 정치변동의 상황마다 정치권력으로부터 모욕을 당하고 곤욕을 치르는 문사, 문인들의 전형적 인간상이기 때문이다.

 

④ 기타 요인의 반영

중학교 시절에 전교수석으로 입학하였지만, 공부 대신에 어른들이 ‘애 버려놓는 못된 책’이라고 흔히 일컫는 소설을 읽는데 소일해서 성적이 순식간에 떨어졌다. 이문구는 자신의 중학시절을 다독과 남독의 시절이라고 회상한다. 그는 이 때 <구운몽>, <사씨남정기>, <심청전>, <흥부전> 등 고대소설에 재미를 느끼는데 이 때 읽은 고대소설의 가사체는 그의 소설작법에 영향을 준 것으로 짐작된다. 이 점은 그의 작품세계를 이루는 중요한 특징이며 근대화에 저항하는 주체적인 문체를 이룬 원인의 한 측면이다.

1960년대에 이문구는 청년기였는데, 이 시기에 1970년대에 농촌작가로 크게 성장할 기틀도 마련한다. 장사로 번 돈으로 20세(1961년)에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에 진학하는데, 김동리로부터 ‘문체가 남다르다’고 인정을 받는다. 김동리는 이문구의 습작에 대해, ‘나는 이 학생이 앞으로 우리 한국 문단에 아주 희귀한 스타일리스트가 되리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김동리는 일찍이 조실부모하여 어른의 사랑을 모르고 성장한 이문구에게 조부와 더불어 그의 정신을 조절하는 기둥이었고, 정신의 아버지로서 존재하게 된다.

 

 

Ⅱ. 이문구 소설의 특징

 

이문구의 소설을 평가하는 데 있어 사회 맥락적인 관점으로 근대화 속에서 황폐화 되어가는 농촌 세계를 다루었다는 점과 형식적인 관점으로 구연체적인 문체를 사용했다는 점을 특징으로 꼽고 있다.

 

1. 농촌 소설

 

이문구는 농민소설 작가로서 급속한 산업화, 도시화로 인해 전통적인 농어촌 공동체의 급격한 해체를 비판한다. 근대화, 산업화 이전에는 사람과 자연, 사람과 사람이 서로 공존하면서 조화를 이루었으며, 인간의 도리와 이치를 존중하며 살아왔음을 그려낸다. 현대사회의 병폐를 극복하기 위해 옛것에 대한 재인식이 나타난다.

『관촌수필』은 1960년대 평화롭던 농촌 공동체가 해체, 변모되는 양상을 그리고 있으며, 농촌 소설 작가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한 『우리동네』는 자본주의적 근대화에 따른 1970년대 농촌 현실의 변모와 제반문제를 심도 있게 그려낸다. 『산너머 남촌』에서는 1980년대 농촌의 잡다한 세태와 풍속을 그리고 있으며『내 몸은 너무 오래 서있거나 걸어왔다』에서는 우루과이라운드와 IMF등으로 상처 입은 1990년대 농촌의 상황에 대응하는 다양한 모습을 담고 있다.

이문구가 그리고 있는 전근대적인 농촌은 순박하고 인정스러운 공동체를 의미한다. 근대화로 인해 변모된 시점에서, 공동체적인 농촌을 그리워하게 한다. 농촌에 파급된 각종 문명의 이기, 제도로 농촌공동체가 해체되어감에 따라, 고향에 대한 상실감과 그리움을 드러낸다.「관촌수필」은 순진성과 인정에 의해 포용되던 공동체적 삶을 잘 그려내고 있다. 해체되기 시작하는 농촌의 모습과 그러한 고향 상실에 대환 애환이 『관촌수필』의 정서라면 『우리 동네』는 해체와 변형을 통해 오늘날의 농촌사회가 자족적이고 인간적인 공동체이기를 그쳤음을 보여준다. 절대적 빈곤에서 벗어났으나 근대화의 희생양, 도시의 수탈 대상이 되어 상대적 빈곤에 헐떡이는 농민들의 심성이 각박해지고 허황해지는 등 황폐해진 농촌 현실의 실상을 생생하게 형상화함으로써 우리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근대화의 부정성․파행성을 폭로하고 비판한다.

모태인 농촌으로부터 분리되어 도시의 하층(부랑아)에서 생존을 위한 처절한 사투를 벌이는 내용도 형상화한다. 고향을 떠나게 된 것은 농어촌생활의 전반적인 궁핍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즉, 서울 변두리의 떠돌이 노동자들의 생태를 다룬 이문구의 소설은 가난에 못 이겨 고향을 떠나온 사람들의 고난에 대한 증언이다. 서울의 빈민층으로서 탈향민인 그들의 양태를 그리면서, 그들의 환멸과 소외의 경험을 주의깊게 부각시킨다. 그들은 점점 정신적으로도 고향 상실의 불행을 겪는다. 농민 출신의 소외받는 도시 하층민을 통해 근대화의 모순을 그려낸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장편 「장한몽」이 있다.

 

2. 구연체적 소설

 

근대화는 언어의 변질을 가져왔을 뿐 아니라, 변질된 언어에 의해 은폐되어 왔다. 변질된 언어는 농촌적, 민족적 삶의 질서와의 단절을 나타내며, 이러한 단절을 자연스럽게 느끼도록 조장한다. 이문구는 근대화에 야기된 언어생활의 삭막한 변화에 대해 대단히 민감한 작가로서, 언어 사용에 있어서 하나의 전범을 보여준다. 진정한 농촌소설은 농민의 언어를 떠나 성립할 수 없음을 알게 한다.

이문구 소설의 문체는 작가로서 독특한 그만의 개성을 형성하는데 크게 한몫하고 있다. 이문구 소설의 구연체 자취는 만연체 문장, 구어체, 이야기꾼이라는 말로 지적된다. 구비문학의 전통에 기초한 구연성은 문자 이전의 시기에 형성된 것으로 화자와 청자 사이에 공감을 형성한다. 구연체 표현은 공동체적 삶의 근원에 연관된 내용과 삶의 근원적 결속을 표현하는 언어들은 인간의 근원적 가치를 담은 이야기를 구현하며 과거지향적 전망을 포함한다.

자신이 자라온 고향 농촌 방언의 빈번한 사용은 농촌현실의 사실적인 재현을 위한 예술적 고려로서 작용한다. 더 나아가 근대화에 대한 강력한 회의와 도전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문구의 소설에는 지금의 언중들이 잃어버린 어휘나 속담, 격언을 많이 사용되고, 충청도 사투리가 풍부하게 재현되어 있으며, 만연체이기 때문에 문체가 매우 독특하다. 어휘나 비유뿐 아니라 문장의 흐름 자체가 근대화라는 사회적 변화에 완강히 저항하고 있다. 즉, 문체는 조화로운 질서의 와해를 가져온 인공적인 질서에 대한 반감을 형식적으로 형상화한다.

 

첨부파일 이문구의 연보와 생애.hwp

출처 : 글밭문학기행
글쓴이 : 아리수(전서영)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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