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에겐 누이 없고 그 바다엔 우체국 없네 | |
11. 체험을 재구성하라
없는 것이 너무 많아서
스무 살 때 쓴 시 <낙동강>의 한 부분이다. 이 시가 그리고 있는 대로라면 우리 아버지는 강에서 목선을 타고 고기를 잡는 어부거나 뱃사공이어야 한다. 또한 아버지에게 그물 한 장을 물려받은 시 속의 ‘나’는 이 시를 쓴 안도현이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 아버지는 나에게 그물을 물려주기는커녕 그 당시 경기도 여주에서 수박농사를 짓던 농부였고, 낡은 목선을 소유했거나 수리해본 적이 없는 분이었다. 나는 요샛말로 뻥을 친 것이다.
나는 낙동강이라는 제재를 붙들고 ‘할아버지-아버지-나’로 이어지는 삼대의 면면한 핏줄을 노래하고 싶었고, 그물 한 장을 물려받는 것으로 마음속의 메시지를 구체화하고자 했다. 관계를 상징하는 데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소재인 그물을 어떻게든 이 시에다 끌어들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본의 아니게(아니 의도적으로) 아버지를 어부로 둔갑을 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나는 있지도 않은 사실을 있는 것처럼 시로 말했으니 사기를 친 것인가? 나는 시인으로서 진실하지 않은 뻥쟁이인가?
시적허구 속에서 노래하고
시 속에서 말하는 사람을 화자라고 한다. 화자는 때로 ‘서정적 자아’ ‘시적 자아’ ‘시적 주체’ ‘서정적 주인공’ ‘페르소나’(persona)와 같은 용어로 다르게 부르기도 한다. 어떻게 부르든 시인과 화자를 따로 구별하는 것은 그 둘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습작기에 있는 사람일수록 시인과 화자를 의식적으로 구별하는 공부가 꼭 필요하다. 시를 쓰는 시인은 화자를 통해 말해야지 스스로 시 속에 뛰어들면 안 된다. 그러면 시가 시인의 사적인 발언으로 전락하고 만다. 시인과 화자를 동일하게 여기지 말고 구별하기 위해서는 먼저 시라는 형식이 하나의 허구임을 전제로 해야 한다. 안타깝게도 우리의 문학교과서는 ‘소설은 허구’라는 명제를 강조하면서도 ‘시는 허구’라는 말을 기술하는 데 인색하다. 모든 시가 허구가 아니라면 시가 예술로서의 자주성과 독립성을 보장받을 수가 없다. 신변잡기 같은 사사로운 글을 문학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시는 시인의 사적이고 주관적인 체험의 바탕 위에 만들어지는 것일 뿐, 시인의 체험이나 감정을 단순히 나열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시인의 사소한 체험은 작품 속에서 치밀하게 재구성되는 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그것을 우리는 시적 허구라고 부른다.
이형기는 또 “사실의 세계가 신의 창작물이듯 허구의 세계는 인간의 창작물”이라고 했다. 이 말을 조금 바꾸면, 신은 ‘사실’을 만들고 인간은 ‘진실’을 만드는 자라고 할 수 있다. 즉 시인은 사실보다 진실에 복무하는 자라는 말이다. 어떠한 진실을 그리기 위해 시인은 사실을 일그러뜨리거나 첨삭할 수 있다. 사실과 상상, 혹은 실제와 가공 사이로 난 그 조붓한 길이 바로 시적 허구다. 이 시적 허구를 인정하지 않고 사실 속에 갇혀 있으면 시인은 숨을 내쉴 수도 없고, 상상의 나라에 가지 못한다. 물론 진실을 노래할 기력도 사라진다. 그의 시는 제자리걸음을 하느라 아까운 세월을 다 보내게 된다.(그날 있었던 사실만 쓰려는 아이는 일기에 쓸 게 없다고 투덜거리거나 쩔쩔매게 마련이다.) 시를 한 편 한 편 쓸 때마다 당신은 연출가가 되어야 한다. 화자를 시의 무대 위로 내보내 놓고 화자의 뒤에 숨어 배후 조종자가 되어야 한다. 배우(화자)의 연기가 서툴거든 호되게 꾸짖어라. 그래도 배우가 영 탐탁지 않으면 당신이 배우의 가면을 쓰고 아주 잠깐 배우와 똑같은 의상을 입고 무대로 나가보라. 관객(독자)의 눈에는 당신이 무대에 등장한 줄도 모르고 가면 쓴 배우만 보일 뿐이니 아무 문제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사실보다 진실 그리는 시인
우리 현대시의 훌륭한 배후 조종자인 김소월과 한용운은 <진달래꽃>과 <님의 침묵>에서 여성 화자의 입을 빌려 이별의 정한을 멋들어지게 노래했다. 고은의 가계에는 실제로 누이가 없다. 그렇지만 그의 초기 시의 화자는 <폐결핵> <사치> <작별>과 같은 시에서 실제로 없는 누이를 여럿 거느리는 포즈를 취하면서 소름 돋도록 놀라운 아름다움을 만들어냈다. 대학 4학년 때 겨울, 신춘문예를 준비하면서 나는 혁명에 실패하고 서울로 잡혀가는 전봉준을 그리기 위해 고심하고 있었다. 신춘문예가 입을 모아 요구하는 ‘참신성’을 공식처럼 외우고 다니면서도 나는 좀 다른 꿈을 꾸고 있었다. 80년대라는 시대와 시를 어떻게 결합할 수 없나, 하는 것이었다.(캠퍼스 안에는 정보 경찰들이 합법적으로 방을 얻어 드나들던 시절이었다. 문학의 밤을 준비하면서 그 이름을 ‘이 어둠 속에서 타오르는 시’로 내걸었다가 ‘어둠’이 무엇인가에 대해 따지는 사람들과 고된 입씨름을 벌여야 했다. 그 흔한 ‘어둠’의 은유 하나도 허락되지 않던 때의 시는 그에 맞서기 위해 ‘어둠’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 무렵에 읽은 책 중의 하나가 재일사학자 강재언이 쓴 <한국근대사>였다. 책을 다 읽고 책장을 덮었을 때 책의 뒤표지에는 한 장의 조그마한 사진이 붙어 있었다. 그 사진을 설명하는 짤막한 한 마디, ‘서울로 압송되는 전봉준’을 나는 노트 한쪽에 또박또박 적어 두었다. ‘서울로 압송되는 전봉준’을 ‘서울로 가는 전봉준’으로 고치고 그걸 제목으로 삼아 학교 앞 자취방에 엎드려 시를 썼다. 동학농민전쟁에 대한 또 다른 책들을 통해 역사적 사실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상상력을 건드리는 몇 가지 허구의 재료들을 모았다. 전봉준이 전북 순창의 피노리에서 체포된 시기는 음력으로 정월이었다. 그 어느 책에도 서울로 압송되는 동안 눈이 내렸다는 기록은 없다. 하지만 역사는 압송 시기를 음력 정월로 적어 놓았으니 이걸 놓칠 수 없었다. 나는 시의 배경에다 눈을 퍼부어 대기로 했다. “눈 내리는 만경 들 건너가네/ 해진 짚신에 상투 하나 떠가네” 이렇게 시작되는 이 시는 시가 끝날 때까지 눈이 내린다. 만약에 앞으로 전봉준이 서울로 압송되는 장면을 영화로 찍는 감독이 있다면 반드시 눈이 내리는 날을 배경으로 잡을 것 같다. 시적 허구는 역사적 사실보다 생동감 있는 진실을 보여주므로.
아아, 나는 그분들을 모두 실망시키고 말았다. 나는 가끔 변산반도 쪽으로 바람을 쐬러 가는데, 그 바닷가 언덕에 있는 몇몇 낡은 집들에 매혹되어 오래오래 그 집들을 바라본 적이 있었다. 그게 죄였다. 그 언덕 위의 낡은 집 문앞에 빨간 우체통을 세워두고, 우체국장을 출근시키고, 우표를 팔고, 우체부의 자전거를 굴러가게 하고, ‘바닷가 우체국’이라는 간판을 거는 상상을 한 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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