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도 홍성이 고향인 이정록의 시집이다. 오랜만에 내 고향 말로 된 시를 읽으며 깔깔 웃었다. 아버지 어머니의 말씀이 그대로 한 편의 시가 되었다. 시인은 아버지의 위트와 어머니의 관조와 품격을 물려받았다는 한창훈의 발문에 끄덕여진다.
1부의 금강산기행의 시편은 뭉클하고, 2부 가족과 사람들의 짠한 인생사를 유머로 풀줄 아는 인생의 관조를 보여준다. 3부와 4부에서 보여지는 자신과 이웃들의 얘기도 감동스럽다. 보통은 한 편의 시집에서 내 마음에 콕 와닿는 시가 많지 않은데,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은 한편도 버릴 것없이 가슴에 와 닿았다.
엄니의 남자
엄니와 밤늦게 뽕짝을 듣는다
얼마나 감돌았는지 끊일 듯 에일 듯 신파연명조다
마른 젖 보채듯 엄니 일으켜 블루스라는 걸 춘다
허리께에 닿는 삼베 뭉치 머리칼, 선산에 짜다 만 수의라도 있는가
엄니의 궁둥이와 산도가 선산 쪽으로 쏠린다
이태 전만 해도 젖가슴이 착 붙어서
이게 모자(母子)다 싶었는데 가오리연만한 허공이 생긴다
어색할 땐 호통이 제일이라, 아버지한테 배운 대로 헛기침 놓는다
"엄니, 저한티 남자를 느껴유? 워째 자꾸 엉치를 뺀대유?"
"미친놈, 남정네는 무슨? 허리가 꼬부라져서 그런 겨"
자개농 쪽으로 팔베개 당겼다 놓았다 썰물 키질소리
"가상키는 하다만, 큰애 니가 암만 힘써도
아버지 자리는 어림도 읎어야"
신파연명조로 온통 풀벌레 운다
어머니와 아들이 같이 늙어가며 블루스를 춘다는 거, 정겨운 풍경 아닌가! 늙으신 엄니 춤상대를 해줄 순 있지만 아버지 자리 대신할 애인은 못 돼주는구나.ㅋㅋㅋ 이 모자의 대화 뿐 아니라 충청도 사투리의 진수는 말의 게미가 있다.^^
잘 나간다는 말
요즘 잘 나간다매? / 잡지 나부랭이에 글 좀 쓰는 게, 뭐 잘나가는 거래유? / 그게 아니고, 요새 툭 하면 집 나간다매? / 지가 외출하는 건 성님이 물꼬 보러 가는 거랑 같은거유 / 물꼬를 둘러보는 건 소출하고 관계가 깊은디, 아우 가출도 살림이 되나? / 좋은 글 쓰려고 노력허고 있슈 / 요샌 우리도 물꼬 안 봐 / 알았슈 이제부터 사금파리 한 쪽이라도 물고 들어올께유 / 입에 피칠하고 들어와서 식구들 실신시킬라고 그러나? 웬만하면 나가덜 말어 / 알겄슈 / 글이랑 게 문리를 깨치면 눈감고도 삼천리 아닌감 옆 동네 이문구 선생 같은 양반도, 글쟁이들은 골방에서 문장이나 지으라고 그랬다잖여 / 방에만 있으면 글이 되간디유? / 어허, 싸댕기며 이삭 모가지 뽑는다고 나락이 익간디? 집에 들앉아서 제수씨 물꼬나 잘 보란 말이여 / 성님이나 잘 허셔유 / 얘가 귓구녕이 멀었나? / 인제 물꼬 안 본다니께 / 근데 형수님은 어디 갔데유? / 니 형수 요새 잘 나가야 몇 달 됐어 차례 지내려먼 이제 그만 자야지 않겄어 / 얼라, 언변이 윗마실도 아닌디 어디 가셨대유? / 씨부럴, 요즘 담배는 워째 이리 젖불 쬐는 것 같댜?
세실님은 오리지널 충청도 사투리 다 알아들을 것이고, 메피님은 요런게 충청도 사투리의 맛이라는 걸 아실려나?ㅋㅋㅋ 그래도 압권은 뭐니뭐니 해도 '홍어'였다.
홍어
욕쟁이 목포홍어집
마흔 넘은 큰아들
골수암 나이만도 십사년이다
양쪽 다리 세 번 톱질했다
새우눈으로 웃는다
개업한 지 십팔년하고 십년
막걸리는 끓어오르고 홍어는 삭는다
부글부글,을 벌써 배웅한
저 늙은네는 곰삭은 젓갈이다
겨우 세 번 갔을 뿐인데
단골 내 남자 왔다고 홍어좆을 내온다
남세스럽게 잠자리에 이만한 게 없다며
꽃잎 한 점 넣어준다
서른여섯 뜨건 젖가슴에
동사한 신랑 묻은 뒤로는
밤늦도록 홍어좆만 주물럭거렸다고
만만한 게 홍어좆밖에 없었다고
얼음 막걸리를 젓는다
얼어죽은 남편과 아픈 큰애와
박복한 이년을 합치면
그게 바로 내 인생의 삼합이라고
우리집 큰놈은 이제
쓸모도 없는 거시기만 남았다고
두 다리보다도 그게 더 길다고
막걸리 거품처럼 웃는다
’이것이 인생이다’에 나올 만한 인생 아닌가!
'구라'로 유명한 황석영도 고개를 저으며 '너한테 졌다'라고 할만큼 시인의 말빨은 독보적이라고 한다. 수록된 시를 읽어보면, 시인이 시를 쓸 때 어머니만큼 강력한 동기와 큰 메타포가 없을거라는 해설도 이해가 된다. 어머니가 없었다면 대한민국 시인의 태반은 삼수째, 사수째, 자격증 취득 실패에 머물고 있을 거란다. 그래서 어머니는 시의 출발점이고 창작과정이며 도달점이란다.
시인은 '시는 쓰는 게 아니라 받아 모시는 거다. 시는, 온 몸으로 줍는 거'라고 한다. 하지만 아무나 줍는 게 아니라서 역시 시는 천재의 영역이구나, 또 한 풀 꺾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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