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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리의 수업/시 배움 자료

수필과 시의 문장구조상 차이

by 拏俐♡나리 2010. 11. 17.

수필과 시의 문장구조상 차이

-수필에 있어서의 詩的 表現-


                                                                                                      유 경 환 (시인, 연세대 겸임교수)

1.수필문장과 산문정신

나는 부끄러운 과거를 지니고 있다. 이미 활자화 된 것이라 변명하거나 취소할 수가 없기에 부끄럽다. 이미 떨어져나간 나의 분신이 곧 나의 과거다. 헌 책방에, 시골 서점에 또 문우의 서가에 꽂혀 있다. 속으로 바라기는 깨끗이 없어졌으면 싶은 것이다.
낙엽이듯 오래되면 삭아 없어지길 바라나 책자이기에 쉽사리 삭지 아니한다. 취소될 수 없는 문학의 "증언"으로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이 과거가 나의 문학수업에 있어서 창작태도에 성찰의 동기가 되었다. 나는 1957년「현대문학」에서 박두진(朴斗鎭)시인에 의해 시 부분에 추천되었다. 45년 전이다.
20대 초반 대학생 시절이다. 이미 그전에「새벗」,「소년세계」,「학원」따위 월간 문예지에서 몇 가지 문학상을 받은 터였다. 마음으로 채 어른이 되기 전이라 글을 쓸 기회가 내게 닿기만 하면 글을 썼다. 이렇게 쓴 글 쪽들이 모여 책이 되기 시작했다.

나의 첫 산문집은 70년대 초 범우사에서 출간된『길에서 주운 생각들』이다. 이후 열 몇 권의 산문집을 계속 출간한다. 오늘날 돌아보니 온통 부끄러운 것들이지 않은가. 왜 지금 와서 부끄럽다고 하는가. 성숙되지 아니한 생각, 그것이 노증되기 때문이다. 충분히 성숙되지 아니한 생각들이라 풋과일처럼 떫고 시다. 그때엔 이를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나만이 쓸 수 있는 독특한 스타일의 문장이라 여겼고 당연히 이런 문장이 빛날 것이라고 자만했다.
왜 이런 문장을 속으로 자랑스럽게 여겼을까. 차근히 반성해 보자. 우선 1930년대 이후 우리나라 수필의 그 한결같은 문체 그 단조로움에 싫증을 느꼈다. 이들과 차별되는 문장을 쓰고 싶었다. 이것이 설익었던 당시 나의 사유였다. 그 다음 휴전 이후 10대 시절부터 시작한 학교 교육 과정을 밟으며 읽기 시작한 외국어 문장 그 문체에 매력을 느꼈고 그 문장이 풍기는 멋을 흉내내고 싶었다.
영어 문장의 빛나는 묘사와 활력있는 기교, 그리고 거침없이 구사할 수 있는 구(句)와 절(節), 그 뿐인가. 얼마든지 길게 끌고 갈 수 있는 관계대명사의 활용에서 우리나라 문장구조가 영어의 그것에 비해 단순하고 제약적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이런 판단은 오류였다.

잘못된 판단이라고 깨닫게 된 결과, 내 글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게 된 것이다. 산문정신에 어긋나는 글을 써서 발표한 그 행위가 부끄러워진 것이다. 마치 지난날의 일기를 다시 읽으면서 낯을 붉히는 일과 다르지 않다. 수필은 자기를 드러내는 필체와도 비슷해서 성숙한 사상이 그대로 전이(轉移)된다.
그러므로 겸손하고 담백한 것일수록 향기를 지닌다. 우리나라 흙을 기지고 도예를 하면 형상화된 예술성 또한 지극히 한국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도예가의 숨결이 그대로 스며 배이기에 그렇다. 글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우리 글을 가지고 수필을 쓰는 경우 우리 어문 구조에 철저해야 한다.
우리 글의 구조와 문법에 정확해야 하며 우리식 산문이 요구하는 신문정신에 따라야 한다. 우리 글을 가지고 외국 글처럼 서술하면 번역문장으로 오해되기 십상이다.
또 우리 글에서는 문장의 길이가 어느 정도일 때 적당한가. 곧 낱말이 몇 개가 연결될 때 소구력(訴求力)이 큰가를 생각하여야 한다. 그리고 우리 글에서 흔히 생략되는 주어가 거느리는 영향력은 어느 범위까지에 동사와 연결되는지도 생각해야 한다.
영어에서는 주어 바로 다음에 동사가 오지만 우리 글에서는 주어와 동사 사이가 엄청난 거리로 떨어져 있으며 그 사이에 간격서술어가 삽입되고 관계대명사 없이 구나 절이 끼여들므로 그 기본구조를 읽어내기가 어렵다. 문장이 길면 길수록 주어가 어떤 것이었는지 잊혀져서 뜻을 파악하기 어렵게 되며 문장이 모호해진다. 그러므로 산문정신에 따라야만 분명한 글이 되고 주제가 선명해진다. 좋은 글, 곧 좋은 수필은 겨울나무 가지처럼 주제가 확실하게 보인다.


2.수필문장과 시적 표현

오창익 교수 정년퇴임문집 증정식에서 창작수필 문우회원들이 내게 질문한 것 가운데 중복된 것은 수필에 나타나는 시적 표현에 관한 것이었다. 아런 질문을 귀담아 들으면서 "이분들이 멋진 문장을 쓰고 싶어하는구나"하고 짐작했다. 수필을 공부하는 분들이 시적 표현의 기술, 기교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하다가 내가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는 점과 그리고 내가 발표하는 수필에서 어떤 기법을 눈치채었을지도 모른다고 속으로 혼자 짚어보았지만 그러나 여기 오해가 있음도 알아차렸다.
수필 속에 시적 표현을 삽입하는 기술은 없다. 시적 표현을 의도적으로 수필문장에 끼워 넣으려는 노력은 가당치 아니하다.
왜냐하면 수필은 원래 겨울나무처럼 나무의 본 모습을 있는 대로 드러내는 문학 형식이므로 그렇다. 수필은 수필이 요구하는 문장으로 쓰여져야 옳다. 수필은 그것이 요구하는 문장이 아닌 것으로 쓰여질 경우, 이미 수필작품이 아닌 것이다.

우리는 여성인 한 원로시인을 다 알고 있다. 또 중견시인이면서, 역시 여성인 어떤 분의 이름도 알고 있다. 이분들의 산문집이 신문지면을 통해 오래 전부터 널리 알려져 왔으니까, 이분들 산문집이 그토록 오래 여러 증판을 거치며 출간되었건만, 그러나 수필문단에서는 수필작품으로 평가하지 아니하며 또 수필가 반열에서 열외(列外)로 분류하거나 신앙고백서 정도로 치부하려 든다.

어째서냐고 물으면 우선 문장에서 수필작품이 아니라는 대답이다. 다시 말하면 신문정신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산문정신에 어긋나면 수필작품이 못되느냐고 되물으니, 이에 대한 대답은 "무슨 말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는 글인데… 그런데 어떻게 수필로 볼 수가 있느냐"이다.(물론 수필에 대한 정의(定義)가 전제되어야 할 문제이긴 하지만). 서양의 수필에는 참회록이 많고 신앙고백서는 더 많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를 정통 수필문학의 작품으로 평가하지 않고 있다.
시인들이 여간선용을 위해(또는 지난날의 나처럼 청탁이 오면 거절하지 아니하고) 시간의 여백을 채우는 자세로 수필을 쓰면서, 본격 수필다운 문장이 아닌 필치로 시와 산문을 섞은 "섞어찌개" 같은 여운이 도는, 조금은 애매하고 조금은 모호한, 그래서 무엇인가 알듯말듯한 표현기교를 남용해온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이것이 설익은 문학인의 태도인 줄 모르고 멋있는 기교로 안다면 큰 일이다.
되풀이하거니와 수필문장에 시적 표현을 의도적으로 시도(試圖)하는 태도는 옳지 못할 뿐만 아니라 성과를 거둘 확률도 지극히 낮다. 다만 원숙한 경지에 이른 문학인의 경우 의도적 시도가 아닌데도 저절로 시적 표현이라 감지될 만한 기교가 발휘될 수는 있다.
이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이지 의도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뎃생을 공부하는 미술학도와 원숙한 경지의 노 화가가 보여주는 필치의 차이라고 비유한다면 적절한 설명이 될 수 있을까. 시적 표현이라는 말부터 수필에서는 가당치 아니하다. 외냐하면 불필요하기 때문이다.
앞에서 내가 부끄럽다고 고백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아니하다. 설익은 과일은 아무리 빛깔이 고와도 향기가 없는 것과 같다. 제대로 익을 만큼 익어야 그 싱싱한 과향이 제맛으로 퍼지는 것 아닌가.


3. 수필에서의 형용사·부사 과용

시를 쓰는 사람이 수필에 손을 대면 수필의 격(格)을 떨어뜨린다는 비판은 타당한 평인가. 간단히 말하면 형용사 부사를 너무 자주 구사하기에 이런 평이 나오는 것이다. 시인이 시안(詩眼)으로 보고 느끼며 품는 정서를 그대로 낱낱이 다 전달하고 싶어서 형용사 부사를 필요 이상으로 구사하기 때문에 격을 떨어뜨린다. 쓴 사람이 진의와 상관없이 읽는 사람이 자기 체험 수준에 따라 이해 감상 수용하는 시작품에 있어서는 어떤 해석이 독자 가슴에 용솟음치든 쓴 사람이 개입할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시의 창작에 있어서는 문법이나 문장구조에 상관치 아니하고 전체적 정서를 위해서 형용사 부사를 2중 3중으로까지 구사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훈련되어 이런 창작태도에 길들여진 시인이 산문을 쓰게 되면 마치 "풀어서 쓴 시처럼 형용사 부사를 과용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시에 있어서는 다양한 해석을 유도하기 위해 형용사 부사의 복합구사가 용인된다. 창작기법상 형용사 부사의 기술적 재비치를 의도하는 까닭은 복합이미지를 만들어 내어서 단순한 상상이 아닌 연상작용까지 유인하여 상징과 비유의 효과를 높이기 위한 것이다. 시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할수록 시작품으로서의 생명을 누릴 수 있다.

그러나 수필에서는 그 주제가 명료해야 하며 주제의식이 뚜렷이 솟아올라야 하고 또 숨겨놓은 메시지도 드러날 만큼 분명해야 한다. 수필은 이렇듯 시와 차이를 지닌다 함에도 불구하고 수필에다 시 쓰는 태도를 혼용한다면, 시도 아니고 수필도 아닌 뒤죽박죽이 되지 않을 수가 없다. 시는 애매하고 모호한 표현기교로서 독자의 시적 상상의 범위를 확대하는 유인 동기를 설정한다. 시인이 시작품 속에 넣어놓은 고뇌, 갈등, 방황 따위를 독자가 받아들이지 못하면 난해한 시로 튕겨질 수 있다. 시에서는 시인이 지녔던 체험과 그리고 독자가 지닌 체험이 어느 정도 같은 수준이며 동질(同質)의 것일 경우, 정서 이동이 용이하게 되고 마침내 독자의 이해 감상 수용이 가능해진다.
수필에서는 작가와 독자 사이에 이루어지는 정서이동이 훨씬 쉽다. 까다롭게 동질 동수준의 체험을 반드시 요구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작가와 독자 사이에 정서 이동이 더 쉽도록 문법에 맞고 어문구조에서 일탈이 없도록 신문정신에 충실하기를 요구한다. 그러자면 자연히 문장이 담백해지며 간단명료한 구조를 지니게 되고 형용사 부사는 저절로 줄어들게 마련이다. 나는 이런 차이를 발견한지 얼마 안된다. 수필문우회의 월례 합평회에 참석한 뒤에 비로소 눈을 뜨게 되었다.

내가 나의 혼잡문장에 대해 부끄럽다고 한 것은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예를 들어 피천득, 김태길의 수필을 보면 곁가지도 없고 잎도 없는 겨울나무 같다. 그토록 단순 담백하다. 하지만 문장 어느 갈피에선가 글의 향기가 문향으로 은은하게 나온다. 이것이 수필의 향기다. 은연중에 배어나오는 향기라야 오래 갈 수 있다.
그런데 요즘엔 시인이 아닌 수필을 공부하는 사람들의 습작에도 형용사 부사가 과다하게 나온다. 자기가 보고 느낀 그 감격을 또는 황홀감을 낱낱이 다 전달하고 싶은 욕심 때문에 형용사 부사를 쓰고 싶은 만큼 다 동원하다 보면 결과적으로 감탄사의 반복 또는 구호의 연결문처럼 되는 것이다. 꼭 맞는 한마디의 말 곧 적제적소의 키워드(Key word)를 골라내기 보다, 자기 감흥을 마음껏 묘사하고 싶은 욕구에 끌려서 과잉흥분을 담기 슆다. 나는 글 한 편을 내놓기 전에 원고지에 몇 번 옮겨 쓰는 과정을 밟는데 첫 번 퇴고는 형용사 부사를 빨간 연필로 지워나가는 작업으로 시작한다.


4. 시인이 쓴 수필의 혼란

산문구조와 운문구조가 같지 않음을 다시 말한다. 시인으로 등단한 문인의 수필은, 다 모호한 문장구조를 지니는가. 그렇지는 아니하다. 다만 글의 구조적 차이가 있음을 확실히 인식하지 못하는 시인이 적지 않다는 사실은 지적해 둘만 하다. 산문구조에서는 문장이 되기 위해 문장의 주어(또는 생략된 주어)가 거느리는 동사와 반드시 연결되어야 한다. 이른바 주술어의 연결이다.
주어를 이어 받는 술어가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이 산문의 문장공식이다. 이 공식에 틈이 없어야 문법에 맞는 글이 되니 철저한 산문정신의 요구이다.
심지어 "한 문장에 한 메시지(One sentence one message)"라는 서양말을 인용해 가며 하나의 문장 속에 복합적인 메시지를 담는 것은 좋은 글이 아니라는 말까지 하고 있다.

인문과학이나 사회과학에서 논문을 쓸 때엔 논문작성에서 반드시 one sentence, one message"라는 말을 힘주어 가르친다. 하지만 논문이 아닌 문학적 문장에서는 이런 주장이 지나친 것이라고 우길 수 있다. 그렇다 하여도 한번 읽어서 다른 해석이 나오지 않을 만큼 분명하고 명료한 내용을 담은 문장이, 일반적으로 산문에서는 좋은 문장으로 일컬어진다. 수필도 그 성격에 따라 이 범주 안에서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반면에 운문 구조는 이와 대조적이다. 운문에서는 의도적으로 토씨를 떼어버린다. 문법 구조를 무시하고 행(行)과 연(聯)을 자주 바꿔가며 가능한 한 다양한 해석을 노려 이미지의 확대재생산을 유도하려고 한 문장 안에서 단절을 시도한다. 결국 어느 것이 주어이고 어는 것이 술어(동사)인지 식별이 안되도록 모호하게 쓰는 것이 시적 표현기교인 것이다. 이러니 시적 표현기교가 수필에 허용될 수 있겠는가.
잘 쓰여지지 아니한 시의 경우 의도적으로 행을 바꾸고 연을 갈라놓은 것을 다시 한 줄로 이어 연결하면, 그대로 줄글 곧 산문이 되는 경우가 있다(이것은 산문시와 다르다). 그러나 잘 쓰여진 시는 한 줄로 복원할 수가 없다. 한 줄로 이어 맞춰 놓는다 하여도 그대로 줄글이 되지 않는다.
역(逆)도 진(眞)이라는 소급법의 논리로 따져 본다면 시와 산문은 구조적으로 다른 것이다. 아무튼 운문에서는 의도적으로 문장의 연결 고리인 토씨를 잘라내어 독자가 앞뒤의 이미지를 연결하여 보도록 유도하는 반면에, 산문에서는 철저하게 완벽한 문장을 쓰도록 완벽주의를 강조하고 있으며 이 완전문장을 통해서 주제를 전달시키려 하는 것이다. 까닭에 수필에서는 그 문장이 교과서적이나 시에서는 변형일수록 묘미를 함축한다고 강조한다.


5. 문장에 용해된 시적 분위기

이제 결론을 위해 벌여놓은 말 갈래를 모아보자. 수필 속에서 시적 표현을 감지한다는 말은 엄격한 산문문장 속에 용해되어 있는 시적 느낌을 받는다는 것이 옳은 기술이다. 직접 표현된 단어로 오는 것이 아니라 읽고 나서 그 분위기의 여운으로 느낌을 받는 것이다. 완숙한 경지에 이른 화가는 그림 속에 메시지를 숨겨놓는다. 써놓지 않고서 감상자에게 읽어내게 한다.
마찬가지로 수필작품 속에 녹아 흐르는 시적 분위기를 느낄 수 있으며 이 느낌이 전달하는 글의 향기를 맡아낼 수 있다. 이양하의 수필「나무」를 초등학생이 읽으면 그 수준대로 이해할 수 있고, 중학생이 읽으면 중학생 수준으로 감상할 수 있으며 대학생이 읽으면 대학생 수준만큼 수용할 줄 안다. 직접 표현의 의미를 해석하는 연령이 각기 능력 수준에 따라 다른 수용을 가능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이것을 놓고 해석의 문제라고 말한다.

해석의 문제인 것을 더 살펴보자. 꾸불꾸불 자란 소나무를 보고 나서 기둥감으로 잘려가지 않으려고 꾸불꾸불 자랐다고 생존철학으로 해석하는 사람이 있고, 겸재 같은 화가들이「진경산수화」를 그릴 수 있도록 그림자료를 제공하려고 꾸불꾸불 뒤틀려 자랐다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어떤 현상에 대한 해석은 현상 자체와 다른 차원의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곧게 자라지 아니한 소나무의 모습이다.
이 논리대로 수필의 문장은 문장 자체로서 완전한 산문이어야 한다. 그래도 능력과 수준에 따라 수필에 대한 해석은 다양할 수밖에 없다.
처음부터 혼란스러운 문장으로 써놓고, "녹피에 가로 왈자" 같은 해석이 가능하도록 써놓고 수필문학이므로 괜찮다고 변명하는 것은 곤란하다. 혼란스런 문장은 기준미달의 글이므로 처음부터 해석 자체가 어려운 글일 뿐이다
눈부신 모시옷으로 의관을 제대로 차려입은 노인이 두루마기자락 날리며 걸어오는 모습을 한길에서 만난다면 그 의젓한 기품과 멋은 얼마나 눈부실까. 수필의 멋과 격 또한 제대로 쓴 글에서 우러나오는 것일 수밖에 없다. 수필은 정도(正道)의 문학이다.
그러므로 수필작품은 기교보다 정신에서 바른 격을 찾고 있으며, 써놓은 글뿐만 아니라 쓴 사람의 사람됨까지 돌아보게 한다. 수필은 글로 만들어 놓은 제 얼굴이며 오래 남는 분신이다. 기교는 돌아보는 세월의 때를 타나 기교가 아닌 향기는 세월의 때를 타지 않는다. 세월의 때를 타지 아니하는 향기는 문장 속에 녹아있는 향기다. 수필은 이런 문향을 중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