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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리의 수업/시 배움 자료

H형 친구, K형에게도 보냅니다.

by 拏俐♡나리 2010. 11. 25.

K형, 며칠 전 H형에게 소식 들었습니다. 오늘은 지난번에 답하지 못한 시의 언어(言語)에 대해서 얘기해보겠습니다. 에즈라 파운드에 의하면 언어가 담고 있는 기능은 세 가지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첫째는 영상적 요소(phanopoeia), 둘째는 운율적 요소(melopoeia), 셋째는 논리적 요소(logopoeia)가 그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쓰는 시는 이미지, 음악성, 의미라는 세 가지 요소를 근간으로 이루어진다는 뜻이지요. 이건 물론 교과서적인 이야기지요. 그러나 내가 새삼스럽게 거론하는 이유는 요즘 문학하는 사람들이 뭔가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아서입니다. 시뿐만이 아니라 모든 예술은 기본적으로 몇 가지 요소와 조건으로 이루어집니다. 이것은 미술도 음악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술과 비예술이 구분되는 것도 이러한 일정한 조건과 형식에 따르는 거지요. 그러므로 시에서 언어를 생각할 때는 어떤 한 부분만 바라보지 말고 여러 가지를 동시에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이미지즘을 선호하는 시인은 영상적 요소를 중시하고 정형시나 자유시를 선호하는 시인은 운율적 요소를 중시하고 관념적이거나 형이상학적인 시를 선호하는 사람은 논리적 요소를 중시하되, 어느 한 면이 아닌 상호 연관성을 고려해가며 창작에 임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나 역시 마찬가지거니와 문학을 하는 사람이면 누구든 자신만의 기호와 개성에 따라 어느 한쪽을 선호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언어예술인 시에서 언어의 근간인 '기능의 조화'를 무시하고 어느 한쪽만 선택하거나 배제한다면 기능의 분리현상이 일어납니다. 기능의 분리현상은 곧 이해 혼돈을 가져오고 이해 혼돈은 결과적으로 언어가 시를 죽이는 반란이 발생하지요. (하긴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론이 이 부분과 관련이 있기도 하지만요.) 생각해보세요. 언어를 부리기 위해서는 없는 기능도 동원해야 하는 판국에 근본적으로 내제된 고유 기능을 제거하고서 어떻게 말을 자유자재로 부릴 수 있겠는지요. 따라서 시를 쓰는 사람은 좋으나 싫으나 언어의 세 가지 기능을 숙명으로 껴안고 나아가야 합니다.
  
  K형, 나도 난해시를 자주 읽습니다. 공부 삼아 읽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일말의 기대감이 있기 때문이지요. 읽다보면 어떤 시는 의미는 통하지 않지만 아주 즐거운 느낌을 주는 시도 있고 어떤 시는 언어의 충돌과 긴장감으로 신선함을 주는 시도 있고 또 어떤 시는 감동은 없지만 환상적인 느낌을 주는 시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시는 그야말로 눈 씻고 찾아봐도 찾기 힘들 정도의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좀 더 솔직히 말한다면 난해시나 해체시의 십중팔구는 치기나 용기를 무기로 쓴 아류에 불과하다고 봅니다. 설치미술가인 ‘뒤샹’이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에 뉴욕의 한 갤러리에 변기를 갖다 놓고 ‘샘’이라 이름을 붙였을 때 당시의 사람들은 당혹스러워하면서도 그 예술적 신선함과 실험정신을 평가해주었지만 오늘날 우리나라 어떤 예술가가 인사동에 요강을 갖다놓고 ‘우물’이라고 이름 붙여 놓는다고 해서 신선하다고 할 사람은 없을 겁니다. 물론 그 사실을 접해본 적 없는 일부에게는 놀라워 보이기도 하겠지요. 비유가 심할지 모르겠지만 내 눈에는 요즘 비서정, 반서정을 외치며 시를 쓰는 사람들이 바로 그런 꼴입니다. 알고 보면 도무지 새롭지도 않고 문학성도 없는 글들을 기존의 시와는 차원이 다르다고 믿고 허깨비를 좇는 형국이지요. 그와 같은 현상은 내가 알기로 이십 년 전에도 있었고 칠십 년 전에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현재까지 살아남은 시는 몇 편이나 됩니까. 문학에서 차별화와 독창성은 공감의 영역 안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지 독선과 내폐성에 의한 암호까지 다 수용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술은 아는 만큼만 보인다고 했는지도 모릅니다.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그게 그럴 듯하게 보이겠지요. 나도 한때는 그런 유혹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던 시절이 있었답니다.^^
  
  K형, 시의 세계가 비단 즐거움이나 깨달음이나 감동을 주기 위한 타자 우선의 문학만이 아니라는 건 잘 알고 있을 터입니다. 시문학은 자신 내면의 세계를 언어로 표출하는 것이기 때문에 원초적으로 1인칭 문학이라는 속성을 지닙니다. 바꿔 말하면 메시지의 욕망보다 독백의 충동이 강하다는 거죠. 그러나 그것이 자신 안에 머무르지 않고 타자에게 전출되었을 때에는 소통을 요하는 최소한의 배려와 책임도 따라야 합니다. 말도 되지 않은 글을 휙 던져 놓고 ‘이것도 시다’ 말할 양이라면 누군들 시를 못 쓰겠습니까? 그래서 난 아까 ‘치기’와 ‘용기’란 표현을 썼던 거지요. 참, 얘기가 빗나갔지만 난해한 시라고 시가 나쁘다는 건 아닙니다. 사실 모든 시는 본래적으로 난해성을 타고 났지요. 근데 보는 사람에 따라 그 기준이 다르다는 데 딜레마가 있어요. K형, 허나 내가 말하는 난해성은 독해력, 이해력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이건 나중에 더 설명할 기회가 있겠지만 간단하게 말하면 작자가 추구하는, 아니 의도했던 바가 시에서 일관성(미학적인 완결성) 있게 풀어져 있느냐 얽혀 있느냐를 말하는 것입니다.  K형, 그렇다고 서정시가 영원불변으로 시의 대표성을 가져야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문학에도 다양한 장르가 있듯이 시에도 다양한 사조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사조도 시의 본질을 무시하는 사조는 없습니다. 잘 알다시피 서정시란 현대시의 다른 이름이기도 합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난해시도 서정시에 포함됩니다. 문제는 시에서 언어라는 것의 의미, 그리고 시에서 사용하는 언어의 유형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K형, 내 깜냥으로 공부한 시의 의미를 적어 보내니 메모해두고 참고했으면 합니다. 내가 아는 수준에서 시의 의미는 언어의 기능처럼 세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가짓수에 너무 신경 쓰지는 말기 바랍니다.^^ 그 첫째는 기술적 의미이며, 둘째는 암시적 의미이고 셋째는 정서적 의미입니다. 부연설명을 하자면 우리가 쓰는 시의 의미 중, 기술적 의미란 시에서 어떤 정보라든가 사실을 전달하는 의미를 말합니다. 그리고 암시적 의미란 상징적이고 또는 환기적인 의미를 말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정서적 의미는 심리적으로 영향을 주는 언어를 말하는 거지요. 예를 들면 ‘어머니’라든가 ‘고향’이라든가 하는 시어 말이에요. K형, 그렇담  시인은 어떤 언어의 의미를 중시할까요? 당연히 암시적 의미나 정서적인 의미입니다. 특히 현대시에서 중요한 의미는 암시적 의미라 할 수 있습니다. 예전의 전통시에서는 아마도 정서적 의미가 주로 쓰였겠지요. 그러니까 시 쓰는 사람에게 의미를 도외시하라거나 배제하라는 말은 아주 위험한 말입니다. 내 생각으로는 기술적 의미, 기술적인 수사, 기술적인 발상을 조심하라는 말은 타당하다고 봅니다. 그러나 비서정을 추구한다고 해서 시에서 ‘의미’를 창작의 장애로 생각한다든지 무시해도 좋다든지 하는 건 언어도단입니다. 누가 그랬었지요? 가장 완벽한 시란 말하지 않는 거라고…, 맞습니다. 시가 추구하는 궁극적인 세계는 말을 하지 않음으로써 말을 하는 것이라 합니다.  그것은 마치 불가에서 말하는 不立文字와 상통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게 어디 가당키나 하는 말입니까? 결국 우리는 최소한의 언어로 표현할 수밖에 없고 언어를 효과적으로 쓰려면 진실이 아닌 진실, 즉 메타포를 통해서 의미를 전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시의 언어이고 언어의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넓게 생각하면 의미가 없는 것도 사실은 의도된 하나의 의미일 뿐입니다. 내 말 이해가 가나요? ^^

  K형, 오늘은 유난히 말이 길어졌습니다. 나는 근래 K형뿐만 아니라 여러 신인들의 고민도 많이 들었습니다. 어딜 가나 한번쯤 듣는 소리가 서정시의 한계입니다. 그러나 오해하지 말기 바랍니다. 현대 서정시와 구닥다리 전통시와는 분명히 다릅니다. 그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고 오래된 것은 무조건 진부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렇게 생각한다면 미술에서 자연주의나 인상주의가 음악에서 오페라나 클래식이 다 사라져야 한다는 이치와 마찬가지겠지요. 어쨌거나 인간이 존재하는 한 문학은 영원히 존재할 것이고 시 쓰는 사람 또한 끊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서정시의 한계를 탓하는 것도 기우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K형, 다시 한 번 말하거니와 문학도 음식과 같아서 사람마다 기호가 다르지만 편식은 금물입니다. 일단 내 앞에 주어진 음식부터 골고루 맛있게 먹고 제대로 소화시킨 연후에 다른 자리로 이동하기 바랍니다. 오늘도 역시 두서가 없긴 마찬가지네요. 좀 더 시간이 많으면 좋으련만 아, 늘 이놈의 시간이 웬숩니다. 남은 이야기는 또 다음 기회로 미루고 그만 여기서 접겠습니다. 시도 못 쓰는 주제에 자꾸 말만 늘어놓아서 민망합니다. 이 편지 받거든 신작시도 한 편 보내 주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