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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펌/좋은 시 모음

돌 속의 길이 환하다 / 신정민

by 拏俐♡나리 2011. 6. 13.

[2003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당선시]

 

돌 속의 길이 환하다 / 신정민

 

 

밤새 내린 눈을 모포처럼 둘러 쓴 길이

꽁꽁 얼어붙은 강을 건너고 있다

눈길 위로 걸어간 발자국

먼저 간 발자국 또 하나 걸어가고 있다

강둑에서 멈춘 발검음들

문득 발자국의 임자가 궁금하다

강 건너에 도착한 풍경들

마주보고 서 있다가

발이 시릴 때쯤 안다

멀리 있는 하늘이 제일 먼저

이 길을 건넜으리라

그 아래 몰골 드러낸 산이 건넜을 테고

그 다음엔 산등성이의 그림자가

이 길을 건넜을 것이다

털갈이하는 짐승처럼 서있는 나무들도

눈길 위에 발자국을 남겼으리라

건너온 길을 바라보며

제 발자국 헤아리지 않으며

얼어있는 강 밑으로 흐르는 물소리

묵묵히 듣고 있는 것이다

건너지 않고 서있는 나를

아무 말 없이 기다리는 풍경

강 건너 저쪽으로 걸어 들어간다

누군가의 발자국을 지우며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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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최종심에 오른 투고자는 6명이었다. '오리병아리'의 이태규, '형벌'의 유행두, '겨울 과메기'의 김기찬, '겨울 측면'의 탁명주, '가스통이 사는 동네'의 안여진, '돌 속의 길이 환하다'의 신정민이 바로 그들이다.

 

이 시들은 전체적으로 수준이 퍽 고른 편이었다. 특히 추상과 관념에서 벗어나 현실적 삶의 구체에 깊고 진솔하게 뿌리를 내린 시들이 많아 퍽 고무적이었으며 선정에 어려움을 겼었다.

 

그러나 '오리병아리'는 결말이 식상하다는 점에서, '겨울 과메기'는 평이한 묘사와 설명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에서, '겨울 측면'은 절박하거나 간절하지 않다는 점에서, '가스통이 사는 동네'는 체험의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먼저 제외되었다.

 

결국 유행두와 신정민의 작품이 남게 되었는데, 이 두 사람의 작품은 어느 작품이 당선되어도 당선작으로서 손색이 없다 싶었다. 그러나 유행두의 '형벌'은 '지구 끝에서 / 아내가 붕어빵을 굽고 있다'에서 느낄 수 있는 것처럼 감각적인 참신성이 돋보였으나 내용보다 형식에 치중한 나머지 읽고 나서 허전하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신정민은 고른 기법과 다양한 시야를 통해 축적된 시적 역량을 한꺼번에 보여주었다. '한 노인이 사물함 속으로 들어간다' 등의 구절에서는 상상력을 현실적으로 구체화시키는 개성적 힘이 있었다.

 

특히 당선작으로 결정한 '돌 속의 길이 환하다'는 시는 결국 은유로 이루어진다는 시의 기본을 가장 충실히 지키고 이해하고 있는 시로 여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