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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리의 수업/시 배움 자료

시를 어떻게 쓸 것인가 / 이형기(시인)

by 拏俐♡나리 2010. 3. 8.



시를 어떻게 쓸 것인가 / 이형기(시인)



1. 감수성을 기르는 방법

사물에 대한 인간의 감정반응은 다양하다. 그러니까 감정을 주된 표현대상으로 하고 있는 시는 얼마든지 다양한 내용을 가질 수 있는 것이 다. 시가 될 수 있는 감정과 그렇지 않은 감정이 처음부터 따로 구분되어 있는 것이 아님은 이 경우 당연한 사리의 귀결이 아닐 수 없다. 예를 들어 말하면 사랑의 감정만이 시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잘못이다. 사랑과의 대립적 성격을 갖는 미움이나 분노의 감정 역시 좋은 시를 이룰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종류를 가리지 않는 감정도 그것이 우러났다고 해서 그대로 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의도적인 표현행위를 통해서만 비로소 한 편의 시가 태어난다. 이때의 표현행위는 물론 누군가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자발적 의사에 따라 수행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를 쓰기 위해서는 우리의 자발적 의사, 즉 시를 쓰고자 하는 의욕을 촉발하는 계기가 우리의 마음 속에 먼저 생겨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일종의 심리적 충격이다. 바꾸어 말하면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이것은 한번 시로 표현해 보아야겠다는 생각을 갖게하는, 그러니까 자기로서는 결코 범상하게 흘려버릴 수 없는 인상적인 느낌인 것이다. 인간의 삶은 끊임없이 무수한 느낌을 쌓아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느낌을 바탕으로 해서 사고가 형성된다. 그러나 그 느낌의 결과가 모두 마음 속에 뚜렷한 인상으로 새겨진다고 할 수는 없고, 오히려 대부분은 순간적으로 사라져 버린다. 아니 사실은 뭔가를 느꼈다는 자각조차 갖지 못한 상태에서 대부분의 느낌들은 그냥 잋혀져 버리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느끼는 능력, 즉 감성이 그만큼 둔화되었음을 뜻하는 현상이다. 그리고 인간의 삶이라는 것은 매일같이 거의 비슷한 경험을 되풀이 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은 또 당연한 결과라 할 수 있다. 매일같이 만나는 똑같은 얼굴, 매일같이 거니는 똑같은 거리, 매일같이 받는 똑같은 메뉴의 밥상에 그때마다 인상적인 느낌을 받는다면 오히려 이상하다 할 일이 아닌가.

그러나 이러한 우리도 평소와는 다른 특별한 일이나 어떤 극적 사건을 경험하면 거기서 강한 충격을 받게 된다. 강한 충격이란 마음 속에 뚜렷한 자취를 남기는 느낌이다. 그리고 시를 쓰려는 사람에겐 앞에서 말한대로 그러한 느낌이 표현의 의욕을 불러 일으키는 계기가 될 수 있 다. 그러니까 시를 쓰려는 사람은 평소와는 다른 특별한 일이나 극적 사건을 자주 경험할수록 좋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외형으로 보아서 누구나 그것을 그렇게 말할 수 있는 특별한 일이나 극적 사건은 자주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1년에 한두번 겪을까 말까 한 그런 일을 기다려 시를 쓴다는 것은 시 쓰기를 사실상 포기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리고 남보기엔 유별난 경험도 그것이 반드시 그 당자에게 강한 충격을 준다는 보장이 또한 없다. 어떤 사람은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일에서도 다른 어떤 사람은 강한 충격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문제는 객관적 현상으로서 경험대상이 아니라 경험주체인 우리들 자신의 감수성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감수성이 잘 발달해서 그것이 남보다 예민하고 또 유연한 사람은 시를 쓸 수 있는 계기를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2. 동심적 발상법 보기

그렇다면 감수성을 어떻게 발달시키느냐는 문제가 먼저 선행적인 과제로서 우리 앞에 떠오르게 된다. 감수성은 타고나는 일면이 있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그것은 인위적으로 발달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냐는 말도 나올 수 있다. 그러나 후천적 노력이 완전히 배제되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시를 좋아하는 사람의 경우는 당사자의 노력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훌륭한 수준으로 향상될 수 있는 것이 감수성이다. 문제는 그러한 노력의 방법이 무엇이냐 하는 데 있다.

그 방법의 핵심이 되는 것은 어떤 사물, 어떤 현상도 그것을 자기가 이미 알고 있는 상식이나 고정관념의 잣대로 재단하지 말고 난생처음 보듯 바라보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러한 태도를 뒷받침 하는 것은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이라 할 수 있다. 어린아이는 웬만한 일이 모두 처음 보고 겪는 일이기 때문에 신선하고 신기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 신선하고 신기한 느낌. 그것은 그 대로 우리의 마음 속에 일어나는 시를 쓰는 계기가 될 수 있는 충격이 아닐 수 없다. 예부터 사람 들이 詩心(시심)은 童心(동심)이라고 일러오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할 수 있는 것이다.

오리 모가지는
호수를 감는다.
오리 모가지는
자꾸 간지러워.

이것은 정지용의 <호수 2>라는 시의 전문이다. 호수라기 보다는 좀 큰 연못에 오리가 떠 있는 정경을 이 시는 묘사하고 있다. 수면 위에 목만 내놓고 마치 미끄러지듯 헤엄쳐 가는 오리가 때때로 그 목을 홰홰 돌리곤 하는 것은 우리가 그동안 한두 번 아니게 보아온 일이다. 이 시 의 첫 연은 그러한 오리의 동작을 [호수를 감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둘째 연은 그 이유를 밝힌다. 오리가 목에 호수를 감는 것은 목이 자꾸만 간지럽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호수에 떠 있는 오리의 목돌림을 목이 간지러워 호수를 그 목에 감는 동작으로 인식한 그 발상법은 그야말로 동심에서 우러난 것이 아닐 수 없다. 사람에 따라서는 이 시를 좋게 볼 수도 있고 나쁘게 볼 수도 있겠지만 그러한 평가 여하를 막론하고 이 시가 동심으로 통하는 마음의 소산이란 사실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나의 귀는 소라껍질
바다 물결소리를 그리워한다.

쟝 콕토(J. Cocteau)의 널리 알려진 이 짧은 시 <귀>도 동심적 발상법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좋은 예의 하나가 된다. 그리고 보니 아닌게 아니라 소라껍질 같기도 한 귀의 모양을 그러나 정작 소라껍질이라고 서슴없이 표현한다는 것은 천진무구한 동심적 발상법이 아니고는 해낼 수 없는 일인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인식된 귀가 바다 물결소리를 그리워하는 것은 역시 그 동심적 발상법에 따르는 자연스런 연상이 아닐 수 없다. 일상적 삶에 젖어있는 삶들은 무심하게 보아 넘기기 일쑤인 호수의 오리와 자기 귀를 이와같이 한 편의 시로 탈바꿈 시킬수 있는 힘을 가진 것이 동심인 것이다.



3. 상상력과 낯설게 하기

그러나 이 동심이란 말을 너무 고지식하게 받아들이면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동요나 동시가 시의 이상형이 된다는 오해를 불러 일으킬 우려가 있다. 동요나 동시도 물론 훌륭한 시이기는 하지만 실제로 우리가 대하고 있는 시는 그 모두가 동요나 동시처럼 씌어만 있는 것도 아니고 또 그래서도 안되는 것이다. 동심적 차원의 사고로서는 쓸 수도 없고 이해도 할 수 없는 심오한 내용을 가진 시들, 그리고 또 그로 인해서 높이 평가되는 시들이 현실적으로는 오히려 훨씬 많은 수를 헤아린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行人)

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습니다.
나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갑니다.
나는 당신을 안으면, 깊으나 옅으나
급한 여울이나 건너갑니다.

만일 당신이 아니오시면, 나는 바람에 쐬고 눈비를 맞으며 밤에서 낮까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물만 건느면,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가십니다 그려. 그러나 당신이 언제든지 오실 줄만 알아요. 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 날마다 낡아갑니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위에 인용한 것은 만해 한용운의 시 <나룻배와 행인>의 전문이다. 그리고 이 시는 여러 분석자들로부터 불교의 보살정신이라는 동심적 차원의 사고로써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상적 내용을 갖는다는 말을 듣고 있다. 그말이 옳든 그르든간에 이 시는 앞에 인용한 정지용의 <호수 2>나 쟝 콕토의 <귀>와 비교할 때 그것들이 아주 두드러지게 동심(으 로 통하는 마음)을 드러내고 있는 것과는 달리 곰곰 새겨야만 이해할 수 있는 그 어떤 사상적 내용을 가지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동심과는 거리가 멀다고 할 수밖에 없는 이 시도 그러나 표현의 세부를 살펴보면 반드시 그렇게만 말하기 어려운 흥미있는 현상을 발견하게 된다.

그 좋은 예가 되는 것은 시 속의 화자가 자기를 [나룻배]로 비유하고 있는 대목이다. 실제로는 결코 나룻배일 수 없는 인간이 이처럼 나룻배로 변용된 것은 시인의 그 마음의 눈이 대상을 상식이나 고정관념의 틀로부터 해방시켜 새롭고 신선하게 바라본 결과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무슨 일이든 난생 처음 보듯 신선하고 신기하게 바라볼 수 있는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이 그런 눈을 갖게 한다는 것은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다. 그러한 마음을 바탕으로 해서 불교의 보살정신이라고 요약할 수 있는 사상과 철학을 시적으로 형상화한 것이 만해의 <나룻배와 행인>인 것이다.

내용이 이와는 다른 시, 이를테면 뜨거운 분노나 예리한 비판이나 또 인간의 고독과 고민을 표현하고 있는 시도 물론 많다. 그러나 그 어떤 시도 사물이나 대상을 그리고 그것들의 총체인 세계를 상식과 고정관념의 틀로부터 해방시켜 마치 어린아이가 그러하듯 새롭게 바라보고 있다는 점에서는 공통된다. 그래서 편의상 동심적 발상법이라 했지만 단순한 동심 그것만으로는 아무래도 역시 모자람이 많이 남는 시를 쓰는 그 마음을 폴 발레리(Paul Valery)는 [우주적 감각]이라고 말하고 있다. 우주적 감각이란 뭐 달이나 별을 바라볼 때와 같은 느낌이 아니라 현실적 이해(利害)를 초월한 의식으로 사물을 관조(觀照)할 때 얻게 되는 느낌을 발레리는 그렇게 말한 것이다. 그때는 사물이 우주적 질서를 구현한 것이라 할 수 있는 본질을 드러낸다는 생각이 [우주적 감각]이란 말의 배경을 이루고 있다.

이것은 물론 깊이 새겨 볼 만한 말이지만 그러나 이제부터 시를 써보려는 사람에게는 좀 어려운 느낌이 있다. 그래서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다른 말을 빌려오면 [낯설게 하기]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러시아 형식주의자라고 일컬어지는 일군의 문학이론가들이 시의 기능을 [사물의 낯설게 하기]라고 규정한 데서 따온 말이다. [사람]을 그냥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은 낯선 것이 아니라 낯익은 인식이다. 그러나 [사람]을 [나룻배]라 한다면 그것은 분명 낯선 인식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은 낯선 그만큼 새로운 인식이기도 한 것이다. 오리의 고개저음을 목이 간지러워 호수를 그 목에 감는 동작으로 본 정지용의 경우나 귀를 소라껍 질로 본 콕토의 경우는 모두 그렇게 낯설고 그렇게 새로운 인식의 좋은 예가 된다고 하겠다. 영국의 작가 체스터톤(G.K. Chesterton)은 거리의 가로수를 두고 [그것은 노상 누워만 있는 땅의 일부가 그 지루함을 견디다 못해 어느날 벌떡 일어선 모습]이라고 말한 일이 있다. 가로수에 대한 그야말로 낯설고 새로운 인식이다.

위에 든 몇가지 예를 통해 이미 짐작한 바 있겠지만 사물을 낯설게 만든 그 새로운 인식은 언제나 그 대상을 실제로는 그렇게 있지 않은 다른 무엇으로 변용시키고 있다. 그리하여 사람이 [나룻배], 귀는 [소라 껍질]이 된 것이다. 이러한 변용은 두말할 것도 없이 상상력의 소산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사물을 낯설고 새롭게 인식한다는 것은 상상력을 통해 그것을 바라본다는 뜻에 다름 아닌 것이다. <악의 꽃>의 시인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는 상상력을 [인간이 가진 여러 능력의 여왕 이며 세계 또한 그 힘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많은 해설을 붙여야만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말이지만 지금은 그럴 겨를이 없다. 그러나 보들레르의 참뜻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상상력이 무엇인가를 새로 만드는 창조의 원동력이라는 사실은 이미 널리 수용되고 있는 상식이다. 그리고 시는 예부터 값진 창조행위로 일컬어지고 있다. 그러므로 시를 쓰는데 있어 기본이 되는 마음의 바탕은 바로 그 상상력을 통해 사물과 세계를 바라보는 자세라고 규정될 수 있는 것이다. 상상력은 언제나 인간의 감정과 더불어 작용된다.

사랑의 감정에 젖어 있는 사람은 우연히 눈에 띤 꽃 한 송이를 사랑 하는 그 사람의 얼굴로 보게 되고 또 슬픔에 잠겨 있는 사람은 반대로 그 꽃을 슬픔의 표상으로 보게 되는 것이다. 어린아이들의 경우는 그 상상력이 거의 천방지축이라 할 만큼 자유자재로 날개를 펴고 있다. 그 리고 상상력을 위축시키는 것은 [우주적 감각]을 마비시키는 현실적 이해의식과 상식과 고정관념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동심]과 [우주적 감각]과 [낯설게 하기]와 그리고 시의 주된 표현대상인 [감정]이 모두 상상력으로 수렴되는 것들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그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은 사소한 일에서도 신선한 충격을 받곤 하기 때문에 시를 쓸 수 있는 계기 역시 남보다 많이 얻어낼 수 있는 것이다.



4. 상상력을 키우는 훈련

시를 쓰는 마음은 사물을 관조하고 그리하여 그것을 상상적으로 변용 시키게 된다는 것이 앞장에서 살펴 본 요지이다. 상상력은 사물을 상식 이란 이름의 인습의 거울에 비친 대로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거부하는 태도로 그러니까 여태까지와는 달리 새롭게 바라보게 하는 힘이다. 여태까지와는 다른 만큼 그렇게 새로워진 사물은 이미 낯설게 변용되어 있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인습의 겨울에 비친 대로 사물을 바라보는 것을 지각(知覺)의 자동화 (自動化)현상이라 한다. 이를테면 우리는 여기 있는 이 볼펜이나 저기 있는 저 소나무를 특별한 의식적 노력없이 대뜸 조건반사적으로 볼펜 또는 소나무라고 알아본다. 그것은 오랜 인습이 길러낸, 자동화된 지각 의 소산이다. 이러한 지각의 자동화 현상은 우리의 일상생활 구석구석에 참으로 넓고 깊게 퍼져 있다. 일상 생활을 지배하는 원리, 그것이 바로 지각의 자동화인 것이다. 그리고 그 때문에 인간의 삶은 편리하게 영위되어 나간다. 만일 우리가 이 볼펜이나 저 소나무를 자동적으로 그 렇게 지각하지 않고 도대체 이것이 무엇인가를 일일이 생각한 다음 그렇게 알아보게 된다면 어떤 사태가 벌어질 것인가? 그것은 단순히 불편 하다는 정도가 아니라 인간의 삶을 근본적으로 파괴해 버리는 엄청난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그런 뜻에서 지각의 자동화는 인간의 삶이 현재의 모양대로 존속될 수 있도록 지탱해주는 긍정적 원리라고 규정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긍정적 측면 때문에 우리가 모든 사물을 오직 자동화 된 지각의 그 인습적 시각으로만 바라보게 된다면 우리의 삶과 세계는 언제나 과거를 되풀이할 뿐 진보나 발전으로 통하는 새로움은 성취할 수 없게 된다. 인간의 삶은 자기를 에워싸고 있는 수많은 사물과의 교섭과정이다. 사물을 새롭게 바라본다는 것은 그 자체가 이미 그 사물과의 새로운 교섭, 즉 새로운 삶을 뜻한다. 새로운 삶이란 창조적 내포를 갖는 삶이다. 그리고 우리들 개개인의 삶이 새로운 창조성을 획득해 나간다면 인류 전체의 문화와 역사도 그에 비례하는 발전을 이룩하게 된다. 그러므로 시가 그 첫걸음에서부터 우리에게 요구하는 지각의 자동화를 거부하는 상상적 시각은 개인의 삶뿐만이 아니라 인류 전체의 문화와 역사를 창조하는 핵심요인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자동화된 지각의 안경을 벗고, 그러니까 상상력을 통해 사물을 바라보면 여태까지는 보이지 않던 그 사물의 새로운 모습이 드러나게 된다. 다시 이 볼펜을 예로 들면 자동화된 지각이 보여주고 있는 그 모습은 필기도구에 불가한 것이지만, 상상력이 거기에 작용할 경우에는 그것이 어떤 여자에 대한 나의 사랑의 구체적 표상이 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나는 이 볼펜으로 곧잘 그 여자에게 절절한 사랑의 편지를 쓰곤하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사랑의 표상으로 바뀐 볼펜은 여태까지의 일상적 관점에서는 전혀 밖으로 드러나지 않던 새로운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새로운 그만큼 낯선 모습이다. 그러므로 지각의 자동화를 거부하는 상상적 시각으로 사물을 바라본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본다는 말과 같은 뜻이 되는 것이다.

시인은 이글이글 타는 눈알을 굴리며 하늘위 땅밑을 굽어보고 쳐다보아 상상력이 알지 못하는 사물들의 모양을 드러내면, 시인의 붓은 그에 따라 공허한 것에 육체를 주고 장소와 이름을 정해 준다.

위에 인용한 것은 셰익스피어의 {한여름밤의 꿈}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모양을 드러내는] 상상력의 기능이 분명하게 밝혀져 있다. 알지 못하는 사물들이 모양을 드러낸다는 것은 물론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게 됨을 뜻하는 것이다. 지난 날 영국이 식민지 인도와도 바꾸지 않겠다고 했다는 대시인 셰익스피어에게 있어서도 이처럼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그 상상력은 시의 핵심요건으로 인식되고 있다.



5. 사물을 보는 시각의 차이 : 그 아홉 가지 유형

그러면 여기서 우리들 자신은 사물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반성적으로 점검해보자. 지금 우리 앞엔 나무 한 그루 서 있다고 가정한다. 그 나무 를 바라보는 시각은 물론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그 차이를 단계화해서 구분해 보면 다음과 같은 유형이 나올 수 있다.

나무를 그냥 나무로 본다.
나무의 종류와 모양을 본다..
나무가 어떻게 흔들리고 있는가를 본다..
나무의 잎사귀들이 움직이는 모양을 세밀하게 살펴본다..
나무 속에 승화되어 있는 생명력을 본다..
나무의 모양과 생명력의 상관관계를 본다..
나무의 생명력이 뜻하는 그 의미와 사상을 읽어본다..
나무를 통해 나무 그늘에 쉬고간 사람들을 본다..
나무를 매개로 하여 나무 저쪽에 있는 세계를 본다..

위에 든 아홉가지 유형 중에서 당신의 경우는 어느 단계에 속하고 있 는가? ①에서 ④까지는 나무의 외형적 관찰이지만, 일상적 상식적 차원에 있어서의 우리는 그나마도 ①과 ②정도의 눈으로 나무를 보고 있다. ③과 ④는 그보다 한걸음 앞선 태도이긴 하지만 역시 나무의 외형적 관 찰이며, 따라서 그다지 깊이있는 관찰이라 할 수가 없다. ⑤에서 ⑦까지 는 그렇지 않다. 그것은 나무의 외형이 아니라 그 내면을 바라보는 시각이다.

그리고 그 때문에 일상적 상식적 차원에서 보이지 않는 나무의 모습이 우리 앞에 드러난다. 나무의 생명력이라든지 또 그 생명력의 의미나 사상 같은 것은 보이지 않는 대상인 것이다. 한데도 이 단계에서는 그것들이 모두 나무의 모양으로 형상을 얻고 있다. 그리하여 생명력이나 사상으로 바뀌어진 나무의 그 변용은 물론 상상력의 소산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러한 나무는 그 의미의 측면에 있어서도 깊이있는 내용을 가질 수 있게 된다.

[나무 그늘에 쉬고간 사람들]을 보게 될 때의 나무는 지금의 그 자리에 있지 않고 이미 다른 자리에 서 있다. 그곳은 그렇게 쉬고간 사람들이 쉬는 그동안에 이런일 저런일을 생각해 본 인생의 갖가지 사연이 얽혀 있는 자리인 것이다. [나무를 매개로 하여 나무 저쪽에 있는 세계]를 보는 단계도 나무가 보다 발전적 자리로 옮긴 경우임이 분명하다. 연장선을 그어 확대시키면 인생 만사와 우주의 삼라만상을 모두 포괄할 수 있는 것이 [나무 저쪽에 있는 세계]인 것이다. 한 그루의 나무를 통해 이처럼 광대한 다른 세계를 볼 수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놀라운 기적이 아 닐 수 없다. 그 기적을 낳는 원동력이 상상력이다. 그리고 시인은 그 상상력을 누구보다도 많이 가진 사람이다.

시인이 아니라도 이 상상력은 사람들에게 인류 전체의 문화와 역사를 변혁시킬 만큼 엄청난 발견을 할 수 있게 해준다. 발견이란 여태까지는 보이지 않던 것을 본다는 뜻에 다름아닌 것이다.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만유인력을 발견한 아이작 뉴튼의 경우는 시인 아닌 사람의 상상력이 이룩한 두드러진 업적의 하나가 된다. 만류인력은 사과의 낙하라는 현상 저쪽에 보이지 않는 세계인 것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앞에 든  단계, 즉 나무를 그냥 나무로 보듯 무심코 지나쳐 버렸지만 뉴튼은 그러지 않았다. 그는 사과의 낙하현상을 낙하현상 그대로만 바라보지 않고 변용시켜 보았기 때문에 만유인력을 발견한 것이다. 그러한 변용을 가능케 한 원동력이 상상력이라는 사실은 구태여 두말할 나위가 없다. 다시 셰익스피어의 시구절을 빌면 만유인력과 또 그에 의해 지탱되고 있는 우주의 어떤 차원의 질서는 [상상력이 알지 못하는 사물들의 모양을 드러내] 우리 앞에 보여준 결과의 하나인 것이다. 그런 뜻에서 아이작 뉴튼은 직접 시를 쓰진 않았어도 풍부한 시적 능력을 소유한 인물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6. 상상력은 사물에 새로운 의미의 지평을 열어준다

나무같이 예쁜 시를/나는 다시 못보리.//대지의 단 젖줄에/주린 입을 꼭 댄 나무.//종일토록 하느님을 보며/무성한 팔을 들어비는 나무.//여 름이 되면 머리털 속에/지경새 보금자리를 이는 나무.//가슴에는 눈이 쌓이고/비와 정답게 사는 나무//시는 나같은 바보가 써도/나무는 하느님만이 만드시나니.

이것은 미국 시인 A. 킬머(Alfred J. Kilmer)의 널리 알려진 <나무>라는 시의 전문이다. 이왕 나무 이야기가 나왔으니, 실제로 나무가 시인에 의해 어떻게 변용되고 있는가를 알아보자는 뜻에서 이 시를 인용해 보았다. 미상불 시인의 상상력은 이 시에서 나무를 여러가지 새로운 모양으로 변용시켜 놓고 있다. 1연에서는 [시], 2연에서는 [대지의 젖줄에 입을 대고 빨고 있는 아이], 3연에서는 [팔을 들어 기도하고 있는 사람] 등으로 바뀌어져 있는 것이 이 시에 나타난 나무의 모습이다. 여기서 우리가 유념해야 할 것은 이러한 나무의 변용이 다만 현상을 바꾸어 놓는데 그치지 않고 역시 그 변용에 상응하는 어떤 의미를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편의상 우리는 그 의미를 [신의 섭리에 순응하는 삶의 아름다움]이라고 요약해 볼 수 있다. 편의상의 요약인 만큼 이것은 물론 이것만이 옳다고 고집할 수 없는 해석이다. 그러나 그래서 다른 해석을 취한다 하더라도 거기에 어떤 의미가 있다는 사실 자체는 부인하지 못한다. 의미를 뒷받침하는 것은 철학이다. 그러므로 시인의, 아니 인간의 상상력 속에는 의미와 철학으로 통하는 요소도 이미 내포되어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와같이 상상력은 단순히 사실 아닌 허구를 만들어내는 힘이 아니라 사물에 새로운 의미의 지평을 열어주는 능력이기도 한 것이다.

사물은 비록 하찮은 것이라도 그 자체로 고립되어 있는 것이 없다. 이를 테면 이 볼펜도 플라스틱과 종이와 문자 등 다른 사물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그리고 예시한 플라스틱과 종이와 문자 역시 수많은 다른 사물과의 관계 속에서 스스로의 존재를 유지하고 있 다. 그리하여 끝없이 확대되는 사물 상호 관계의 그물이 세계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상상력이 사물에 새로운 의미의 지평을 열어준다는 말은 필경 세계의 의미를 새롭게 창조한다는 뜻으로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상상력은 비록 동일한 대상이라 할지라도 그에 대한 작용의 결과가 사람마다 다르게 나타난다. 그것은 상상력이 우리들 각자의 개성과 밀착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현상이다. 그리고 상상력은 또 언제나 대상을 종합적, 직관적으로 파악한다. 예를 들면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당신은 나의 별]이라고 상상적으로 변용시킬 수 있는데, 이 때의 이 [당신]의 변용은 분석적 관찰의 결과가 아니라 종합적 직관의 결과인 것이다. 보다 쉽게 말하면 [당신]이란 대상을 한눈에 [별]로 바꾸어 놓는 것이 우리의 상상력인 것이다.

과학적인 눈으로만 본다면 사람인 [당신]이 [별]로 바뀌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이라 하겠다. 그러나 그 변용 속에는 과학과 이성이 도저히 그에 미칠 수 없는 인간의 마음이, 그것도 아주 진실된 마음이 투영되어 있는 것이다. 사랑하는 진실된 마음이 없고서야 어찌 상대를 [당신은 나의 별]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사물을 상상적으로 본다는 것은 마음의 눈으로 보는 것과 다름없는 일임을 우리는 여기서 다시금 확인 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상상력은 앞에서 말한 대로 개성을 표현하게 되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개성의 테두리 안에서만 우리를 가두어 놓는 것이 아니다. [당신]을 [별]로 바꾸어 놓은 것은 [이것]을 [저것]으로, 따라서 [다른 사람의 일]을 [내일]로 바꾸어 놓는 것과 같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개성은 다른 사람의 세계로 확산되어 공감을 불러오게 되는 것이다. 독특한 개성의 표현물이면서도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울리는 시의 그 오묘한 힘은 그러므로 상상력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시를 쓰려는 사람은 물론 이러한 상상력을 키우지 않으면 안된다. 훈련하면 키울 수 있는 것이 상상력이다. 앞에 든 나무를 바라보는 아홉 가지 시각은 상상력을 키우는 훈련의 한 모델이 될 수 있다. 나무 뿐 아니라 모든 사물을 외형적으로만 바라보지 말고 최소한에서 ~까지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훈련을 쌓으면 상상력을 키우는데 있어 큰 도움을 얻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