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정의 소설 사상
이재인
1.
김유정(1908~1937)은 1908년 1월 11일 아버지 김춘식(金春植)과 어머니 청송 심씨(靑松沈氏)의 2남 6녀 중 일곱째,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출생지는 셋째 누나 유경(裕庚)의 주장에 의하면 서울시 종로구 진골(운니동)이다. 그의 작품의 주무대인 강원도 춘성군 신동면 중리(실레) 427번지는 유정의 선대 고향인 것이다. 그는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고향에다 적을 올렸기 때문에 생가가 실레인 것으로 알려져 왔다. 실레마을의 수려하고 아름다운 자연환경이 그를 매료시켜 작품 곳곳에 이곳의 지명이 등장하게 되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유정은 부유한 집안에서 사랑과 귀여움을 독차지하면서 자랐다. 그러나 몸이 허약하여 명이 길라는 뜻에서 ‘멱설이’란 아명을 가지게 되었다. 휘문고보 때에는 ‘김나리(金羅伊)’라고 불린 적도 있었다. 1914년 6세에 어머니를 잃고, 이어 1916년 아버지마저 여의었다. 이때부터 형수와 누님들의 손에서 자라게 되었는데, 늘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모성애 결핍의 어린아이로 자라났다. 어려서 천자문과 논어 등을 집안 어른 밑에서 수학하였고 1920년 서울 재동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고 월반을 하여 졸업하였다. 1923년 휘문고보에 입학했고, 바이올린, 하모니카, 축구, 야구, 권투, 소설 읽기 등을 즐겼으며 이때 급우인 안회남, 임화와 교우를 맺었다. 1927년 연희전문 문과에 입학했으나 이듬해 중퇴하였다. 중퇴 이유는 자신이 더 배울 것이 없다는 것과 형 유근(裕近)의 방탕한 생활로 가정이 곤란했다는 것, 그리고 유정이 병(늑막염, 치질)을 앓게 된 데서 기인하는 것 등으로 보인다. 그의 나이 21세 때에는 연상의 기생 박녹주(朴綠珠)와의 사랑은 일방적인 짝사랑에 그치고, 그로부터 「두꺼비」라는 작품의 모델만 얻었을 뿐이다. 집안이 몰락해 갔지만 그의 내면 세계는 결코 허물어질 수 없었다. 1929년에 치질이 발병하고 그 다음해에 늑막염, 결국은 폐결핵의 신병까지 이끌고 형수와 조카가 사는 실레마을로 내려갔다. 신병을 치료하기 위해 닭과 뱀을 고아먹기도 했던 이 시기에 자연과 농촌과 농민에 대해서 새로운 의의를 발견한 것 같기도 하다. 방탕에 빠지기도 하고 광산 개발을 시도하며 허황된 꿈을 꾸기도 했다. 이 체험이 「금따는 콩밭」 「만무방」 「총각과 맹꽁이」 「아내」 등의 작품의 배경이 되었다. 1932년부터 당시 동아일보사를 필두로 하여 한창 유행하던 ‘브나로드’ 운동에 참가하였다. <능우회>를 조직하고 ‘금병의숙’을 세워 야학을 시작한 것이 바로 이 시기이다. 금병의숙을 김영수, 조명희와 함께 경영하면서 많은 민중을 한 끈으로 꿰는 민족적 사랑을 깨우쳤다. 단순한 계몽만이 아니라 사회구조 개선에 중점을 두었으며 민족사상 고취에 많은 정열을 쏟았다. 그러나 의숙의 화재와 부친의 유산이 완전히 바닥나면서 유정의 농촌운동은 막을 내리고 1933년 25세 때 서울로 돌아온다. 이것이 그의 문단 시대의 개막을 의미한다. 가난과 병고에 시달리면서도 후기 구인회에 가입하여 소설 창작을 인생의 과업으로 삼기로 작정한다. 그의 이런 참뜻이 수필 「길」에 나타나 있는데, 그 ‘길’은 소설 창작에 있어서 걸작의 완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구인회 문인들과 교우하는 동안 가난과 술과 문학적 낭만에 빠져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었다. 죽기 전에 ‘닭 30마리쯤 고아먹고 살모사 10여뭇 고아먹어 보겠다’던 소원도 풀지 못한 채 1937년 3월 29일, 다섯째 누이가 사는 경기도 광주군 산상곡리에서 29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1935년경 연안 이씨와 결혼한 일이 있다고 하지만 하룻만에 소박을 놓고 그로 인해서 고민했다고 했다. 성격은 소박하고 고집이 세고 우울한 성격이면서도 자유개방적이었다. 유정의 일생은 조실부모, 형님의 광란, 실연, 병마, 가난의 연속인 29세의 짧은 생애였다. 그러나 불운과 역경 속에서 빛나는 예술적 업적을 남겼다는 사실은 높이 평가할 만한 일이며, 이처럼 극단에서 극단으로 특징지워지는 유정의 생애와 예술과의 대조적인 양상은 유정 문학의 특질로 평가된다. 1 1933년에 「소낙비」와 「산골나그네」를 썼으며, 1934년에는 「만무방」을 완성했다. 1935년에는 「금따는 콩밭」, 「떡」, 「산골」, 「봄봄」 등을 발표하였다. 1936년에는 「옥토끼」 「동백꽃」 「정조」 「아앵」 「슬픈 이야기」 등을 발표하였고, 1937년에는 「따라지」 「땡볕」 「정분」 「생의 반려」 등을 발표하였다.
2.
1) 소낙비 이 작품은 193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소설이다. 원래 제목은 「따라지의 목숨」이었던 것을 조선일보사가 당선작을 발표할 때에 「소낙비」로 바꿔서 발표하였고, 그후 1968년 현대문학사에서 펴낸 『김유정 전집』을 출간하면서 「소나기」로 바뀌었다. 이 소설의 줄거리는 가뭄과 흉년 때문에 빚을 진 춘호가 젊은 아내와 고향을 도망쳐 산골마을에서 살다가 서울로 가기 위해 노름돈 2원을 아내에게 마련하라고 매질을 하자 아내가 매음을 하게 되는 이야기이다. 이 소설 첫부분의 배경 묘사,
음산한 검은 구름이 하늘에 뭉게뭉게 모여드는 것이 금시라도 비 한줄기 할 듯 하면서도 여전히 짓구즌 햇발은 겹겹 산속에 뭇친 외진 마을을 통채로 자실 듯이 닳구고 있었다. 잇다금 생각나는 듯 살매들린 바람은 논밧간의 나무들을 뒤흔들며 미쳐 날뛰었다. 뫼밖그로 농군들을 멀리 품아시로 내보낸 안말의 공기는 쓸쓸하였다. 다만 맷맷한 미루나무 숩에서 거츠러가는 농촌을 을프는 듯 매미는 애끗는 노래
에서 ‘음산한 검은 구름과 비’는 주인공에게 닥쳐올 어두운 운명의 전조이며, ‘마을을 통째로 자실 듯이 닳구고 있었다.’와 같이 숨막힐 듯한 더위는 이 마을 삶의 어려움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또 ‘살매들린 바람이 미쳐 날뛰는’ 것은 아내를 매춘 행위로까지 몰고 나가는 춘호의 횡포이며, ‘애끗은 매미의 노래’는 지랄 중에도 몹쓸 춘호의 사정을 제시해주는 것이다. 이 소설은 1930년대 유랑 농민의 서글픈 삶의 한 단면을 그린 것이다. 특히 이 소설은 가난으로 인한 매춘 행위에 대한 윤리적 죄책감이나 저항감을 느끼지 못하는데 이것은 가진 것이라고는 몸뚱이뿐인 춘호 부부가 정상적인 도덕율을 깨뜨리는 한이 있더라도 굶주림과 극심한 가난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거의 본능적인 안간힘을 보여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쇠돌 엄마도 처음에야 자기와 가티 천한 농부의 계집이련만 어쩌다 하늘이 도와 동리의 부자 양반 이주사와 은근히 배가 맞은 뒤로는 얼굴도 모양 내고 옷차림도 하고 밥걱정도 안하고야 금방석에 뒹구는 팔짜가 되었다.”라는 부분과 “그런 모욕과 수치는 난생 처음 당하는 봉변으로, 지랄 중에서도 몹쓸 지랄이었으나 성공은 성공이었다. 복을 받으려면 반드시 고생이 따르는 법이니 이까짓거야 골백번 당한데도 남편에게 매나 안맞고 의좋게 살 수만 있으며 그는 사양치 않을 것이다.”라는 부분에서 볼 수 있듯이 매춘을 통해서 편안한 생활을 하는 쇠돌 엄마를 부러워하고 또 자신의 매춘행위에 대한 죄의식보다 남편에게 매 안맞고 돈을 빌려다 줄 수 있는 것에 만족해하는 모습에서 우리는 당시 그들의 감정이 반윤리적이기 보다는 ‘윤리의식의 부재’ 또는 ‘윤리이전의 삶’의 한 국면임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자기의 아내를 실수없게 매춘을 하도록 물을 발라가며 곱게 머리모양을 내주고 새로삼은 짚신의 골을 부드럽게 내어주는 춘호 역시 윤리의식이 부재된 인물이다. 김유정은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인간다운 생존권을 상실한 유랑농민 춘호와 춘호처를 주축으로 한 극한적인 생존의 몸부림을 적나라하게 표현했다. 이것은 도덕과 윤리가 부재된 생을 사는 이들을 야유나 경고하는 것이 아니라 그늘의 삶을 극명하게 파헤쳐 이러한 현실을 만든 당시대 사회를 고발하려는 의도가 컸을 것이다.
2) 만무방 「만무방」은 1935년 7월 17일부터 31일까지 조선일보에 연재된 작품으로 1930년대 일제치하 농촌의 비참한 상황을 그린 것이다. 줄거리는 가난 때문에 고향을 떠나고 처와 헤어진 응철이가 전과자가 되고 만무방(예의도 염치도 없이 살아가는 무리나 함부로 되어먹은 사람을 일컫는 말)이 되어 모범 농민인 동생 응오의 마을로 오게 되는데, 아내의 병을 핑계로 타작하지 않는 응오의 논의 벼를 도둑맞자 응철이가 잠복하여 도둑을 잡고 보니 바로 동생인 응오였다는 이야기이다. 추수를 해도 경작자인 농민에게는 아무것도 돌아올 배당이 없으므로 제 논의 벼를 밤중에 훔쳐 먹을 수밖에 없는 아이러니한 사태를 작가는 말하고자 한 것이다. 벼를 베지 않는 응오의 태도는 지주와 장리를 준 김 참판에 대한 저항이고 나아가서는 시대의 사회적 모순에 대한 저항으로 볼 수 있으며, 그러한 부분에서 작가의 가난에 대한 고발정신을 엿볼 수 있다.
꼭두새벽부터 엣, 엣하며 괴로움을 모른다. 그러나 캄캄하도록 털고 나서 지주에게 도지를 제하고, 장리 쌀을 제하고 색조를 제하고 보니 남는 것은 등줄기를 흐르는 식은 땀땀이 있을 따름. 그것은 슬프다기보다 끝없이 부끄러웠다.
이 대목은 불합리한 토지제도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착취당하고 있는 소작인의 참상을 리얼하게 묘사한 것이다.
삼십여 년 전 술을 빚어 놓고 쇠를 울리고 흥에 걸리어 어깨춤을 덩실거리고 이러든 가을과는 거 딴 쪽이다. 가을이 오면 기쁨에 넘쳐야 될 시골이 점점 살기만 떠어옴은 웬일일고.
이 대목에서 작가는 30여 년 전 옛날 농민이 누리고 살았던 화평한 시대와 일제의 가혹한 정치, 또 한국인 지주와 일제의 수탈에 못견디는 시대를 비교하며 1930년대 농촌 사회의 모순을 드러내고 있다. 「만무방」은 김유정의 다른 작품보다 사회적 문제 제기가 훨씬 분명하다. 「소낙비」 「안해」 「가을」 「산골나그네」에서 나타난 ‘매음’과 같은 사건이 제기되어 작가의 의도가 보다 정확하게 전달되고 있다. 왜냐하면 ‘매음’ 그 자체만 떼어 놓고 볼 때 부정적인 시선(도덕적 타락과 같은 비난)이 주어지기 때문에 작가가 의도한 사회문제가 잘못 인식될 수 있기 때문이다. 김유정의 작품 도처에서 사회구조의 모순이 부각되고 그것에 대한 비판이 가해지고는 있지만 끝내는 설득의 영역에 들어가지 못하고 골계에 묻혀버리고 마는 경향이 있다. 「만무방」은 제것을 훔쳐야 하는 운명적 아이러니를 통해 사회모순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이례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
3.
1) 김유정의 농촌사회 의식의 배경 1930년대 우리 농촌의 현실이란 철저히 피폐되고, 무너져가는 과정의 드러남이었다. 이 시기 민족사적인 현실에서 한국 농민운동의 기본적인 내용은 소작운동이었으며, 김유정의 등장은 이런 시대적 배경에서 비롯된다. 김유정은 1931년 고향 춘천 실레로 낙향해서 20여 명의 아동들을 모아 동아일보사의 「브나로드」 팜플렛을 교재로 야학을 시작했다. 건물을 짓고 ‘금병의숙’이란 간판까지 내걸고 마을 청년들을 모아 농우회를 조직하고 농민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했으며 노인회와 부인회를 조직하고 마을 사람들의 민족사상 고취와 계몽에 정력을 경주하였다. 이러한 농민운동을 김유정이 전개한 것은 1931년에서 1932년 사이의 일로서 1929년 조선일보의 ‘아는 것이 힘 배워야 산다’, 그리고 1931년 동아일보의 ‘민중 속으로’의 운동과 연대가 일치하고 있다. 따라서 김유정의 농민운동은 그가 시대적 요청에 민감하게 앞장섰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그러나 김유정이 서울로 떠난 이후 힘에 겨워 이 운동을 포기하고 공회당만 주인 잃은 흉가처럼 남게 된 것은 일제 식민주의의 노골적인 수탈과 생활계층에 대한 대기계층의 농민운동은 대기계층이 생활계층으로 성장 지속되지 않는 한 도중에 중단될 수밖에 없다는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또한 김유정은 연희전문학교를 중퇴한 지식인이었고 실레마을에서는 지주 계층이었다는 점에서 농촌 지식인으로서의 농민운동의 실질적인 한계가 되었다. 그러나 이 농촌운동이 도중에 중단되었던 것은 그의 가정의 파산으로 농촌에서 전생애를 보낼 수 없었다는 점에 현실적인 문제가 제기되었다.
2) 김유정 작품에서의 농촌``사회 의식 김유정의 30편 미만의 소설 가운데 농촌배경의 작품들이 갖는 비중은 그 질적인 면에서 압도적이다. 이는 유정이 당시의 사회의식을 농촌을 배경으로 적나라하게 표현할 수 있었음과 그가 농민운동을 한 농촌 출신이라는 점에서 기인하는 것일 것이다. 그는 「동백꽃」에서는 애정을 타락시키고, 「봄봄」에서는 생명을 위축시키며, 「만무방」에서는 수탈의 상징으로, 「금따는 콩밭」에서는 일확천금의 꿈으로 뿌리없는 농민을 소외시킨다. 이와 같이 땅을 지키려는, 땅에 생명을 연관시키려는 본능적 의지의 현장을 목격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의 천착이 김유정 문학의 전면을 흐르는 농민과의 밀착이다. 김유정의 소설에서 농촌이나 농민은 테마를 표출하기 위한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즉 관념적인 농촌의 소재적 묘사가 아니라 생생한 농민의 현실을 다루고 있다. 배고픔의 세계를 다룬 유정의 소설, 특히 농촌을 다룬 소설에서 윤리의식이 거세되어 왔다. 1930년대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 인간의 욕구는 최하단에 머물러 인간의 특성인 윤리의식을 지니는 차원에마저 도달할 수 없었던 농민의 현실을 더 리얼하게 나타낼 수 없었던 것이다. 또한 김유정은 그의 소설에서 현실을 뛰어넘는 바람직한 농촌사회의 모습을 제시하지도 않는다. 농민의 자성은 보다 본질적이고 긴 생명력을 갖기 위해 시대상황을 뛰어넘는 곳에서 찾아지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란 주장도 있을 수 있겠다. 그러나 당시대를 파악하는 성실함이 없이, 시대를 초월한 보편적 진리의 획득이 가능할 수 없는 것이라면, 당시 농민의 참다운 자성, 그것이 본능적 차원에 머무를망정 아픔과 고통이 수반되어야 진실성을 갖는다. 그렇다면 현실의 빈궁함만이라도 철저히 느끼고 1930년대라는 당시대가 절망적 상황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그들로서는 현실인식의 기본이요 가장 정직한 표현이다. 유정의 유토피아는 과거라는 시간 속에 불구의 상태로 존재한다. 그것은 미래로의 시간의 진행이 막혀버린 성격소설로서의 특성과 당시대의 상황 때문에, 또 상실감으로 치환되어진 작가의식 때문이다.
<참고문헌> 김용성, 『한국현대문학사탐방』, 현암사(1984) 김유정, 『김유정 전집』, 현대문학사(1968) 김용직, 『현대한국작가연구』, 민음사(1976) 박정규, 『김유정 소설과 시간』, 깊은샘(1992) 신경림, 『농민문학론』, 온누리 신동욱, 『현대작가론』, 개문사(1988) 유인순, 『김유정 문학 연구』, 강원대학교 출판부(1988) 이어령, 『한국문학연구사전』, 우석사(1990)
<논문> 박헌도 『김유정 소설 연구』(1986) 유효경 『김유정 소설 연구』 (1986) 조춘용 『김유정론』 (198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