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정 소설에 나타난 사회적 엔트로피와 놀이성(Ludism) - <노다지> <만무방><봄․봄>을 중심으로 -
표 정 옥 서강대
국문요약
본고는 문학이 현실을 반영한다는 생각에서 더 나아가 현실을 새롭게 해석하려고 한다는 생각을 단초로 삼는다. 호이징아는 문화속에서의 놀이가 아니라 문화는 곧 놀이라고 정의한다. 이러한 생각이 문학을 연구하는 한 방법으로 착안된 것이다. 세상은 바라보는 코드에 따라 다르게 읽혀질 수 있다. 마찬가지로 새로운 방법론은 문학작품을 읽어 가는 묘미를 더해준다. 까요와는 문화를 크게 네 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아곤(경쟁), 알레아(운), 미미크리(모방), 일링크스(혼절)로 구분해서 문화적 현상들을 읽어 가고 있다. 이러한 네 가지 프레임으로 현재 일어나는 문화 제반 현상을 읽어 갈 수 있다. 월드컵 경기는 아곤에 속하며, 로또복권은 알레아에 속하며, 요즘 사극으로 채워지는 국내 영화는 과거를 모방하는 미미크리에 속하며, 번지점프는 혼돈과 혼절을 느끼게 하는 일링크스적인 속성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문학에서 작가들이 보여주는 것도 놀이라고 볼 수 있는가? 근본적으로 문학은 언어로 만들어진 놀이이다. 그러나 본고에서 말하려는 놀이는 거기에서 한층 더 나아간 놀이현상을 말한다. 1930년대는 일제의 문화 정책이 극에 달하던 시기였다. 거기에 대항해서 작가들은 나름대로의 문학적 경향을 개척했다. 김유정은 현실의 불행을 제도적인 세계 안에서 말하지 않고 인물들의 갈등과 경쟁을 통한 보여주기 기법을 사용한다. 따라서 인물들은 스토리 안에서 속고 속이는 과정을 되풀이한다. 그러한 인물들간의 상호 갈등과 경쟁의 놀이성은 엔트로피로 규정되는 시대적 상황을 극복하는 방법이 되고 있다.
주제어: 엔트로피, 놀이성, 놀이, 게임, 경쟁, 운, 모방 , 혼절, 가장 놀이
<목차>
1. 연구방향과 문제제기 2. 幸運을 좇는 不運한 놀이: <노다지> 3. 요행을 좇는 놀이-<만무방> 4. 역할에 대한 가장놀이: <봄․봄> 5. 결론
1. 연구방향과 문제제기
1930년대는 이전의 문학적 경향과는 다르게 다양한 시도가 있었던 시기였다. 작가들은 관심의 폭을 수평적, 수직적으로 넓혀갔고 그 결과 문학적으로 다양한 방법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다양화의 배경으로 일제의 극심한 문화정책을 들 수 있다. 지식인들은 생각을 직접적으로 드러낼 수 없었기 때문에 김유정은 해학과 웃음을 자신의 문학적 도구로 삼았고, 이상은 반어와 역설로 자신이 처한 상황을 글로 피력했다. 이렇게 닫힌 사회는 작가에게는 죽음에 이르게 하는 엔트로피의 상태를 의미한다. 엔트로피라는 용어를 문학비평의 용어로 가져온 오닐은 이 용어를 현실의 전통적인 질서체제를 파괴시키는 은유로 사용하고 있다. 시대의 불합리가 엔트로피 즉 무질서의 상태라면 놀이성(Ludism)은 그러한 상태를 벗어나고자 하는 과정이다. 그렇다면 놀이성이란 개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본고에서 사용하는 놀이성은 놀이(play), 게임(game), 도박(gambling)등을 포괄하는 광의의 개념이다. 문학이란 언어라는 도구를 사용하는 게임이며, 다양하게 읽힐 수 있다는 점에서 놀이라는 개념이 가능하다. 겜블링도 게임과 같은 맥락으로 사용되어 왔으며 문학이란 독자에게 작가가 거는 일종의 도박일 수도 있다. 김유정에게 사회란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작품에 나오는 모든 인물들은 사회에 항거하기보다는 사회의 부조리를 느끼지 못하면서 인물들끼리 갈등하는 양상을 지닌다. 이러한 과정도 어찌 보면 일본 제국주의에 대응해서 민족을 상상적 차원에서 회복시키는 과정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인물들끼리 갈등하는 원인을 모호하게 처리함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원인을 찾게 하는 것은 민족의식을 느끼게 하는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 사회적 놀이의 서사전략이 존재한다. 서술자는 사회현상에 대해서 직접 설법하고 있지 않지만 인물들의 행동양상과 갈등구조는 사회적인 담론을 이끄는 구조를 취한다. 이러한 과정이 사회적 놀이성이라고 칭할 수 있다. 김유정 문학에 대한 지금까지의 비평을 크게 類型化해 보면, 첫째, 현실 의식, 역사적 상황 인식이 드러나 있다는 견해를 들 수 있다. 즉 김현은 김유정 문학에서는 농촌의 궁핍화 현상과 上下意識이 나타난다고 주장하면서 그의 소설에는 소설적 트릭도 없이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내보인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김유정과 같은 구인회의 작가들에 대해서 朴喆熙는 식민지 시대의 조잡한 속물계급이 중심이 되어서 움직이는 한국 사회로부터 소외된 작가들이 동시대의 야비한 속물근성을 아이러닉한 눈으로 보고 풍자적 태도를 드러낸 것은 그것만으로도 논리적 타당성을 갖는다고 말하고 있다. 두번째, 앞의 견해와는 대조적으로 歷史的 社會意識이 결여되어 있다는 견해가 있다. 세번째, 앞의 두 견해에 비해서 김유정의 문학을 보다 세밀하게 읽으려는 경향이 나타난다. 諧謔과 土俗의 美學으로 김유정 문학을 살펴보려는 경향이 그러한 현상의 예라고 볼 수 있다. 조동일은 하층 주인공 및 그 주변 인물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김유정 작품의 일관된 특징이라고 주장한다. 흉측한 의도를 숨기고 있는 가해자를 풍자하고, 소견이 모자라는 피해자가 지닌 약점을 해학으로 나타내는 방식도 거듭 사용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네번째, 문학 작품의 내재적인 구성 성분에 대한 構造硏究는 최근 가장 많이 이용되고 있는 방법론이다. 본고의 주제인 놀이성과 해학에 직접 연관되는 연구를 자세히 살펴보면, 먼저 조건상의 논의를 들 수 있다. 조건상은 김유정과 채만식을 1930년대의 대표적인 골계소설로 인식하고 김유정을 정에 의한 골계로 분류하고 채만식을 증오에 의한 골계로 분류하고 있다. 김유정이 바라보는 인생에 대한 태도는 엄숙성의 거부로부터 발생한다. 김유정의 이런 태도는 신변에 얽힌 문제로부터 형성된 것이거나 일제 암흑기의 사회현상에서 느낀 절망에서 유래된 것이 김유정 작품에 굴절되고 희화되어 투영되고 있다. 홍기삼은 한국 서사문학에 나타난 바보인물을 민담, 판소리계 소설, 김유정의 소설 전반과 채만식의 소설 일부에서 찾고 있다. 김유정의 문학은 바보를 통해서 굶주림과 절망 속에 목 졸리는 하층민들의 참담한 삶을 리얼하게 그려낸다. , 본고는 선행의 작업들을 기초로 한발 더 나아가 김유정 문학을 놀이와 게임으로 읽어 가고자 한다. 즉 김유정의 작품은 사회와 깊은 연관을 가지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놀이와 게임을 통해 사회적 불합리성을 자연스럽게 독자에게 드러낸다. 김유정 작품에서 엔트로피의 사회적 놀이성이란 사회적 관계의 무질서에 초점을 두면서 사회적이고 도덕적인 규범을 깨려는 속성을 말한다. 사회적 놀이성이 존재하는 것은 개인의 의지라기보다는 상대방을 속이고 경쟁하게 하는 사회적 분위기에 기인한다. 호이징아는 『놀이하는 인간』에서 놀이란 지혜스러움과 바보스러움의 대립밖에 존재하고 선과 악의 대립밖에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김유정의 작중인물들은 사회에서 주류를 이루는 계층도 아니며 약간은 좀 우둔해 보인다. 그러나 그들의 행위는 독자로 하여금 가치판단을 유보시키고 동정적인 센티멘탈을 느끼게 한다. 그러면서도 까요와가 주장하는 놀이의 속성인 경쟁(아곤), 운(알레아), 모방(미미크리), 혼절(일링크스)의 속성을 보여주기 때문에 김유정의 인물들은 역동적으로 작품을 이끌어간다. 김유정의 대표 작품 <노다지> <만무방> <봄․봄>을 인물들의 경쟁과 갈등에 초점을 두고 놀이와 게임의 방법에 의해 다시 읽어가고자 한다. 이러한 읽기 과정을 통해 놀이성이 어떻게 시대의 엔트로피 상태를 풀어가고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2. 幸運을 좇는 不運한 놀이: <노다지>
일확천금에 대한 갈망은 시대를 초월해서 인간이 도박근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기록에 의하면 우리문화에서 노름은 18세기 이후에 성행했다고 전한다. 이이교는 『거가잡희』(居家雜戱)에서 도박(gambling)의 풍조에 대해서 자세히 서술하고 있다. 도박이 사회의 문제로 제기되는 것은 집문서나 땅문서가 투전판에 나오게 되면서부터이다. 투전이 유행하면서 놀이로서의 바둑과 장기는 인기를 잃어가고 투전이 노름화된다. 노름꾼은 일확천금을 노려 농사철이고 뭐고 가리지 않고 며칠 밤을 꼬박 새워가며 노름을 하는 일이 허다했다. 이러한 풍조가 상가에서 밤샘을 하는 풍습으로 변질되기 시작해서 언제부터인가 상가에는 으레 투전판이 벌어지곤 했다.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에 아내를 걸고 노름을 했거나 도박을 했다는 기록은 어우야담을 비롯한 많은 민담 문헌집에 전하고 있다. 또 손자와 할아버지가 장기를 두다 물려달라는 할아버지를 손자가 수염을 잡아챘다는 기록도 전해온다. 이러한 희극적인 모티프들은 김유정의 작품에 근간이 되는 모티프로 작용한다. 김유정 작품의 상당수가 노름과 도박의 모티프를 차용하고 있는데 이러한 현상은 개인의 성향이라기보다는 경쟁과 요행을 바랄 수밖에 없는 사회적 상황 때문이라는 것에 주목하기로 한다. 까요와는 놀이란 규칙이 있는 활동이며 명확한 시간과 공간을 가진 허구적 활동이라고 주장한다. 까요와의 개념 중 경쟁과 운(요행)은 작품 <노다지>와 <만무방>을 읽어 가는 중요한 개념이 된다. 경쟁이란 텍스트가 충돌하는 규범이나 가치에 중점을 둘 때 일어나는 놀이의 형태인 것이며, 운은 상대방을 이기기보다는 운명을 이기는 것을 말한다. 즉 경쟁이 개인적 의지의 놀이라면 운은 운명에 맡기는 놀이이다. 규칙을 가진 조직적인 게임들은 역할을 부여하고 참가자들에게 행동규칙을 규정함으로써 집단 내의 분화를 극소화시키는 이점이 있다. 조직적 게임들은 게임에 참가하는 이들에게 집단에 대해서 비록 짧은 동안일지라도 작가가 공헌할 수 있고 그들 스스로를 진정한 구성원으로 느끼게 하는 공동의 목표를 설정해준다. <노다지>는 시간과 공간이 철저히 정해진 게임의 양상을 띠고 있다. 호이징아나 까요와가 지적했듯이 정해진 놀이의 시․공간에서 등장인물들은 작가의 게임전략에 맞게 행운을 좇는 불행한 놀이를 하고 있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 꽁보와 더펄이는 금을 찾아 떠돌아다니는 금쟁이다. “늦가을 밤에 스산한 냉기를 몹시 몸서리치는” 꽁보의 시선으로 이 소설은 시작한다. 꽁보의 을씨년스러운 기분은 더펄이의 듬직함으로 위안을 받는다. 꽁보는 더펄이가 자기의 목숨을 구해준 대가로 그와 형우제공의 관계를 형성한다. 이러한 그들의 관계가 어떻게 무너지며 비참한 결말에 이르게 되는가를 시․공간적 배경에서 알 수 있다. 그러한 과정에서 놀이의 다양한 양상은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이 소설에서 보이는 시간은 주로 밤이다. 즉 “실제의 밤 --> 회상 속의 밤 --> 실제의 밤”으로의 전개를 보여 주며 공간 역시 “가을밤의 솔 숲--> 회상 속의 산골 --> 가을밤의 솔 숲”으로 나타난다. 여기에서 회상 속의 밤과 산골에서의 일은 이들 둘 사이의 운명을 연결시키기도 했지만, 결국은 이들 사이를 비극으로 이끈 발단이 되고 있다. 현실의 모든 도박과 게임이 주로 밤에 성행하듯이 이 소설에서 ‘잠채’와 ‘밤’의 연관성은 매우 필연적이며 공간 역시 인적이 없는 산골이나 솔숲이라는 것은 소설에서 벌이고자 하는 놀이와 필연적인 상관 관계를 가지고 있다. 꽁보와 더펄이 그리고 세 명의 동무들은 운(알레아)을 찾고자 일시적으로 모인 이익 집단인 것이다. 그들의 규칙은 “금 있으니 땄고 땄으니 논았지! ”하는 말에 나와 있는 그대로이다. 놀이에서는 엄격하고 절대적인 규약만이 놀이하는 자를 지배하며, 이 규약에 사전에 동의하는 것이 (놀이하는 것이) 약속에 따르는 활동에 참가하는 조건 자체인 것이다. 즉 누가 땄건 간에 분배는 공평하게 하자는 규칙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인간의 욕심’이라는 경쟁의 타락 요인이 들어가 갈등관계에 들어가게 된다. 꽁보와 더펄이 그리고 세명은 광석을 찾아서 따게 되고 꽁보는 그것을 수에 맞춰 분배한다. 그런데 세 명 중 한 명은 자신이 광석을 찾은 것에 대해서 아무런 혜택이 없는 것에 의이를 제기한다. 이런 갈등 상황 속에서 벌어진 싸움은 꽁보의 열세로 치닫고 있었는데 비호같이 날아든 더펄이에 의해 그는 구조된다. 그러나 자기를 살려준 은혜에도 불구하고 꽁보는 현실에 돌아와서는 더펄이에 대해 매우 우호적이지 못하다. 왜냐하면 사기꾼은 여전히 놀이의 세계 속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놀이의 규칙을 교묘하게 피하긴 해도, 적어도 겉으로는 규칙을 존중하는 체하며 그는 사람을 속이려고 한다. 이와 같이 꽁보는 부정직한 사람인데, 겉으로는 속마음과 다른 척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자신이 위반하고 있는 약속의 유효성을 겉으로는 지킨다고 공언한다. 즉 속임수가 발각되면 사람은 쫓아낼 수 있지만, 놀이의 세계는 상처받지 않은 채 그대로 있다. 꽁보는 더펄이를 형으로 부르고 즉 형우제공을 깍듯이 하면서도 더펄이를 속이려고 한다. 작가가 보여 주는 꽁보의 의식은 다소 부정적으로 보인다.
“현재 꽁보가 갖고 다니는 그 목숨은 즉 더펄이 손에서 받은 그때의 끄트머리이다”
이와 같은 꽁보의 말에서 “끄트머리”는 죽을 목숨을 간신히 구해준 것에 대한 꽁보 자신의 겸손의 표시라고 보여질 수 있지만 전체적인 맥락에서 볼 때 매우 불만족스런 관계라는 것을 의식적으로 보여 주고 있는 용어이다. 꽁보는 금점에 있어서는 이력이 있는 친구이므로 매우 자존심이 강한 인물이다. 따라서 “끄트머리” 는 자존심이 상하는 어휘에 해당한다. 이 서술은 작중인물의 직접 발화가 아니며, 또한 서술자가 말하는 간접 발화도 아니다. 자유간접화법의 예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말하는 사람이 작중 인물인 듯하지만 발화의 이면에 서술자의 어투가 삽입되는 것이다. 이로써 서술자 즉 작가의 가치 판단이 전달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일의 결정권에 있어서도 더펄이의 권한이 훨씬 강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날까지 같이 다녀야 그런 법 없더니만 왜 별안간 계집 생각이 날까”(P-15)
“이날까지”라는 시간은 상당히 오래된 것을 암시해 주면서 동시에 더펄이에게는 인간미가 없다는 꽁보의 평가가 묻어나는 말이다. 더펄이가 계집을 생각하며 장가들고 싶어하는 것에 대해 꽁보는 시집간 누이라도 빼돌려 주려는 궁리를 한다. 그러한 생각이 고마움에 대한 표시라고 여긴다면 누이를 형에게 줌으로써 “그 은혜에 대해서 손씻으려 한다” 라는 표현은 답례를 하고 싶다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전체적인 맥락 즉 꽁보가 더펄이를 배신하는 측면을 고려해 볼 때 누이를 주는 것이 결코 그를 생각하는 마음에서 온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관계를 정리하고 싶은 인간 관계에서 나온 말이라고 해석된다. 그러나 <손을 씻는다>는 것은 원전의 해석을 고려할 때 손을 끊거나 관계를 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는 계속해서 “더펄이의 끄트머리” 나 “은혜에 대하여 손씻어도” 라고 부정적인 분위기로 이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진정한 형우제공이라면 또 그 은혜를 고마워한다면 이 두 단어는 “더펄이의 형제”라거나 “은혜에 보답하려” 라는 긍정적인 분위기로 바뀌어야 할 것이다. 꽁보는 더펄이란 존재를 미더워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한 꽁보의 의도를 전혀 모른 채 더펄이는 마냥 생각만으로도 꿈에 젖는다. 여기서 더펄이는 꽁보의 내면을 전혀 알아채지 못하고 속임을 당하고 있다. 그러나, 어쨌든 이들의 지향점은 ‘집을 사고 계집을 얻고 술도 먹고 편히 살자’에서 잘 보여진다. 즉 금을 찾으면 똑같이 나눈다는 규약을 가지고 매번 뭉치는 것이다. 여기에서 그들의 놀이는 성립되고 있으며 동시에 이들 사이에 규칙의 아이러니가 보인다. 그들은 공정한 분배라는 규약을 파기하고 도망쳐 온 사람들인데 또다시 똑같이 분배한다는 규칙을 세워놨다는 것 자체가 처음부터 잘못된 관계임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규칙이 매번 허사였기 때문에 역으로 그들의 규칙은 유효하게 그들을 지탱시켜 주고 있는 것이다. 꽁보가 먼저 발견한 금에 대해서 더펄이는 자신의 힘을 앞세워 자신이 먼저 따려고 하다가 벼랑에서 떨어질 위기에 처한다. 더펄이는 꽁보에게 자기를 구해주라고 요청하지만 꽁보는 외면하게 된다. 금을 얻었을 때 동무 셋을 배반하고 도망쳐서 만들어진 관계이기 때문에 이번에는 더펄이 혼자서 자기를 배반하고 혼자 가질 거라고 단정해 버리는 피해망상증을 가지게 된다. 바위틈에서 구르는 돌에 맞아 위기에 처한 더펄이를 외면하고 급기야 그의 애원과 호통도 무시하게 된다. 결국 이들 사이의 놀이의 규칙은 무너지고 더펄이는 죽게된다.
3. 요행을 좇는 놀이-<만무방>
<만무방>에서 보이는 놀이는 사회적․공간적 상황과 매우 필연적인 연관성을 갖는다. 즉 작품의 공간과 시간이 ‘요행을 위한 속음과 속임의 게임 (알레아와 아곤)’을 자연스럽게 드러내고 있다. 주인공 응칠이와 응오의 속이기 게임이 그것인데, 중요한 것은 이들의 속임수가 생활 방식이나 본성에 기인한 것이라기보다는 어쩔 수 없는 時代的․社會的 상황에 기인한다는 것이다. ‘만무방’ 이란 응칠이의 운에 모든 것을 거는 삶의 방식(알레아적 삶)을 나타내는 말인데 작품에 명시되어 있다.
‘그는 꼭 해야만 할 일이 없었다. 싶으면 하고 말면 말고 그저 그뿐. 그러함에는 먹을 것이 더 러 있느냐면 있기는 커녕 부쳐먹을 농토조차 없는, 계집도 없고 자식도 없고 방은 있대야 남 의 곁방이요 잠은 새우잠이요.’ (p. 51)
하고 싶으면 하고 말고 싶으면 마는 ‘만무방’의 묘사가 작품 전체에서 볼 때, 한심하다거나 문제성이 있다고는 한번도 언급되지 않으며, 오히려 만무방이 될 수밖에 없는 필연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사회적 모순을 직접 말하지는 않지만 개인의 태만과 방종만이 만무방의 상태를 가져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한다. 이 작품에서 응칠이는 매우 용감한 사람이다. 만무방이 되기까지의 결단을 내릴 수 있는 자는 용감하며 남의 부러움까지 사고 있다. 농사 지어봐야 남은 것은 빚더미인 현실을 벗어나는 것은 매우 현명하고 용감한 선택으로 보여진다. 따라서 그는 마치 영웅담처럼 자신의 만무방 생활을 자랑하기도 한다. 자신의 처지를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탈출구 없는 현실에 얽매여 사는 사람보다 현명한 것이다. 주인공 응칠이는 ‘농사는 열심으로 하는 것 같은데 알고 보면 남은 것은 겨우 빗뿐’인 궁핍한 소작농으로 당대 현실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그러나 작가는 그러한 인물을 비극적으로 처리하지 않는다. ‘나의 소유는 이것밖에 없노라’ 라고 말하면서 ‘억울치 않토록 분배하여 가길 바란다’는 말을 남겨 논다. 인물들에게는 현실을 건강하게 해석하는 힘이 담겨 있다. 작중 인물들은 주어진 현실을 ‘이미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현재의 상황을 그들은 ‘바라볼’ 수 있는 거리에 있는 것이다. 즉 그들은 현실을 ‘바라볼 수’ 있는 여유 속에 있으며 그것을 객관화시켜 볼 수 있다. 그들은 칼을 들고뛰거나 항거하지 않는다. 만무방이 된 응칠이는 동생 논의 벼도둑으로 오인된다. 그러한 오해를 풀기 위한 응칠이의 범인 추적 게임은 이 소설을 이끌어 가는 추진력이 된다. 응칠이는 ‘매팔자’처럼 걸릴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다. 논맬 걱정도, 호포 바칠 걱정도, 빚 갚을 걱정, 아내 걱정, 굶는 걱정도 없는 상팔자인 만무방인 것이다. 이러한 삶은 전적으로 운에 달려있다. 오직 우연히 생기는 요행에 의해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그의 전적에는 도박, 절도 3번의 훈장을 단 전과 사범의 불명예가 따라다니기 때문에 늘 사람들로부터 의심을 받는다. 그러나 그와는 반대로 동생 응오는 ‘진실한 농군이었고, 모범 청년이었다.’ 그의 형이 모든 책임을 회피하고 만무방이 된 인물이라면 그는 그러한 현실을 꾹 참고서 슬퍼하는 소극적인 인물이다. 따라서 응오는 작가가 설정해 놓은 범인의 가능성이 없는 것이다. 응칠이의 범죄 가능성은 그의 경력뿐만 아니라 응오네 ‘지주의 뺨을 갈긴’ 것에도 있다. 또한 그렇게 일찍 논둑을 거닐고 있는 것도 혐의를 짙게 하는 요소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응칠이가 누명을 벗으려고 애를 쓰는 것으로 보아 그는 무죄인 것 같이 보여진다. 따라서 응칠이는 다른 사람들을 의심하게 되는데, 그가 추측하는 범인들과의 대화 속에는 심리적 갈등인 경쟁의 놀이가 보인다. 먼저 차례로 따라가 보면, 첫째, 성팔이를 의심하는 데 있어서 응칠이의 대사나 지문을 살펴보자.
「응고개를 어째 갔더냐 말이지.」<응칠> 「놀러 갔다 오는 길인데 우연히...」<성팔> 「놀러 갔다, 거기가 노는 덴가?」<응칠> 「글쎄, 그렇게까지 물을 게 뭔가. 난 응고개 아니라 서울은 못 갈 사람인가.」 하다가 성팔이는 속이 타는지 코로 후응하고 날숨을 크게 뽑는다.
성팔이는 응칠이의 의심에 맞대응하면서 당당함을 잃지 않으나 응칠이가 응오의 논에 벼가 없어진 것을 숨기자고 제안하자 마치 공범인 것 같은 냄새를 피우는 묘한 행동을 취한다. 그는 응칠이의 말에 동의하고서는 자주 뒤를 돌아보는 것이다. 따라서 이 둘 사이의 범인 가능성은 응칠이에게서 성팔이로 옮겨간다. 그러나 성팔이에게서 뚜렷한 물증을 잡지 못하자 그의 추측은 투기판에 낀 재성이를 의심하게 된다. 그는 역시 또 다른 알리바이를 생각해낸다.
‘사실 전만 해도 응칠이더러 먹을 양식이 없으니 돈 좀 취하라던 놈이’ (p.69)
따라서 응칠이는 재성이가 도둑일 거라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아무런 물증이 없기 때문에 또 다른 알리바이 찾기에 열중한다. 따라서 한밤중에 응오네 논을 향한다. 이때에도 게임이 벌어지고 드러나는 시․공간은 <노다지>의 시간과 일치한다. 그의 게임의 시간은 밤과 새벽 사이에 벌어진다.
‘닭들이 세 홰를 운다...... 빗방울이 뚝, 뚝, 떨어진다.’(p. 73)
그때 나타나는 허깨비는 분명 응칠이에게서 범인이라는 혐의를 벗겨줄 범죄자이다. 응칠이는 성팔이이거나 재성이라고 확신하고 지켜본다. 그리고 달려가서 고함을 지르고, 범인을 붙잡는다.
‘응칠이는 덤벼들어 우선 허리께를 내려조졌다. 어이쿠쿠, 쿠 하고 처참한 비명이다. 이 소리 에 귀가 번쩍 띄어서 그 고개를 들고 팔부터 벗겨 보았다. 그러니 너무나 어이가 없었음인지 시선을 치걷으며 그 자리에 우두망찰한다. 그것은 무서운 침묵이었다. 살뚱맞은 바람만 공중 에서 북새를 논다. 한참을 신음하다 도적은 일어나더니, 「성님까지 이렇게 못 살게 굴기유?」 제법 눈을 부라리며 몸을 홱 돌린다. 그리고 느끼며 울음이 복받친다. 봇짐도 내버린채, 「내 것 내가 먹는데 누가 뭐래?」하고 데퉁스러이 내뱉고는 비틀비틀 논 저쪽으로 없어진다. 형은 너무 꿈 속 같아서 멍하니 섰을 뿐이다.‘
그러나 범인은 너무도 뜻밖의 인물인 응오인 것이다. 그의 범인 추적의 알리바이는 실패한 것이다. 그 자신의 삶의 방식에 걸림돌이 되었던 도둑이라는 누명을 벗기 위하여 성팔, 재성 등의 인물을 계속 추적해왔으나 실재로 자기를 궁지로 몰아온 이가 아우라는 것을 알게 된다. 즉 응칠이는 동생 응오에게 작품의 처음부터 끝까지 속아온 것이다. 그러나 형을 속인 아우에 대해 그 형의 마음은 매우 양립적이다. 아우를 책하여야 할 것인가 아니해야 할 것인가, 정직하게 살아야 할 것인가 아니해야 할 것인가, 응칠이의 마음은 양립적이다. 즉 이것은 응칠이를 속인 응오가 일부러 그렇게 의도적으로 속인 것이 아니라 아파서 누워 있는 아내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벌인 속이기의 게임인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약간의 서글픈 해학을 느끼게 된다. 뜻하지 않는 결말 부분은 김유정의 작품 대부분에 있어서 하나의 구조적 특징을 이루고 있다. 독자는 그러한 결말에서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된다. 즉 비극이 될 소재를 유정은 희극으로 연출하는 기술을 지닌 것이다. 그것을 보는 독자는 주인공의 우매한 행동에 웃을 수밖에 없지만, 사실은 그의 처지를 동정하고 슬퍼해야 한다. 응오와 응칠이는 삶의 양식은 다르지만 가난과 부채로 삶의 기반이 피폐해졌다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즉 행운의 기회를 투전이나 속임을 통한 타락한 생각을 하게 된다. 이는 사회질서가 와해되고 타락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즉 다시 말하면 근면한 소작농이 왜 만무방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는가를 보여주는 것으로 작품의 의의는 한정되지 않고 만무방이 농민문제의 진정한 해결책이 아니라는 점을 시사해주고 있다. 여기에서 인물들의 속이기 게임은 아이러니를 수행하는 사람에게 아이러니를 표현하게 한 표현적 아이러니(Verbal Irony)가 아니라 아이러니를 수행한 사람은 없지만 피해자는 있는 아이러니인 상황적 아이러니(Situational Irony)인 것이다. 이러한 아이러니는 당시의 정치적, 경제적 상황과 연관이 된다. 그러나 그러한 아이러니는 당시 사회의 불합리성에 항거하려고 하는 차원이 아니다. 인간이 절박한 상황에 처해 있을 때 벌일 수밖에 없는 삶의 한 형태로 보여지는 것이다. 따라서 <만무방>에서 요행을 위한 속음과 속임의 게임은 <노다지>에서 자기의 이익을 위해 속이는 경쟁의 술책이 아니라, 아무런 해결의 문이 보이지 않은 인물들의 필연적인 삶의 과정이라고 보여진다. 응칠이는 자신이 속았음을 뒤늦게 알게 된 자가당착 유형이다. 즉 늘 지적 우위에 서서 타인을 조정한다고 믿고 있으나, 종국에 가서는 제 꾀에 제가 넘어가서 속임을 당하게 된다.
4. 역할에 대한 가장놀이: <봄․봄>
<봄․봄>에서 시간과 공간의 변화는 다소 순환하는 양상을 보인다. 이 작품 역시 <동백꽃> <솥>처럼 열린 게임의 양상을 보여준다. 처음에 나타나는 장인에 대한 갈등이 조금도 진척되지 않고 결말 부분에서 그대로 보여지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장인과 나는 실상은 아무관계도 아닌 것이다. 즉 장인역할과 사위역할을 하는 가장놀이인 것이다. 가장놀이의 규칙은 점순이의 현실 개입으로 깨지기 시작하며 놀이의 관계에서 갈등의 관계로 발전되어간다. 가장놀이의 대부분은 반복적이다. 나는 장인역할을 상기시키면서 사위역할을 계속 지켜나가고자 하지만 장인은 명목뿐인 장인역할을 추구하고 실질적인 역할을 도외시한다. 이 작품은 두 인물들 간의 갈등인 경쟁의 놀이가 진행된다. 점순은 그러한 갈등을 표출시키는 원조자로 등장한다. 결국 장인의 입에서조차 ‘할아버지’ 소리가 나오게 하는 지경에 이르게 한다. 다시 말해 장인을 실신상태에 이르게 하는 혼절의 놀이를 보여 주고 있다. 즉 경쟁의 갈등 상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혼절의 놀이를 이용하고 있다. 그러나 결국에 가서는 자신을 비방하는 점순에게서 또다시 속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자기편이 되어줄 거라고 여겼던 점순에 대한 신뢰가 무너져버린다. ‘나’는 작가의 감정이 투사된 인물로서 거침없이 육담이나 속어 및 사투리를 구사한다. 이를 언어의 위상적 계층으로 보면 분명히 하층 계급들의 생활 현장의 구어적인 언어다. 교양인의 사교적이고 의례적인 어법의 언어도 아니고, 그렇다고 중립적인 지시성의 어법도 아니다. 골계적 부정과 서민적인 쾌감이 후텁지근한 땀냄새처럼 배어 있는 悲美的인 언어다. 전통에 대한 깊은 자각에서 연유되었다기보다는 촌놈의 어법이다. 구어적인 언어이기 때문에 지문이고 대화고 분간할 것 없이 욕설과 야비한 낱말이 거침없이 노출되면서도 어떤 수치심의 가면은 적나라하게 벗겨져 있다.
① 그럼 말이다, 장인님이 제가 다 알아차려서, ② 「제-미 키두」하고 논둑에다 침을 퉤, 뱉는다. ③ 개돼지는 푹푹 크는데 왜 이리도 사람은 안크는지 ④ 이 자식아, 일하다 말면 누굴 망해놀 속셈이냐, 이 대가릴 까놀자식」 ⑤ 점순이는 뭐 그리 썩 예쁜 계집애는 못된다. 그렇다고 개떡이냐 하면... ⑥ 「빙모님은 참새만한 것이 그럼 어떻게 앨 낳지유?」 ⑦ 이런 상년의 자식! 하곤 싶으나 남의 앞이라서 차마 못하고 섰는 그 꼴이 보기에 퍽 쟁그라 왔다.
①-⑦에 보이는 언어는 구어적인 속어 감각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 장인을 ‘제가’라고 표현한다거나 사람을 개, 돼지, 참새에 비유하는 것은 매우 희극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성장을 돼지의 성장으로 점순 엄마의 키를 참새로 나타내서 문장의 의미를 희화시키고 있다. 또한 점순이를 ‘개떡’에다 비유하는 것과 ‘감참외’에 비유하는 걸로 미루어 볼 때 매우 서민적인 작가의 의식 체계를 살펴볼 수 있다. 그렇다면 경쟁의 놀이 장면을 따라가면서, 작품의 갈등을 살펴보자. 작품 속의 ‘나’는 미련하고 우매하고 평범한 바보인 것이다. 그의 목표는 점순과의 결혼이다. 그러나 결혼을 방해하는 반동인물로 장인이 등장한다. 그러나, 그는 이 사실을 알고 있다. 즉 점순이와 ‘성례’를 하지 못하는 것은 장인의 속임수 때문이라는 것을 안다.
a) 이래서 나는 애초 계약이 잘못된 걸 알았다. 이태면 이태, 삼 년이면 삼 년, 기한을 딱 정 것이다. 덮어 놓고 딸이 자라는 대로 성례를 시켜 주마, 했으니 누가 늘 지키고 섰는 것도 아니고 그 키가 언제 자라는지 알 수 있는가.
b)「점순이의 키 좀 크게 해줍소서, 그러면 담엔 떡 갖다 놓고 고사드립죠니까.」하고 치성도 한두 번 드린 것이 아니다. 어떻게 돼 먹은 킨지 이래도 막무가내니.....래 내 어저께 싸운 것이지 결코 장인님이 밉다든가 해서가 아니다. (p 77)
a)에서 분명히 자신이 속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한 속임수를 인식하고서도 나는 b)에서처럼 서낭당에 점순이의 키가 자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a), b)는 분명히 내용 전개상 아니러니에 해당한다. 그러나 b)에서 “장인이 밉다든가 해서가 아니다”로 장인을 이해하려고 하는 착한 바보이다. 그는 자신이 진정으로 속았다고 느끼지 못하는 “소박한 바보”인 것이다. 즉 그는 생각, 행동, 말에 있어서 다른 인물들과 다르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언행이나 사고가 웃음거리가 된다고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바보스러움을 이용해 장인은 계속해서 그를 속여 장인역할을 가장하고, ‘나’는 사위역할을 하면서 속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장인의 속임수를 바라보는 작가의 시각은 대상을 공격하는 풍자를 넘어 대상을 포옹하는 해학으로 따뜻하기조차 하다. 이 점은 놀부를 바라보는 광대의 시선과 흡사하다. 내가 저항하면 멱살을 움켜잡고 싸우다가도 장인은 또다시 혼례를 담보로 달랜다. 나에게 혼례시켜 주겠다는 약속은 ‘나’를 속일 수 있는 즉효약 인 것이다. 이때, ‘나’와 장인은 처음부터 서로 다른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잠정적인 화해를 유지한다. 그러나, 장인은 ‘나’보다 우위에 서서 계속 속이려고 하는 계약 파기자인 것이다. 내가 보는 점순이는 늘 감참외 같은 것이다. ‘나’는 장인과의 약속을 지키고자 하지만 점순이의 키는 나를 화나게 한다.
그러나 내 속은 정말 아냐 때문이 아니라 점심을 이고 온 점순이의 키를 보고 울화가 났 던 것이다.
그러나 감참외 같은 점순이가 어느 순간 성숙한 말을 하게 된다. 즉 점순이가 나에게 적대자인 장인과의 갈등 상태를 해결하도록 도와주는 원조자의 역할을 하게 된다. ‘나’는 점순의 말로 일종의 가능성을 느끼며 자신의 욕망 추구를 위해 비약적으로 발전된 행동을 할 수 있게 된다. 점순과 나의 욕망이 일치하는 대목을 살펴보자.
「밤낮 일만 하다 말 텐가!」하고 혼자 쫑알거린다. 고대 잘 내외하다가 이게 무슨소린가 하고 난 정신이 얼떨떨했다. 그러면서도 한편 무슨 좋은 수가 있는가 싶어서 나도 공중을 대고 혼 잣말로, 「그럼 어떻게?」하니까, 「성례시켜 달라지 뭘 어떻게.」하고 되알지게 쏘아부치고 얼굴이 발개져서 산으로 그저 도망질 을 친다. 나는 잠시 동안 어떻게 되는 셈판인지 맥을 몰라서 그 뒷모양만 덤덤히 바라보았다. 봄이 되면 온갖 초목이 물이 오르고 싹이 트고 한다. 사람도 아마 그런가보다하고 며칠 내에 부쩍(속으 로) 자란 듯싶은 점순이가 여간 반가운 것이 아니다.
‘나’는 빙장님과 함께 구장댁에 가서 해결책을 듣고자 하지만 남의 농사를 망치면 징역 간다는 말에 아무 해결도 없이 다시 돌아오게 된다. 그리고 뭉태에게서 장인 집의 데릴사위의 내력을 들으면서도 그는 뭉태의 말을 전부 다 곧이 듣지는 않는다. 장인에 의해 속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계속해서 모든 해결책이 점순이의 자라지 않는 키 때문이라고 믿고 있다. 그는 아무런 성과 없이 구장님을 만나고 온 것에 대해 점순의 핀잔을 듣게 된다. 나는 다른 사람에게 바보 취급 당하는 것에 대해서는 관용을 베풀 수 있지만 자신의 아내가 될 점순에게서 병신 취급 당하는 것에 대해서는 참을 수 없다. 점순의 대화를 통해 장인이 혼자 나쁘다고 판단하게 된 나는 점순이를 나와 함께 장인에게 맞설 수 있는 원조자로 여기게 된다. 따라서 점순이도 미워하는 장인님을 때려도 좋다고 자의적으로 생각하고서 그대로 행동에 옮긴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원조자라고 여기던 점순은 적대자가 되어버린다. 그가 생각하는 갈등의 해결 방식은 장인을 실신 상태로 몰아가는 극적인 상황이다. 여기에서 경쟁의 놀이가 혼절의 놀이로 해결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따라서 갑자기 변한 점순의 태도에 놀란 ‘나’ 역시 장인과 마찬가지인 혼절의 상태에 놓이게 된다. ‘나’는 다시 ‘장인’에게 착취를 당하는 처음의 상태로 돌아가 ‘구태여 피하려하지도 않고’ 매를 맞는다. 장인은 모든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 줄 모두 알고 있으면서 속임수를 쓰는 트릭스터(속이는자)이고 이 장인에 의해 조작된 현실을 실제의 상황으로 생각하는 나는 듀프(속는자)가 된다. 나와 점순이에게 있어서도 나는 듀프에 해당한다. 점순이는 자기의 키가 더 자라서 결혼한다는 것이 이미 속임수라는 것을 알고 나에게 채근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점순이의 키가 자라기만 기다리는 듀프인 것이다. 따라서 점순이는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나의 기대를 깼다는 점에서 트릭스터와 같은 역할을 하고 나는 듀프가 되는 것이다. 장인과 점순이에게 이중으로 듀프가 되는 것은 장인이 거짓된 장인역할을 하고 점순이의 분명하지 못한 연인역할 때문이다. 이 소설은 처음의 갈등 상태가 다시 시작되는 ‘열린 게임’의 양상이 보이고 있다. 처음 도입부에 나타난 나의 조건부 머슴살이는 장인의 속임수에 의하여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하고 결론에 이르게 된다. 아직 키가 덜 자란 점순의 미성숙을 문제 해결의 핵심이라고 생각했는데 점순의 생각은 의외로 성숙한 것이었다. 나는 점순의 성숙을 반기며 장인에게 마음대로 맞서보지만 결국 점순의 성장은 나의 기대치와는 거리가 있었다. 자신의 편을 들어줄 거라고 생각하고 장인에게 덤비지만 점순은 위기에 빠진 아비의 편을 들어주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나는 바보의 우둔함과 순수함으로 인간의 가치를 지켜주면서 우리로 하여금 건강한 웃음을 가지게 하는 세이프티 벨브의 역할을 한다.
5. 결론
<노다지>에서는 경쟁적 관계가 작품을 추진시키는 힘으로 작용하고, <만무방>에서는 범인 추적의 과정이 작품을 이끌어가며, <봄봄>은 역할을 가장한 놀이가 작품의 주 근간을 이룬다. 김유정을 전원소설 혹은 향토소설로 한정해 버린다면 작품 안에 담고 있는 놀이적 요소는 사장되어 버릴 수밖에 없다. 김유정 작품의 놀이성은 작품 안의 인물들간의 경쟁과 갈등을 통해서 정치한 서사분석이 가능하다. 따라서 놀이성이 엔트로피 상태를 벗어나는 방법으로만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놀이적 양상이 서사의 인물 분석에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인물의 갈등제시를 볼 때 김유정은 “보여주기”기법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현실을 보다 객관적으로 보여주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일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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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 Yu Jung's Social Entropy and Ludism - Focusing on Nodaji, Manmubang, BomBom -
Pyo, Jung-ok
The purpose of this thesis is to reread modern novels as ludic dimension. We can read our culture through ludism. The play of literature is a lingual playing in the written text. In this thesis, through looking over ludic aspects of modern novel, we can see how writers understand colonial periods. We can read the closed situation of the 1930s as entropy, the state of disorder. Entropy is based on the thermodynamics. It is the concept of using an unusable energy within the closed circuit. According to Patrick O'neill, this term is the metaphor of destroying the order and the tradition. Kim's ludism is seen in the conflicts and competitions of characters within the story. Many of Kim's works have a gambling motif, which reflected social situations of those times. and have much to do with social backgrounds. Agon and Alea is revealed in the process of characters' activities. is a make-believe game of a false father-in-law and a false son-in-law.
Key word: Entropy, Ludism, Play, Game, Agon, Alea, Mimicry, ilink, Make-believe pl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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