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혹한 맑음
1.유마적 시인 : 세상이 아프기에 나도 아픈..
영국에서 태어나, 그 분리 수술 여부를 놓고 세계적인 이목을 집중시켰던 샴 쌍둥이 메리와 조디가 기어이 분리 수술을 성공적으로 받았다는 뉴스를 보았다. 그때 나는 문득 정호승 시인이 이번에 출간하는 시선집의 자서에 쓰인 마지막 행을 뇌리 속에 떠올렸다.
"잘 가라
고통이 인간적인 것이라면
시도 인간적인 것이겠지"
쌍둥이 나무처럼 한 개의 몸통에 두 개의 머리가 붙어 얼굴과 뇌는 다르다 해도 같은 심장과 같은 폐와 같은 내장을 소유하면서 불일불이(不一不二)의 삶을 살고 있었던 메리와 조디는 성곡적으로 분리 수술을 받았고 메리는 기어이 조디의 몸통으로부터 분리되어 저 세상으로 갔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왕 분리 수술을 성공적으로 받았으니까 조디가 메리의 몫까지를 살아주기 바란다"라고.
하나의 몸통에 붙은 두 개의 생명, 혹은 두 개의 몸통에 붙은 하나의 얼굴, 분리할 수 없는 그런 필사의 불일불이의 관계. 둘 중 하나를 제거하면 온전하게 잘 살 수 없는 그런 관계. 떠나버린 메리의 얼굴을 생각하며 또 혼자 남아 앞으로의 일생을 살아가야 할 조디를 생각하며 나는 시인이야말로 샴 쌍둥이처럼 세상과 분리되어서는 안 될 존재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보았다.
상처는 스승이다
절벽 위에 뿌리를 내려라
뿌리 있는 쪽으로 나무는 잎을 떨군다
잎은 썩어 뿌리의 끝에 닿는다
나의 뿌리는 나의 절벽이어니
보라
내가 뿌리를 내린 절벽 위에
노란 애기똥풀이 서로 마주앉아 웃으며
똥을 누고 있다
나도 그 옆에 가 똥을 누며 웃음을 나눈다
너의 뿌리가 되기 위하여
예수의 못자국은 보이지 않으나
오늘의 상처에서 흐른 피가
뿌리를 적신다
<상처는 스승이다> 전문
나의 뿌리를 먹여주는 것이 애기똥풀의 똥이듯이 너의 뿌리를 키워주는 것은 상처, 아니 모든 상처에서 흘러내리는 피다. 상처는 스승이고 그렇게 시인과 상처는 샴 쌍둥이처럼 생태적으로 붙어 있어 분리할 수 없다. 기어이 어떤 이유로 분리 수술을 해낸다면 수술이 성공하여 그 붙어 있는 고통으로부터는 해방되었을지 몰라도 뿌리는 거처를 잃고 절벽 아래로 스러진다.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겨울밤 거리에서 귤 몇 개 놓고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
귤값을 깍으면서 기뻐하던 너를 위하여
나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주겠다
내가 어둠 속에서 너를 부를 때
단 한 번도 평등하게 웃어주질 않은
가마니에 덮인 동사자가 다시 얼어죽을 때
가마니 한 장조차 덮어주지 않은
무관심한 너의 사랑을 위해
흘릴 줄 모르는 너의 눈물을 위해
나는 이제 너에게도 기다림을 주겠다
이 세상에 내리던 함박눈을 멈추겠다
보리밭에 내리던 봄눈들을 데리고
추워 떠는 사람들의 슬픔에게 다녀와서
눈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걷겠다
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겠다
<슬픔이 기쁨에게> 전문
'시인은 세상과 샴 쌍둥이'라는 명제를 잘 보여주는 시편이다. 시인과 세상은 이렇듯 샴 쌍둥이처럼 한 몸이다. 하나의 몸통으로 둘이 먹고 산다. 한 고통을 둘이 나누어 호흡한다. 그러나 시인은 더 멀리 가는 존재, 월러스 스티븐스가 그의 시린 <아다지오>에서 "시인이란 세상에 필수 불가결한 천가"라고 말한 것처럼, 시인은 세상의 고통보다 더 멀리 간다. 슬픔과 냉담과 욕심과 무관심과 분노를 넘어 세상에 늘 부족하기 마련인 사랑과 그리움과 기다림과 기다림의 슬픔까지 간다. 세상은 샴 쌍둥이처럼 시인에 붙어 시인의 폐로 숨쉬고 시인의 심장으로 혈액 순환을 하며 시인의 기관으로 소화를, 섭취를, 배변을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시대와 세상은 하수구나 변기통이나 황폐 지역디 될 것이며 천박한 물질주의의 노예로 전락한다. 폐를, 심장을, 내장기관을, 호흡기관을, 발성기관을, 정화기관을 갖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의 별에게
피는 묻어 있다
죄는 인간의 몫이고
용서는 하늘의 몫이므로
자유의 아름다움을
지키기 위하여
나의 별에는 피가 묻어 있다"
<새벽편지> 전문
이렇게 시인은 세상의 정화기관이 된다. 피 묻은 발에 대해서 노래하는 시인도 있을 수 있지만 그는 '피 묻은 별'에 대해 노래한다. 이 순간이 그가 소박한 낭만주의자나 현실주의와 결별하는 순간이다. 그는 지상과 천상 사이에 처형되어 있는 존재이다. 땅은 샴 쌍둥이의 몸통이요 '피 묻은 별'은 그냥 별이 아니라 유마적 꿈이다.
그렇게 볼 때 정호승 시인은 참으로 시인다운 시인이다. 나는 1973년부터 그와 알아왔는데 그는 한결같은 마음과 한결같은 꿈과 한결같은 순수와 한결같은 정결한 자세로 28년의 시작생활에 충실해왔다. 그가 다루는 소재, 주제, 지향은 조금씩의 변이를 보이고 있지만 그러나 '인간에 대한 사랑과 맑은 꿈'이라는 그 모체는 불변한다. <쌀 한 톨>속에 인간과 대지에 대한 사랑과 공경과 기도의 절 한 태를 짓는 모습!
쌀 한 톨 앞에 무릎을 꿇다
고마움을 통해 인생이 부유해진다는
아버님의 말씀을 잊지 않으려고
쌀 한 톨 안으로 난 길을 따라 걷다가
해질녘
어깨에 삽을 걸치고 돌아가는 사람들을 향해
무릎을 꿇고 기도하다
<쌀 한 톨> 전문
2. 동일성의 미학 " 윤동주,김소월,한용운의 지평에서
정호승 시인은 당대 독자들의 사랑을 많이 받은 시인(흔한 표현으로 인기 시인)이기도 하지만 또 한국 현대시사에서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시인들'과 어딘가 친연성을 보여주는(낯익은) 시인이기도 하다. 서정주의 <자화상>풍을 빌려서 말한다면 "어떤 이는 그에게서 윤동주를 보고 가고/어떤 이는 그에게서 김소월을 보고 가고/또 어떤 이는 그에게서 한용운을 보고 가"기도 한다. 그것은 그의 세계가 그만큼 한국인의 시적 감수성에 익숙하며, 한국인들이 좋은 시라고 생각하고 있는 그 '어떤 시절 원형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 정호승 시인은 이상이나 김수영처럼 지극히 낯선 방법으로 낯선 시의 새로운 지평을 개척한 이질성의 미학을 가진 시인은 아니다. 평론가 박덕규는 정호승 시인의 그러한 친숙한 표현 언어를 '낯익게 하기'에 방법론이라 부르고 있는데 그 표현법의 유효성에 대해 "우리의 표헌 언어가 지나치게 낯설게 하기로 치달아 오면서 난해성과 다의성만을 옹호해왔다는 점을 반성하는 자리에서 시와 독자와의 공동체적 인식을 유도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박덕규의 지적대로 시인의 텍스트는 낯익게 하기의 기법을 즐겨 사용하는 것이 사실이고 또한 그 때문에 현대시가 가지는 그로테스크한 낯설게 하기의 방법에 미적 협오를 느끼는 독자들은 그의 낯익게 하기 기법에서 한국시의 원형질과 어떤 불멸하는 시인의 원형질을 발견할 수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러시아의 기호학자 유리 로트만은 문학사 연구에서 한 시인, 혹은 텍스트의 위치를 평할 때 동일성의 미학가 대립의 미학이 구분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전통적인 목소리로 시를 쓴다고 해서 반드시 위대해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또한 낯설고 충격적인 전위적인 목소리로 시를 쓴다고 해서 꼭 위대해지는 것도 아니라는 말이다. 각기 자기 시대의 문학의 지배적 구성체와 독자가 가진 기대 지평선과의 관계 안에서 미적 가치가 생겨난다는 것이다.
동일성의 미학은 수신자(작가,시인)의 송신자(독자)의 약호가 동일하거나 혹은 거의 동일한 것을 전제로 한다. 반면 대립의 미학은 모더니즘 문학이나 낭만주의, 아방가르드 문학처럼 송신자의 약호와 수진자의 약호가 서로 다를 때 작용을 일으킨다. 한 문학 텍스트의 기능과 장치는 그것이 동일성의 미학으로 해석되는가, 아니면 대립의 미학으로 해석되는가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은 분명하다. 로트만은 왜 특정 문화에서 이 중 하나의 미학이 어떤 시기에 우세하게 되는가 하는 문제는 문화 유형학에 속한다고 본다.
정호승 시인의 경우는 송신자의 약호와 수진자의 약호 사이에 큰 틈새가 없는 동일성의 미학에 가까운 텍스트를 생산해왔다고 할 수 있겠다. 위에서 지적한 대로 그의 텍스트는 윤동주와 김소월과 한용운의 텍스트와의 친연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한국 현대시의 전통적 아버지에 속하는 그런 큰 시인들과의 친연성의 분위기가 송신자와 수진자 사이에서 작용하는 동일성의 미학의 코드를 강하게 울려서 독자들의 사랑과 공감을 이끌어오는 것이라고 생각 한다.
윤동주의 고결한 순수, 정결함에 대한 갈구와 부끄러움, 십자가 아래서 고뇌하는 지식 청년의 외로움, 근린애(近隣愛)적 사랑, 영원한 낭만, 시대를 슬퍼하는 괴로움 등을 우리는 그의 대표시 <서울의 예수>에서 만날 수 있다.
1
예수가 낚싯대를 드리우고 한강에 앉아 있다. 강변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예수가 젖은 옷을 말리고 있다. 들풀들이 날마다 인간의 칼에 찔려 쓰러지고 풀의 꽃과 같은 인간의 꽃 한 송이 피었다 지는데, 인간이 아름다워지는 것을 보기 위하여, 예수가 겨울비에 젖으며 서대문 구치소 담벼락에 기대어 울고 있다.
3
목이 마르다. 서울이 잠들기 전에 인간의 꿈이 먼저
잠들어 목이 마르다. 등불을 들고 걷는 자는 어디 있느냐.
서울의 들길은 보이지 않고, 밤마다 잿더미에 주저
앉아서 겉옷만 찢으며 우는 자여, 총소리가 들리고 눈
이 내리더니, 사랑과 믿음의 깊이 사이로 첫눈이 내리
더니, 서울에서 잡힌 돌 하나, 그 어디 던질 데가 없도
다. 그리운 사람 다시 그리운 그대들은 나와 함께 술잔
을 들라. 눈 내리는 서울의 밤하늘 어디에도 내 잠시 머
리 둘 곳 없나니. 그대들은 나와 함께 술잔을 들라. 술
잔을 들고 어둠 속으로 이 세상 칼 끝을 피해 가다가, 가
슴으로 칼끝에 쓰러진 그대들은 눈 그친 서울밤의 눈길
을 걸어가라. 아직 악인의 등불은 꺼지지 않고, 서울의
새벽에 귀를 기울이는 고요한 인간의 귀는 풀잎에 젖
어, 목이 마르다. 인간이 잠들기 전에 서울의 꿈이 먼저
잠이 들어 아, 목이 마르다.
5
나를 섬기는 자는 슬프고, 나를 슬프하는 자는 슬프
다. 나를 위하여 기뻐하는 자는 슬프고, 나를 위하여 슬
퍼하는 자는 더욱 슬프다. 나는 내 이웃을 위하여 괴로
워하지 않았고, 가난한 자의 별들을 바라보지 않았나니,
내 이름을 간절히 부르는 자들은 불행하고, 내 이름을
간절히 사랑하는 자들은 더욱 불행하다
윤동주의 고결한 내면 지향성, 십자가 의식, "모가지를 드리우고/꽃처럼 피어나는 피를/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윤동주의 시 <십자가>의 일부)와 같은 아름다운 희생양 의식,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같은 시행 4번 더 반복)//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윤동주의 <팔복>와 같은 복음에 대한 패러디 등을 <서울의 예수>에서 읽을 수 있다. "내 이름을 간절히 부르는 자들은 불행하고, 내 이름을 간절히 사랑하는 자들은 더욱 불행하다"와 같은 산상수훈의 일절에 대한 패러디는 그 자체로 정신성이 죽은 시대에 대한 절망이면서 불가능한 사랑에 대한 호소이기도 하다.
또한 초기 시에 지배적으로 흐르는 3음보, 4음보의 율격은 민족의 혈액을 무의식적으로 잡아당기는 김소월의 리듬과 상당히 닮아 있기도 하다. 3음보, 4음보의 반복적 율격은 초기 시에서 자주 보이는 것으로 "눈 내려 어두워서 길을 잃었네/갈 길은 멀고 길을 잃었네/눈사람도 없는 겨울밤 이 거리를/찾오는 사람 없어 노래 부르니"(<맹인부부 가수>)와 "구두를 닦으며 별을 닦는다/구두통에 새벽별 가득 따 담고/별을 잃은 사람들에게/하나씩 골고루 나눠주기 위해/구두를 닦으며 별을 닦는다"<구두 닦는 소년>등에서 자주 볼 수 있다.
민요나 전통 시가, 김소월의 시에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4음보, 3음보 등의 율격적 관습은 낯익게 하기에 장치일 뿐만 아니라 민중 정서를 거부감 없이 끌어당기는 음악적 요소가 된다. 그러한 율격적 관습은 70.80년대의 민중시에서 상당한 주술 감응적 효과를 거둘 수 있었고 한국인의 호흡률에 익숙한 리듬 감각을 창출해낼 수도 있다. 그러나 현대시에서는 이미 애호하지 않는 그러한 율격적 관습은 기계적 반복의 단조로운 느낌을 줄 수도 있고 또한 여러 평자들이 그의 반복성을 비판하는 요소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한 4음보,3음보의 전통적 율격은 초기 시를 지나면서는 자주 보이지는 않는다.
낯익게 만들기 기법이나 동일성의 미학을 가진 시인은 필연적으로 금세 독자들의 시야에 너무 익숙해질 위험성을 닿게 된다. 쉽게 진부하게 느껴지고 단순화의 상투성의 늪에 빠질 위험성에 노출되는 것이다. 그러나 정호승 시인은 시업 28년 동안 그러한 함정을 잘 비켜왔다고 할 수 있다. 사실 나로서는 이번 그의 시선집을 통독하는 동안 그가 자신의 동일성의 미학을 어느 지점에서 어떻게 극복해내어 자신의 절창의 능선에 올라서게 되었는가, 하는 것을 찾아보고 싶기도 했다. 그리고 그것이 불교적 상상력에 닿아 있으면서 만해가 가진 것과 같은 선(禪)적인 역설의 언어가 그를 단순화의 늪에서 멋지게 구출하고 잇는 것을 발견하였다.
익숙한 서정시의 형식을 가지고 있으되 어느 지점에서 그 익숙한 것들을 멋지게 뒤집어서 아주 낯선 언어와 낯선 사유의 지평으로 솟구쳐 올라서 넘어가기. 낯익은 동일성의 미학에서 시작하여 처음엔 송신자/수신자 사이의 익숙한 넓은 공감대를 선취하면서 동시에 어느 지점에서 아주 낯선 禪적 부정성의 정신과 역설의 언어로 송신과 탄력을 가지고 훌쩍 낯익은 지평을 뛰어넘기하는 것. 그것이 정호승의 시의 쾌감이며 정호승의 시세계를 동일성의 미학의 낯익은 지평선에서 구해내는 낯선 힘이라는 것을 지적하고 싶다.
3. 禪적 부정성의 역전(逆轉)과 역설의 언어의 쾌감
경주박물관 앞마당
봉숭아도 맨드라미도 피어 있는 화단가
목 잘린 돌부처들 나란히 앉아
햇살은 눈부시다
여름방학을 맞은 초등학생들
조르르 관광버스에서 내려
머리 없는 돌부처들한테 다가가
자기 머리를 얹어본다
소년 부처다
누구의 일생에 한 번씩은
부처가 되어보라고
부처님들 일찍이 자기 목을 잘랐구나
<소년 부처> 전문
1연과 2연은 그저 친숙한 풍경일 수 있다. 누구나 경주 박물관에서 목 잘린 부처들을 보았고 어린 학생들이 자기의 목을 목 잘린 부처의 목에 얹어보는 장난을 하는 것을 바라본 적이 있다.
동일성의 미학에서 이 시는 출발하지만 그러나 3연에서 관습적, 세습적 사고를 훌쩍 뛰어넘는 시인의 해석적 진술은 익숙한 것을 기대했던 독자의 기대 지평선을 타파하고 그것을 훌쩍 뛰어넘으며 시적 쾌감을 생산한다. 익숙한 것들이 무너지고 급격히 머나먼 새로운 지평이 뚫려오는 반전의 쾌감이다. 그 반전의 쾌감을 일으키는 것은 텍스트의 급격한 시점 전환이다. 시점은 초등학생들이 장난으로 돌부처가 되어보는 그 익숙한, 왁자지껄한 공간을 훌쩍 뛰어넘어 불법의 깊은 곳, 근원으로 육박해 들어간다. 소년들의 머리가 잠깐 올려진 목 없는 돌부처의 자리가 금새 '무자비의 자비'라는 역설에 도달하면서 무아의 화엄이 꽃피어난다. 그렇듯 3연은 중생이 부처되는 것을 위하여 자기 목을 무자비하게 잘라낸 부처의 무자비의 자비와 만해의 말처럼 중생은 부처의 님이라는 것을 동시에 보여준다. 보이지 않는 것들이 한 찰나에 드러나는 순간이며 미(迷)가 오(悟)가, 속(俗)이 성(聖)이 되는 순간이다. 그런 순간의 급작스런 역전에 텍스트의 쾌락은 놓인다.
길이 끝나는 곳에 산이 있었다
산이 끝나는 곳에 길이 있었다
다시 길이 끝나는 곳에 산이 있었다
산이 끝나는 곳에 네가 있었다
무릎과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울고 잇었다
미안하다
너를 사랑해서 미안하다
<미안하다> 전문
이 텍스트에서도 마지막 2행에서 역전이 일어나고 역설의 언어가 텍스트의 쾌락을 생산한다. 1행에서 3행까지 각 행이 대립 구조를 가지고 반복되기도 하지만 ㅣ"길이 끝나는 곳에 산이 있었다/산이 끝나는 곳에 길이...."ㅣ 역전이 일어나는 곳은 6행과 7행이다. 미안하다/너를 사랑해서 미안하다 라는 말은 1행부터 5행 사이에 있는 너라는 2인칭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의 감정이 상승되는 것을 과감하게 처단하고 발하는 말 아닌 말이다. 반어 또는 역설이라고 해도 좋다.
또한 6행과 7행 사이에도 낯설게 만들기의 전략이 관여한다. "미안하다" 다음에 "너를 사랑해서 미안하다"라는 통사적 연결 사이에는 아무런 의미론적 인과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익숙한 사고들의 관계, 즉 인과의 논리를 타파하는 낯선 즐거움의 언어.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오죽하면 비로자나불이 손가락에 매달려 앉아 있겠느냐
기다리다가 죽어버려라
오죽하면 아미타불이 모가지를 베어서 베개로 삼겠느냐
새벽이 지나도록
魔旨를 올리는 쇠종 소리는 울리지 않는데
나는 부석사 당간지주 앞에 평생을 앉아
그대에게 밥 한 그릇 올리지 못하고
눈물 속에 절 하나 지었다 부수네
하늘 나는 돌 위에 절 하나 짓네
<그리운 부석사> 전문
이 시는 위에서 본 텍스트와는 달리 낯익게 만들기에서 시작하지 않고 낯설게 만들기에서 시작한다. 돌발적인 상상력으로 돌발적인 발화를 던진다. 1행과 2행 사이에는 인과관계가 파괴되어 있다. 오죽하면 이란 부사가 앞 행 어디를 보아도 어떻게 논리적으로 연결되는지를 알 수 없다. 의미론적 일탈이 일어난다.
비로자나불은 불교의 진리를 부처님으로 신격화시킨 법신불이고 비로자나는 본래 광명을 두루 비친다는 뜻으로 부처님의 광명을 어디에나 두루 비치게 하는 부처님인데 "오죽하면 비로자나불이 손가락에 매달려 앉아 있겠느냐"라는 돌발적인 2행을 암시하기에는 1행 또한 돌박적이고 낯설기만 하다
대전 광수사의 대적광선 비로자나불(청동불)에는 오른쪽 팔꿈치에 상서로운 �꽃이 피어났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지만 (이 꽃은 길이가 2센티 정도로 육안으로 식별하기 어려울 만큼 가는 실뿌리를 내렸으며 줄기는 낚싯줄보다 더 가늘며 투명하다고 한다) 부석사의 비로자나불이 시적 화자의 손가락 끝에 매달려 있는 시적 정황에 대해서는 암시가 매우 부족하다. 돌발적인 결합이다. 1행의 순사적 사랑, 욕망이 있고 번뇌가 있고 죽음을 권유하는 시적 진술과의 상관 관계에서 미루어보아도 2행의 의미는 단순하지가 않다.
3행에서도 돌발적인 권유적 진술이 뛰쳐나온다. 1행과 2행의 돌발적 관계가 3행과 4행 사이에서도 반복된다. "오죽하면 아미티불이 모가지를 베어서 베개를 삼겠느냐"라는 4행 역시 "기다리다가 죽어버려라"라는 3행과의 사이에서 인과관계가 부서진 의미론적 일탈을 보여준다. 아미타불은 "내가 부처를 이룰 수 있다 해도 내 국토에 지옥, 아귀, 축생이 있다면 나는 깨달음을 취하지 않으리라"라고 말하며 48대원을 세웠다. 아미타 부처는 자기와 남이 다 함께 부처 이루기를 염원하여 성불하였다고도 전해지지만 이 텍스트의 아미타 부처는 "자기 모가지를 베어서 베개로 삼"고 무한정 중생을 기다리는 부처님이다. 3행과 4행의 봉사적 연결은 정해진 연상을 부수는 어법이다. 이러한 돌발적인 파격의 어법이 역설과 더불어 텍스트의 쾌락을 생산하고 "부석사 당간지주 앞에 평생을 앉아/그대에게 밥 한 그릇 올리지 못하고/눈물 속에 절 하나 지어다 부수"는 시적 화자의 참혹한 그리움을 확대시킨다.
순사적 사랑, 혹은 사랑의 참혹한 힘, 혹은 그 말의 힘은 <사랑한다>에서 절정을 이룬다.
밥그릇을 들고 길을 걷는다
목이 말라 손가락으로 강물 위에
사랑한다라고 쓰고 물을 마신다
갑자기 먹구름이 몰리고
몇날 며칠 장대비가 때린다
도도히 황톳물이 흐른다
제비꽃이 아파 고개를 숙인다
비가 그친 뒤
강둑 위에서 제비꽃이 고개를 들고
강물을 내려다본다
젊은 송장 하나가 떠내려오다가
사랑한다
내 글씨에 걸려 떠내려가지 못한다
<사랑한다> 전문
'사랑한다'라는 글, 혹은 말은 목마름을 채워주는 구원의 생명수가 되기도 하고 몇날 며칠을 내리는 장대비를 일으키기도 하고 황톳물을 일으키는 횡액의 홍수를 만들기도 하고 송장을 만드는 죽임의 파괴력이 되기도 한다. 이 텍스트에서도 마지막 2행이 역전을 일으킨다. 1행부터 11행까지는 모든 것이 흘러가는 흐름에 대한 묘사인데 "사랑한/내 글씨에 걸려" 송장 하나가 "떠내려가지 못한"다는 의외의 풍경에서 텍스트는 반전화 훼방 형식이 만들어내는 쾌감을 일으키고 독자들은 돌발적인 낯선 의미 생성에 직면하게 된다.
봄날 미시령에
사랑하는 여자
원수 같은 여자가
붉은 치마를 입고 그네를 뛴다
죄없는 짐승
노루새끼가 놀라 달아나고
파도 한줄기가 그네를 할퀴고 지나가자
내가 사랑하는 여자
원수 같은 여자
그넷줄을 놓고
동해로 풍덩 빠진다
<미시령> 전문
'붉은 치마를 입고 미시령에서 그네를 뛰는 여자'는 단풍이 붉게 타오르는 미칠 듯이 아름다운 미시령의 가을 절경을 은유하는 듯도 하지만 "사랑하는 여자/원수 같은 여자"의 모순어법과 돌발적인 마지막 행의 역전은 텍스트의 쾌감을 생산하며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사랑이라는 감정의 붉은 바닥을 보여준다. 말할 수 없는 것이 말해지고 드러나지 않던 것들이 드러난다. 무목적적인 열정의 돌연한 행위, 거기에 우리의 타성을 깨치는 선적 비밀이 놓인다.
위에서 보았듯 비논리적인 어투와 병치, 돌발적인 구절들의 돌연한 부딪침, 어리둥절하게 하는 역설, 캄캄한 절벽으로 몰아세우는 것 같은 갑작스런 전환... 이런 선적인 형식이 그의 시세계를 동일성의 미학이 흔히 가질 수 있는 매너리즘을 넘어가게 했던 장치가 되었고 그의 절창들은 대개 그런 선적 형식에 기댄 텍스트들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4. 자본주의의 사창가를 처단하는 참혹한 맑음
초기 시에서부터 정호승 시인은 자본주의의 속악성의 지배를 받는 현실을 사창가에 비유하였다. <가을 일기>를 보면 "나는 어젯밤 예수의 아내와 함께 여관잠을 잤다/(중략)/김밥을 먹으며 나는 경원 극장에서 본 영화/벤허를 이야기했다 비바람이 치면서/예수가 죽을 때 당신은 어디에 있었느냐고 물었다/그녀는 말없이 먹다 남은 김밥을 먹었다/(중략)/바퀴벌레 한 마리가 그녀가 벗어놓은 속치마 위로 기어갔다/가을에도 씨뿌리는 자가 보고 싶다는/그녀의 마른 젖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불을 껐다"라고 예수의 아내가 창녀가 되는 자본주의의 무서운 현실을 인식하고 있다. 그리하여 자본주의적 지배에서 소외된 소외 계층들 - 빈자들, 불평등에 시달리는 불행한 사람들, 구두닦이, 무작정 상경한 소녀, 신물팔이 소년, 혼혈아, 맹인부부, 미친년, 무시래깃국 같은 아버지, 노숙자 등 많은 시에서 체제의 그림자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무서운 속도로 욕망을 확대, 재생산하는 자본주의의 맹렬한 속도로 소외 계층을 생산해낸다. 욕망은 욕망을 낳고 욕망은 욕망을 낳아 욕망을 무한 확대 반사하는 '욕망의 반사경' 속에 현대인들의 삶은 처단되어 있다. 화택 속에서의 끝없는 유전은 현대인의 삶의 조건이다. 욕망의 반사경이 거울 비추기 놀이를 하는 가상의 세계 속에서 인간은 갈애와 미혹과 무명과 결핍과 불을 끊을 수가 없다. 구렁이처럼 우리의 몸을 칭칭 감고 있는 탐진치의 카니발, 가상들의 음험한 축제는 시인의 텍스트 안에서 숨막히는 선적 처단의 대상이 된다. 그 순사적 결단으로 인해 자본주의적 주체는 참혹한 맑음을 얻게 된다.
밥상 앞에
무릎을 꿇지 말 것
(중략)
무엇보다도
전시된 밥은 먹지 말 것
먹더라도 혼자 먹을 것
아니면 차라리 굶을 것
굶어서 가벼워질 것
때때로
바람 부는 날이면
풀잎을 햇살에 비벼 먹을 것
그래도 배가 고츠면
입을 없앨 것
<밥 먹는 법> 에서
당돌한 느낌을 주는 마지막 2행으로 우리는 절벽 앞에선 듯한 깨달음 속에서 우리의 욕망을 정화하게 된다. 참혹한 맑음이 나에게 오는 순간이다.
달빛 아래 개미들이 기어간다
한평생 잠들지 못한 개미란 개미는 다 강가로 나가
일제히 칼을 간다
저마다 마음의 빈자리에 고이 간직한 칼을 꺼내어
조금도 쉬지 않고 간다
달빛은 푸르다
강물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개미들이 일제히 칼끝을 치켜세욱
자기의 목을 찌른다
<개미> 전문
보잘것없는 이 개미들, 개미들은 개미처럼 살아가는 현대인의 상징일 것이다. 이 보잘것없는 개미들이 마음의 칼을 일제히 갈고 있는 강가, 고요함, 격렬한 심장의 고동소리, 푸른 달빛이 그로테스크함, 자기가 가는 마음의 칼끝에 자기가 찔려죽는 이 아이러니에서 독자들은 낯익은 기대 지평선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낯선 세계가 눈앞에 다가온다. 자해밖에 남지 않은 개미들의 운명의 섬광 속에서 참혹한 맑음이 뿜어져 나온다.
또한 그의 시세계에서 서구 중심의 근대나 자본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제시로 생태학적 세계관을 들 수 있다. 불교적 상상력이라고 해도 좋다.
날이 밝자 아버지가
모내기를 하고 있다
아침부터 먹왕거미가
거미줄을 치고 있다
비 온 뒤 들녘 끝에
두 분 다
참으로 부지런하시다
<들녘> 전문
세상은 하나의 연으로 묶여 있다 아버지와 먹왕거미와 삼라만상과 나, 모두 다 생명의 연에 묶인 생태계의 생명들이다. 아버지가 모내기를 하는 것은 먹왕거미가 거미줄을 치는 행위와 다를 바 없다. 모두 다 생명의 일을 하는 것이다. 이 텍스트에서도 마지막 2행에 반전이 놓여 있다. "두 분 다/참으로 부지런하시다"에서 이성중심주의가 자연 위에 군림해온 근대의 폭력적 세계관은 소멸되고 새로운 생태학적 시각이 맑게 솟아난다. 논에서 일하는 아버지의 노동과 비 온 뒤 부지런히 나와 거미줄을 치고 있는 먹왕거미의 노동도 모두 "천지만물이 모두 하나일 따름이고 차별이 없다"는 장자의 말처럼 공경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봄밤><밥그릇>에서도 그러한 시각은 현대인의 욕망을 구원하며 맑음을 주는 힘으로 제시된다. 자본주의적 사창가를 뛰어넘는 참혹한 맑음의 힘을 시인은 불교의 색채가 짙은 생태학적 세계관과 돌연한 깨뜨림을 통해 깨달음을 갖는 선적 언어에서 찾은 것으로 보인다.
시업 28년에 이르는 정호승 시인의 시세계를 두서 없이 살펴보았다. 그는 독자들에게 동일성의 미학에 기초한 시작으로 낯익은 느낌을 주면서도 선적 미학과 역설의 언어로 인해 낯선 충격을 동시에 주는 진귀한 시세계를 개척하고 있다. 시의 죽음이 선포된 지도 오래인 지금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그가 계속 강렬한 섬광의 선적 충격들을 시 속에 담아 당대인들을 결박하고 있는 자본주의적 욕망과 정신의 헌 옷들을 격렬하게 태워버리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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