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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리의 수업/문학과 관련하여

[스크랩] 삼국유사 - 일연

by 拏俐♡나리 2010. 5. 19.

 

일연(一然, 1206~1289)은 칭기즈칸이 몽골족을 통일하고 제국을 건설한 해에 태어나, 최씨 무인정권과 몽골의 고려 침입을 함께 겪는 모진 세월을 살았다. 14세에 출가하여 78세 때는 국사(國師)가 된 고승이었는데, 곧바로 인각사(麟角寺)로 은퇴하여 [삼국유사]를 완성하였다. 이 책 덕분에 일연은 우리에게 누구보다 낯익은 역사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그의 생애와 [삼국유사]의 가치에 대해서는 좀 더 차분하고 치밀한 분석의 손길이 따라야 한다. 13세기 아주 특별한 이에 의해 이룩한 민족의 발견,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삼국유사]의 저자로 유명한 일연, 정작 그의 생애는 오리무중이다

일연은 너무 유명해서 아무도 모른다. 이 반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좋을까. [삼국유사]의 지은이로 일연을 모르는 이는 거의 없다. 그런데 그의 생애는 오리무중이다. 사실 [삼국유사]가 유명하므로 일연 또한 덩달아 유명해졌다. 오늘날 초등학생에서 일반인까지 [삼국유사]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교과서와 동화책과 인문 교양서에 이르기까지 [삼국유사]를 변주한 책의 숫자는 헤아리기 어렵다. 그래서 많은 사람은 [삼국유사]라는 책에 낯설지 않다. 낯설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지나치게 친숙하다.

 

일찌감치 [삼국유사]에 대해 이렇게 평한 적이 있다. “정녕 우리 역사를 지식인의 역사에서 민중의 역사로, 사대의 역사에서 자주의 역사로 바꿔 놓은 책. 우리 문학을 지식인의 문학에서 민중의 문학으로, 사대의 문학에서 자주의 문학으로 바꿔 놓은 책.” 이런 [삼국유사]를 지은 이가 일연이다.

 

[삼국유사] 3권 1책, [삼국유사]는 고려 후기 고승 일연이 1281년(충렬왕 7년)에 편찬하였다.

 

그런데도 일연을 모른다니, 오리무중의 대상이라니 무슨 말인가. 일연은 20세기에 들어 유명해졌다. 아니 이 또한 [삼국유사]가 유명해지면서 일어난 현상이다. 20세기가 시작되기 이전까지 일연을 아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그것은 [삼국유사]를 아는 사람이 극소수였다는 말과 같다. 한마디로 일연은 [삼국유사]와 함께 운명을 같이하는 이이다.

 

하지만 일연은 당대에 꽤 잘나간 사람이었다. 그가 살았던 고려 왕조의 국사가 된 이였다. 국사는 한 나라의 스승이다. 특히 불교가 국교였던 고려사회에서 국사의 위치는 지금의 상상을 초월한다. 김수환 추기경이 선종하고 법정 스님이 입적하였을 때,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분들의 죽음을 안타까워하고 그분들의 생애를 그리워했는가. 단순하게 따지자면 당대의 일연은 추기경과 스님을 합쳐 놓은 분이나 다름없었다. 적어도 그만한 이가 국사에 올랐고, 단일 종교에 국가 종교였던 불교의 당시 영향력으로 치자면 국사는 두 분을 합쳐 놓은 것 이상이었다. 일연도 그만한 반열에 오른 이였다.

 

그런데도 일연을 모른다니, 오리무중의 대상이라니 무슨 말인가. 하물며 일연에게는 번듯한 비문이 남아서 전해온다. 한문으로 쓴 1,200자 가량의 꽤 긴 분량이다. 가계와 생몰연대 그리고 주요활동이 자세히 적혀 있다. 그것만으로도 웬만한 이에 비하면 꽤 풍부한 자료를 남겨 놓은 셈이다. 하지만 그것은 평면적이고 단선적이다. 비석을 세우기 위해 쓴 비문 하나가 정보의 거의 전부나 마찬가지다. 한 나라의 국사까지 오른 고승에 대해 이토록 감감무소식인지 의아할 만큼, 다른 기록에 걸쳐 견주어 입증할 자료가 없다. 그러므로 구체적이고 입체적이지 않다. 이 때문에 오리무중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일연은 그런 대우를 받아야 할 사람이 아니다. 비문에 나타난 그의 생애와 [삼국유사]에서 간접적으로 확인하는 그의 세계관은 결코 만만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치적 혼란과 전쟁으로 점철된 일연의 시대

이름을 안다고 다 안 것처럼 여기는 우리네 불찰이 여기서 한몫 거든다. 일연이라는 이름 두 글자를 알았다고 해서, 그 사람의 일생을 다 알았다고 말하면 너무 싱겁다. 우리의 역사 시간은 거기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했다. [삼국유사]에 대해서도 그 이름과 단편적인 몇 가지 내용만 알 뿐, 깊이 있게 이 책의 가치와 뜻을 생각하지 않는다. 너무 유명해서 알았다 여기고 넘어가는 무심함을 이제 깰 때가 되었다.

 

비록 단선적이긴 하나 먼저 비문을 통해 일연의 생애를 정리해 볼 필요가 있겠다. 일연은 고려 희종 2년 경상도 경산에서 태어났다. 이 해 곧 1206년은 칭기즈칸이 몽골족을 통일하고 제국을 건설한 해이다. 그리고 꼭 10년 전인 1196년에는 최충헌이 자신의 무인정권을 세웠었다. 일연의 생애는 최씨 무인정권과 몽골의 고려 침입을 함께 겪는 신난(辛難)한 세월이었다.

 

643년 원효가 창건한 이래 1307년 보각국사 일연이 중창
하고, [삼국유사]를 편찬한 인각사에 있는 보각국사비의
탁본. 이 비는 1295년(충렬왕 21년) 사승 죽허가 왕희지
글자를 집자해서 세운 것으로, 인각사보각국사탑과 함께
보물 제428호로 지정되었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NIKH.DB-fl_004_001_000_0093)


일연의 속명은 김견명(金見明), 어머니가 자신에게 환히 해가 비추는 꿈을 꾸고 잉태하였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14세에 설악산 아래 강원도 양양의 진전사(陳田寺)로 가서 출가했고, 이때 이름은 회연(晦然)이었다. 진전사는 우리나라 선종의 첫 승려인 도의(道義)가 은거하며 수행하던 곳이다. 22세에 과거시험의 승과에 나가 합격한 일연은 이후 몽골 전란기의 혼란한 상황 속에서 경상도 달성의 비슬산을 중심으로 수행하였다.

 

그가 처음 세상에 이름을 드러낸 것은 44세 때였다. 경상도 남해의 정림사(定林社) 주지로 부임하면서다. 첫 직장치고는 꽤 늦었다. 55세에는 남해에서 [중편조동오위(重篇曺洞五位)]를 저술하였다. 일연의 많은 저작 가운데 [삼국유사]와 함께 지금까지 전하는 이 책은 그의 수행과 학문이 벌써 상당한 경지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자연히 불교계에서는 일연에 대해 주목하기 시작했고, 그의 활동 범위는 이제 전국으로 뻗어가기 시작하였다. 중앙 정계의 인물들과 교유하는가 하면, 각지의 사찰에 머물며 후학을 길러냈다. 몽골에 항복한 고려가 함께 일본 정벌을 하던 때는 일연의 나이 어언 76세가 되어 있었는데, 충렬왕은 일연을 곁에 불러 자문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일연은 1283년 그의 나이 78세에 국사가 되었다. 종신직인 이 자리에 오른 이는 개성에서 머물러야 하지만, 일연은 이듬해 경상도 군위의 인각사(麟角寺)로 은퇴하여, 주석한 지 5년 만인 1289년에 84세를 일기로 입적하였다. 이 시기에 [삼국유사]를 완성한 것으로 보인다. 일연이 79세 때 고향에 돌아왔을 때 어머니는 96세였다. 실로 은퇴의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열일곱 살에 아들 하나 두고, 스물여섯 살에 제 품에서 아들을 떠나 보낸 어머니는 70년을 홀로 살았다. 일연은 그 어머니에게 마지막으로 효성을 다하고 싶었던 것이다.

 

 

일연이 쓴 삼국유사, 정사의 상대적인 의미인 ‘대안사서’라 부를 수 있다

우리는 [삼국유사]를 흔히 야사(野史)라 부른다. 그러나 입증하기 어려운 뒷방 이야기라는 부정적인 의미가 더 강하게 들리는 말이 야사이다. 그렇다면 [삼국유사]에 대한 정당한 대우가 아니다. 그래서 ‘대안사서(代案史書)’라고 부르자는 주장이 최근에 나왔다. 당대의 기준에서도 정식 사서라 할 수 없는 책이지만, [삼국유사]는 오히려 전혀 다른 세계의 발견을 우리에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뜻있는 작명이 아닐 수 없다. 대안사서는 [삼국사기]를 정사라고 불렀을 때 상대적으로 쓰일 수 있는 말이다.

 

그렇다면 어떤 대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일까? 우리는 그것을 생활사(生活史)로 요약해 본다. 위로는 왕에서부터 아래로는 일반 서민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나라를 이루었던 이 땅의 민중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삼국유사]는 수많은 일화를 적절히 정리하여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이것은 곧 일연의 세계관이기도 하였다. [삼국유사]는 왕력(王曆)∙기이(紀異)∙흥법(興法)∙탑상(塔像)∙의해(義解)∙신주(神呪)∙감통(感通)∙피은(避隱)∙효선(孝善) 등 9개의 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체적인 구성을 본다면 연대기로서 왕력, 준 역사서로서 기이, 불교 문화사적 관점에서 당대인의 삶을 기록한 흥법 이하의 여러 편으로 삼대분(三大分)해 볼 수 있다.

 

여기서 왕력 편은 [삼국유사] 전체 기술의 기반이 되는 부분이고, 기이 편은 양적으로도 역사자료의 가치가 충분히 있지만, 기술방식이나 역사관에서 [삼국사기]와 현저히 다른 질적인 면이 우리의 관심을 끈다. 특히 기이 편은 그 서문에서 밝힌바, 우리에게 뿌리가 되는 나라와 왕들을 비록 기이한 이야기처럼 들릴지 모르나 굳이 수록하겠다는 것, 그래서 단군 신화가 처음으로 문서 상에 기록되었다는 데에서 더는 강조할 필요가 없는 가치를 지니고 있다.

 

한편, 흥법 편 이하의 편들은 불교 문화사적 관점에서 기록하였다. 일연은 승려로서 분명한 불교적 역사의식을 가진 사람이었다. 불교 문화사란 그런 저자에게서 나올 수 있는 당연한 결과다. 다만 불교 하나로 모든 것을 재단하고 있지 않다는 점, 그러므로 읽는 이도 어떤 편협한 선입관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점이 중요하다. 나아가 흥법 편 이하가 중국의 승전(僧傳)을 많이 모방했다는 설도 있다. 그런 부분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부분이 더 많다. 일연은 [삼국유사]를 쓰면서 [삼국사기] 같은 역사서로만, [고승전] 같은 불교서로만 만족하지 않았던 듯하다. 그것들이 어우러지면서 우리 고대사를 입체적으로 조망해 볼 어떤 틀을 만들어냈다고 보아야 한다.

 

이제 우리는 [삼국유사]를 어떻게 읽어야 할까? 그것은 일연이 [삼국유사]를 통해 보여주고자 했던 바를 반추했을 때 드러난다. 생활이 묻어 있는 이야기이고, 민족의 얼굴을 그려볼 수 있는 자료이다. 우리는 거기서 생활을 발견하고 민족을 재발견한다.

 

 

뛰어난 이야기꾼이었던 일연이 전하는 삼국시대 이야기

이렇게 [삼국유사]의 세계를 정리해 보면서 다시 고개를 드는 의문이 남았다. 과연 일연은 누구인가. 정치적이고 역사적인 측면에서 이에 대한 해답은 매우 치밀하고 장황하게 늘어질 수 있다. 그러나 한마디로 말한다면 그는 이야기꾼이었다. 일연은 이야기하는 재주를 다양하게 지닌 이였다. 그는 정치적이고 역사적인 사건을 이야기 속에 풀어 넣는 비상한 기술을 지니고 있었다. 이 같은 기술은 몇 가지 양상으로 나타나는데, 원효와 의상처럼 대조적인 두 사람을 짝을 지어 등장시킴으로써 흥미를 배가시키는 경우, 김춘추처럼 주인공의 자리에 조연으로 등장시켜 매우 객관적인 태도로 한 사람을 조명하는 경우 등이 먼저 눈에 띈다. 이는 이야기에 이목을 집중시키는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우리의 시선을 끄는 경우는 한 왕대에 대해 대표적인 한 사건을 서술하여 그 성격을 부각시키는 방법이다. 이는 선택과 집중의 기술이라 할 수 있다. 미추왕과 죽엽군, 내물왕과 김제상, 이런 식이다. 그것은 [삼국유사]가 정식 역사서의 의무감에서 벗어나 있었기에 가능했지만, 한 왕대에 여러 가지 복잡한 사건이 얽혀 있다고는 하여도, 그것을 특징적인 사건 어느 하나로 집약하여 정리해 주는 이 방식에서 일목요연한 흐름을 짚어보게 되고, 저자의 분명한 역사관 또한 찾아볼 수 있으니 매우 흥미롭다.

 

다른 예를 들어보자. 진평왕의 경우, 왕은 무려 53년이나 왕위에 있었던 인물이었음에도, 일연은 다만 한 가지 천사옥대(天賜玉帶), 곧 하늘이 내려준 옥대를 받은 일로 갈음한다. 그의 권위와 업적에 대해서는 이 한 가지로 설명이 충분하다는 입장이다. 하늘에서 옥대가 내려온다는 일이 발생 가능한 것인가는 논외다. 만약 거기에 걸려서 쓰기를 주저했다면 아예 단군신화는 설 자리조차 잃었을 것이다.

 

법흥왕은 기이 편에서 등장하지 않는다. 법흥이 신라 역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고려할 때 이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다가 흥법 편에서 이차돈 순교 사건의 조연으로 법흥은 나온다. 물론 이는 [삼국유사]를 사건의 나열 방식이 아니라 주제별 분류에 따라 썼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다. 그러나 법흥이 법흥인 것은 신라의 불교공인을 떠나 생각할 수 없다. 그러기에 일연은 왕의 재위 순서에 따라 기이 편을 기술하다가도 법흥 같은 중요한 왕을 과감하게 흥법 편으로 돌렸다. 거기서 더 흥미롭게 법흥을 이야기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일연의 [삼국유사]만큼 ‘유사’라는 제목이 어울리는 것도 없다

일연은 역사를 왕 중심이 아니라 이야기의 주인공 중심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서민이나 지체가 낮은 스님도 이야기의 중심이라면 주인공으로 등장시켰다. 그의 붓을 통해 정착한 이야기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입체적 생활사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유사’라는 제목을 붙이는 다른 책 또한 이와 비슷한 시도가 있었지만, 일연만큼, 일연의 [삼국유사]만큼 내용과 형식에서 뛰어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일연이 가졌던 세계관은 결코 만만하지 않다.

 

 

 

 

고운기 / 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글쓴이 고운기는 삼국유사를 연구하여 이를 인문교양서로 펴내는 일에 주력하고 있다. 필생의 작업으로 [스토리텔링 삼국유사] 시리즈를 계획했는데, 최근 그 첫 권으로 [도쿠가와가 사랑한 책]을 펴냈다. 이를 통해 고대의 인문 사상 역사를 아우르는 문화사를 쓰려한다.

그림 장선환 / 화가, 일러스트레이터
서울에서 태어나 경희대학교 미술교육학과와 동대학원 회화과를 졸업했다. 화가와 그림책 작가로 활동을 하고 있으며, 현재 경희대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http://www.fartzzang.com
이미지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http://db.history.go.kr)
출처 : 로망
글쓴이 : 로망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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