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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리의 수업/문학과 관련하여

매체냐, 권력이냐

by 拏俐♡나리 2010. 5. 27.

매체냐, 권력이냐

-발터 벤야민의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비판-

 

 

1. 들어가며

 

신생매체인 영화가 영향력을 획득해가고 나치가 승승장구하던 1936년에 쓰여져 별다른 반응을 얻지 못하다가, 60년대 이후에 새롭게 재조명되었으며, 어떤 평론가에 의해서 "맑스적 대중문화비평의 발전에 가장 중요하고 유일한 에세이일 것"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고, 지금은 영화이론, 문화이론, 대중매체이론 및 비판미학을 다루는 책에 빠짐없이 언급되는 바로 그 논문 -―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의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Das Kunstwerk im Zeitalter seiner technischen Reproduzierbarkeit)」. 이 논문에서 벤야민은 회화, 조각 등 전통적 예술작품과 당시 새롭게 등장하던 매체인 사진과 영화 등 새로운 매체를 '예술작품'으로 격상시켜 함께 비교하면서, 지각의 변화와 사회의 변혁을 함께 고찰하고 있다. 이 논문에는 아우라(Aura), 의식가치(Kultwert)와 전시가치(Ausstellungswert) 등 벤야민이 새롭게 구성한 개념들이 등장하며, 특히 영화라는 매체를 집중적으로 다루면서 영화가 대중의 지각에 어떤 식으로 영향을 주며, 그로 인해 사회변혁에 어떤 식으로 개입하는지 분석하고 있다.

 

나는 애초에 이 글에서 벤야민의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을 철저하게 파헤쳐서 정리하고, 핵심내용들을 찾아내어, 여러 평론가들의 평가를 살펴보고, 내 입장을 첨가하는 식으로 구성하려 했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접근했을 경우, 내가 이 논문에 대해 비교적 철저하게 이해할 수 있다는 장점은 있겠지만, 이미 많이 출판되어 있는 벤야민 연구서들과 겹치는 부분이 너무 많고, '정리'하는 것 외에 별다른 기여를 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기 때문에 과감히 포기했다.

 

대신, 벤야민의 논문을 읽기 전부터 관심을 갖고 있던 대중매체와 권력과의 관련성 문제와 벤야민의 논문을 연결시키는 시도를 해보기로 했다. 30년대 벤야민이 품었던 영화에 대한 '희망'은 70년이 지난 오늘날 어떻게 변해있을까? 대중은 벤야민의 바램처럼 변혁의 주체로 남아있을까? 매체는 지속적으로 대중을 참여시키는 방향으로 변해가고 있는가? 대중이 참여할 수 있는 매체는 변혁을 일궈내는가? 매체보다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적 환경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대중매체의 권력은 과연 대중에게 있는가? 기존의 책에서 찾아볼 수 없는 이런 물음들을 내 스스로 던져보고, 그에 대해 나름대로 답을 구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따라서, 벤야민의 논문은 이 글의 바탕에 깔려 있으나, 어디까지나 이 글은 그 바탕 위에서 벤야민을 '다시 읽으려는' 시도이다.

 

2.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벤야민은 당시의 생산구조 속에서, 그 경향에 맞추어 전통적 예술양식과 다른 일련의 새로운 "예술발전 경향"(198)이 나타나고 있다고 파악한다. 새로운 예술발전 경향과 전통 예술의 차이를 드러내는 특징으로 그가 꼽는 것이 '기술적 복제'다. "예술작품은 원칙적으로 언제나 복제가 가능하였"(199)지만 "기술적 복제는 좀 새로운 현상"(199)이라는 것이다. 주조(鑄造)와 각인(刻印), 목각판화, 석판인쇄를 거쳐 사진술이 나오면서 "손이 담당해 왔던 예술적 의무를 이제는 렌즈를 투시하는 눈이 혼자 담당하게 되"는(200) 혁명적 변화가 이루어졌고, 뒤이어 유성필름이 등장함으로써 "전래적인 예술작품 전체를 복제의 대상으로 만들었고, 또 이러한 영향을 통하여 예술에 깊은 변화를 끼치기 시작했을 뿐만 아니라 여러 예술적 처리과정 속에서도 그 자체의 독자적 위치를 차지하는 바가 되었다"(200)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완벽하게 복제를 해도 한가지 빠져있는 요소가 있는데, 그것은 "시간과 공간에서 예술작품이 갖는 유일무이한 현존성, 다시 말해 예술작품이 위치하고 있는 장소에서 그 예술작품이 지니는 일회적 현존성"(200)이다. 하지만, 기술복제로 인해 사물의 '진품성'이 사라지게 됨으로써, 작품의 "역사적인 증언적 가치"(202)와 "사물의 권위"(202)가 위험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또한 기술복제품은 '대량생산'으로 유통됨으로써 '대중운동'과도 매우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벤야민은 여기서 "영화는 이러한 대중운동의 가장 강력한 매개체"(202)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속뜻을 일찌감치 드러낸다.

 

작품의 "유일무이한 현존성"과 "일회적 현존성"은 벤야민이 만들어낸 '아우라(Aura)'라는 개념과 함께 생각할 수 있다. "아무리 가까이 있더라도 어떤 먼 것의 일회적 나타남"(204)이라고 그가 정의했던 이 아우라는 일종의 마술적인 분위기로서, "예술작품의 일회적인 존재성"이기도 하다. 이것은 기술복제로 대량생산 유통되는 작품에서는 느낄 수 없는 신비한 분위기로서, 전통적 예술작품과 기술복제 작품을 구분하는 특징이 된다.

 

예술작품이 본래 마술적 의식에, 다음으로 종교적 의식에 봉사하기 위해 생겨났다고 보는 벤야민은 대상을 "감싸고 있는 껍질"(204)인 아우라를 가진 전통 예술작품이 이런 종교적 의식의 산물로 남아있는 것이라고 파악한다. 반면,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는 아우라가 제거됨으로써 "세계역사상 처음으로 예술작품으로 하여금 지금까지 종교적 의식 속에서 살아온 기생적 삶의 방식으로부터 벗어나도록 하였다"(206)는 것이다. 여기서 다시 벤야민은 의식가치(Kultwert)와 전시가치(Ausstellungswert)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과거의 종교적 의식의 산물인 전통적 예술작품은 종교'의식'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어서 "오늘날에도 (…) 예술작품이 숨겨진 상태에 머물러 있기를 요구하고 있는 것"(208)처럼 보이지만,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은 대중들에게 공개됨으로써 의미를 가지기 때문에 '전시가치'가 엄청나게 커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전시가치를 가장 구체적으로 예증하고 있는 것이 사진과 영화이다.

이후, 벤야민은 주로 영화를 다루면서 기술복제시대의 예술품의 특징을 제시하기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수용자, 곧 대중의 역할이다.

예술작품의 기술적 복제가능성은 예술을 대하는 대중의 태도를 변화시켰다. 이를테면 피카소와 같은 회화에 대해서 가졌던 보수적 태도가 채플린과 같은 영화에 대해 갖는 진보적 태도로 바뀌어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진보적 태도의 특징이 있다면 그것은 바라보고 체험하는 데 대한 즐거움이 전문적인 비평가의 태도와 긴밀하게 서로 연결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연결은 매우 중요한 사회적 의미를 갖는다. 다시 말해 어떤 예술형식의 사회적 중요성이 줄어들면 들수록 수용자의 비평적(批評的) 태도와 감상적(鑑賞的) 태도는 점점 더 분리된다. (이러한 면은 회화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관습적인 것이 아무런 비판 없이 향수된다면, 새로운 것은 혐오감을 가지고 비판되어진다. 그러나 영화관에서는 관중의 비판적 태도와 감상적 태도는 일치한다. (220-221)

벤야민은 전통적 예술의 대표로 회화를, 기술복제시대 예술의 대표로 영화를 들면서, 이 두 예술장르를 수용하는 대중의 태도가 다르다고 말한다. 쉽게 말해, 새로운 기법의 회화를 보면서 비평자들이 아무리 칭찬을 해도 대중들은 그것을 혐오스럽게 받아들이는 보수적 태도를 갖는데 반해, 영화의 경우에는 비평하는 것과 감상하는 것이 일치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우리가 유명한 화가의 전시회에 가서 작품을 감상할 때 느끼는 당혹감을 생각해 보자. 도무지 제목이 없이는 짐작할 수 없는 내용과 기법으로 치장된 작품들을 보면서, 우리는 겉으로는 별 말을 못하지만 속으로는 황당해한다. 비평적 태도와 감상적 태도가 분리되는 것이다. 반면, 영화의 경우는, 물론 차이는 있겠지만, 그 분리의 정도가 매우 미미하다. 대중은 집단적으로 영화를 감상하면서 동시에 비평한다. 맘에 들면 박수를 치고, 맘에 들지 않으면 욕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즉, 비평적 태도와 감상적 태도가 일치하는 것이다. 영화관의 관중은 배우를 판단할 때 스크린에 드러난 그대로 판단하기 때문에 "비평가의 태도"(212)를 취할 수 있게 되었다는 벤야민의 말도 이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다.

 

회화가 차분히 작품을 관조함으로써 감정이입을 시켜야 어떤 감동을 얻을 수 있는 반면, 영화는 끊임없는 영상 이미지의 편집이 이루어짐으로써 차분한 관조가 불가능하다. 사람들은 단속(斷續)적인 영상 이미지를 보면서 끊임없이 머리 속에서 스토리를 이어 맞춰야 하고, 따라서 사람들은 작품 속에 몰입한다기 보다 깨어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요컨대, "예술작품 앞에서 정신집중하는 사람은 그 작품 속으로 들어간다. 이에 반해 정신이 산만한 대중은 예술작품이 자신들 속으로 빠져들어오게끔 한다."(227) 가령, 회화를 볼 때는 보는 관객이 그 속에 자신을 일치시켜야만 한다. 이해할 수 없는 그림이지만, 제목을 보고 스스로 자신을 이해시켜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영화를 보는 관객은 재미가 없고 이해가 안되면 극장을 찾지 않기 때문에, 영화는 대중들의 기호에 맞추어 제작되는 것이다.

 

벤야민은 이 논문을 통해 영화라는 새로운 매체가 대중들의 지각방식과 수용방식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고 파악한다. 경제적 하부구조의 변화가 상부구조를 변화시킨다는 맑스의 유물론을 받아들여서, 벤야민 또한 영화라는 기술적 하부구조의 변화가 대중들의 의식과 행동이라는 상부구조를 변화시킨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또, 전통적 예술작품을 마법과 종교와 신비의 영역에 놓고, 근대적 예술작품을 탈신비의 영역에 놓음으로써 벤야민은 기술복제 예술작품에 시대적 정당성을 부여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술작품을 수용하는 '대중'의 위치 및 그들의 가능성을 낙관함으로써 예술의 미래는 대중의 손에 있다는 자신의 생각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벤야민은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이 대중운동과 변혁을 가능케 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까지 나아간다.

 

3. 영화는 변혁에 기여했는가?

 

이런 질문에서부터 시작해보자. 벤야민이 그토록 기대를 걸었던 영화라는 매체가 과연 '변혁'에 기여했는가? 여기서 말하는 '변혁'은 물론 '정치적 변혁'이다. 벤야민이 "예술의 정치화"라는 테제를 말했을 때의 바로 그 '정치'말이다. 나는 이 물음에 매우 단호하게 '아니오'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영화는 정치의 변화를 반영하기는 했을지언정, 벤야민이 예상하듯 대중의 지각양식을 변화시킴으로써 변혁을 이끌어내는 역할을 하지는 못했다.

 

벤야민 당시의 영화의 양상 세 가지를 들어보자. 세기말에 발명되어 20세기초에 급격하게 성장한 영화는 이미 '제7의 예술'로 불리며 세를 떨치기 시작한다. 벤야민도 파악했다시피 영화는 대중을 조직하는 데 있어 그 전의 예술작품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영향력을 획득했고, 이것을 가장 처음 정치적으로 이용한 것이 나치였다. 나치는 자신들의 집회모습과 히틀러의 대중연설 장면을 다큐멘터리 영화로 만들었고, 나아가 대중집회 자체를 한편의 영화처럼 연출했다. 벤야민이 '정치의 예술화'라고 표현했던 이러한 나치의 영화활용 기법은 당시의 독일 대중들의 의식을 사로잡았으며, 파시즘을 강화하는 데 매우 중요한 도구로 작용했었다. 아울러, 역사상 최초의 공산주의 국가인 당시의 소련에서도 영화는 중요한 정치적 도구였다. 볼셰비키 혁명의 성공 이후 소련에서는 모든 예술장르가 다 혁명에 봉사해야만 했다. 전제적 억압과 민중들의 분노, 분노의 폭발, 새로운 체제의 등장이라는 '변증법적' 과정이 영화의 주된 모티브가 되었다. 가령, 영화사 최고의 걸작 중 하나로 손꼽히는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의 「전함 포템킨」(1925)은 이러한 변증법을 영화기술로 접목시켜 '몽타쥬 기법'을 탄생시켰다. '지도자 중심'의 나치 파시즘과는 달리 '민중 중심'적이긴 하지만, 그러나 '대중동원'이라는 본질은 같았던 것이 당시의 소련 영화였다. 소련 영화감독 라시스와의 만남과 그녀를 통해 알게된 유물론과 브레히트를 생각해 보면, 벤야민이 당시 소련의 영화와 그 속에 담긴 '민중중심' 모티브에 열광했을 것이라는 짐작이 허황된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독일의 파시즘적 분위기에 절망하고 있던 벤야민으로서는 소련과 소련의 민중주의 영화가 앞으로 파시즘에 대항하는 공산주의적 '예술의 정치화'의 청사진처럼 보이지 않았을까?

 

하지만, 벤야민은 마지막 세 번째 영화의 양상을 그리 대단하게 보지 않았다. 바로, 헐리우드 상업영화다. 대략 1910년부터 60년대에 이르기까지 헐리우드 영화는 소위 스튜디오 시스템, 스타 시스템, 장르 시스템을 통해 급속하게 성장해갔고, 그 성장의 동력은 바로 영화를 철저히 상품과 오락으로 바라보는 경제적 관점이었다. 벤야민이 이 글을 쓸 당시인 30년대까지만 해도 유럽에서 영화는 하나의 '예술'로 받아들여졌지만, 미국에서는 '산업'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 미국의 영화가 60년대 이후 세계시장을 완전히 장악해버렸다. 물론, 벤야민도 헐리우드의 상업주의 영화를 비판적 시각으로 보고 있긴 하다.

서구에서는 영화의 자본주의적 착취로 인하여 자기자신을 재현 연출해 보려는 현대인간의 정당한 요구는 외면 내지 무시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 아래에서 서구의 영화산업은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스펙타클과 아리숭한 상상력을 통하여 대중의 참여를 부채질하는 데만 관심을 쏟고 있을 따름이다. (218)

후에 프랑크푸르트 학파에게 받아들여진 것으로 보이는 이런 비판적 생각들은, 그러나, 여기서만 그친다. 벤야민은 (러시아가 아닌) 서구의 영화에 대한 비판보다는 영화일반에 대한 가치평가와 (러시아식) 영화에 대한 희망에 더 집착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앞의 물음으로 돌아오자. 영화는 벤야민의 생각처럼 변혁에 기여하지 못했다. 독일의 나치는 45년에 몰락했고, 소련은 2차 대전 이후 급속히 파쇼화되어 가면서, 영화라는 매체의 헤게모니는 헐리우드로 넘어가 버렸다. 마치 파시즘의 영화가 대중의 혼을 빼놓아서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에 이용하는 역할을 했듯, 헐리우드의 영화는 현란한 스펙타클과 스타시스템을 통해 자신들의 경제적 목적에 대중을 이용했다. 그 과정에서 벤야민이 기대했던 영화의 '비판적 거리'라든가 대중의 '깨어있는 태도'는 서서히 사라져버린 것이다.

 

4. 새로운 '아우라'와 새로운 '신비'로서의 영화

 

벤야민은 전통적 예술작품과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의 중요한 차이를 '아우라', 혹은 '신비'적인 요소의 유무에 두었다. 영화와 같은 매체에서 대중들은 탈신비화되고, 비판적 거리를 유지함으로써 전통적인 예술의 마법적/종교적 가치와 결별을 선언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위에서 살펴보았듯, 벤야민 이후 헐리우드 영화의 급속한 발달로 대중은, 역설적이게도, 오히려 영화관이라는 곳에서 그 전보다 더한 '신비'와 '아우라'를 체험했던 것이다. 요컨대, 벤야민이 영화에 걸었던 기대는 그 이후 곧바로, 그리고 아마 벤야민 당시에도 이미, 물거품이 되었던 것이 아닐까.

 

헐리우드 영화를 '현대적 신화'로 파악했던 롤랑 바르트의 글을 한 편만 읽어보라. 영화는 벤야민의 관점과는 반대로 더 '마법적'이며 '종교적'인 역할을 하고 있지 않은가! 관객은 마치 고대로마의 카타콤처럼 깜깜한 영화관 속으로 들어간다. 마치 제단이 하나이듯, 스크린도 하나이다. 깜깜한 영화관 속에서 밝은 곳은 오직 스크린뿐. 관객은 비판적 거리를 둘 수 있기 보다 오히려 감독과 제작자의 의도 속에 급속히 몰입하여, 철저히 계산된 스토리에 빠져들어 울고 웃지 않는가. 그리하여, 영화의 스타는 종교의 신처럼 숭배되고, 그 스타의 일거수 일투족은 "가까우면서도 먼" 아우라를 획득하게 되는 것 아닌가. 그리고 그 아우라는 끊임없이 복제되기 때문에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 때문에 더욱 확장되는 것 아닌가. 그래서, 전통예술이 주었던 아우라와 신비적 분위기를 능가하는 새로운 아우라를 대중들에게 전달하는 것 아닌가.

영화이론과 문화연구가 체계를 잡아가기 시작한 이후, 헐리우드의 영화들은 하나의 '현대적 신화'로써 비판되어 왔으며, 그것들이 대중들에게 미치는 절대적이며 신비적인 영향들 또한 지적되어 왔다. 벤야민의 예상과는 달리, 영화는 파시즘에 대항하는 대중운동의 도구로서 역할을 한 것이 아니라, 실제적 파시즘이 사라진 세상에서 대중들을 현실에 만족하게 하고, 현실을 넘어서기 보다 환타지에 젖게 하는 새로운 문화적 파시즘의 도구로 이용되어 왔던 것이다.

 

5. 예술에서 매체로

 

다시 벤야민으로 돌아가서 질문을 던져보자. 오늘날에도 여전히 전통예술과 기술복제예술의 구분이 유효한가? 물론, '기술복제가능성'을 기준으로 했을 때, 벤야민의 구분은 여전히 유효하다. 하지만, 상고 출신이 대통령이 될 수 있는 시대, 자신이 '귀족'이 아닌 '서민'이라고 외쳐야 대통령이 될 수 있는 시대에, 우리는 모두 대중이다. 오늘날, 여전히 회화와 조각 같은 예술장르는 대중이 접근하기 힘들긴 하지만, 그 경계가 예전만큼 높지는 않다. 반면, 영화와 같은 대중예술장르는 빈부의 격차를 막론하고 누구나 즐기는 매체가 되었다. 즉, 소수냐 대중이냐의 의미가 사라져버린 이 시대에, 전통예술이 아닌 대중적 예술이 어떤 획기적 도구가 되기는 쉽지 않다. 다시 말해, 기술복제 예술이 가지는 변혁의 가능성이 벤야민이 생각했던 것만큼 대단하지 않은 시대라는 것이다. 아니, 이제 '예술'이 가지는 영향력은 이미 사라져버렸다. 영화의 초창기에 영화는 '예술'이었고, 지금도 영화는 '예술'의 한 분야로 인정받고 있지만, 영화를 보는 대중은 그 누구도 자신이 '예술'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지 않다. 극장에서 보는 그 '영화'가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영화'와 같고, 비디오 테잎으로 빌려보는 '영화'와도 같은 상황에서 누가 그것을 '예술'로 받아들이겠는가.

 

여기에서, 벤야민이 사진과 영화에 한정시켰던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의 범위를 넓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이 아니라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으로 중심을 옮겨 보면, 오히려 사진과 영화 이후 발명된 기술복제 '매체들'이 오늘날 대중의 삶에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예컨대, TV와 인터넷이라는 두 가지 매체만 놓고 보아도, 이 두 매체가 '예술작품'에 비해 대중들에 끼치는 영향력이 훨씬 크지 않은가. 바로 이 지점에서 벤야민의 미학을 하나의 '매체미학'으로 받아들여서, 매체/미디어 일반에 대한 분석으로 그 외연을 확장시켜 볼 수 있지 않을까.

 

다시 말해, 벤야민이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다룬 전통예술과 기술복제예술의 카테고리를 단순히 '예술'의 차원에서만 읽지 않고, 더 본질적인 차원, 즉 대중에게 미치는 영향력의 측면이라든가, '지각의 변화' 측면에서 접근한다면, 사진과 영화에서 분석을 그치기보다 더 나아가 오늘날 대중을 움직이고 대중의 지각에 중대한 변화를 미치고 있는 매체/미디어 일반에 대한 분석으로 나아가는 게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6. TV와 인터넷의 양면성

 

미디어 일반에 대한 분석으로 벤야민의 논문을 확장해서 다시 읽을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TV다. 아마 벤야민이 조금만 더 오래 살았더라면, (아도르노나 마르쿠제처럼) 분명 TV의 사회적 영향에 대한 날카로운 논문을 썼을 것이다. 이미 TV는 대중들의 지각을 바꿔놓았다. 영화를 통해 집단적 수용을 하게 되고, 그것이 대중운동과 밀접한 영향을 가진다(202)는 벤야민의 가설은 이제 수정되어야만 할 것이다. TV 등장 이후의 대중들은 영화와는 다른 차원의 집단적 수용을 경험했고, 또 다른 차원의 대중운동을 경험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두 가지 다른 논의가 가능할 것이다. 대중들이 더욱 집단적이 되고 결집력이 높아졌든지, 아니면 더욱 파편화되고 결집력이 낮아졌든지 말이다. 분명한 것은, TV가 오늘날 대중들에게 영화를 능가하는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이다.

 

TV와 함께 반드시 언급해야 하는 것은 인터넷이다. 통신기술의 발달로 인해 새롭게 탄생했다는 점에서 인터넷은 TV와 같지만, TV가 일방향적 미디어인데 비해 인터넷은 쌍방향적, 아니 '다(多)방향적'이라는 점에서 TV와 다르다. 그리고, 그 영향력 또한 TV를 능가하고 있는 추세이다. 얼마 전 대규모로 전개된 세계 각 도시에서의 반세계화 시위와 최근 한국사회를 뜨겁게 달군 안티조선운동, 노사모, 붉은악마 등의 자발적 단체들은 모두 인터넷에서 탄생하고 성장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TV와 인터넷, 이 두 매체는 모두 오늘날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미디어이고, 모두 '복제시대'의 산물이다. 하지만, 그 내부를 들여다보면 커다란 하나의 차이점이 있다. 바로 접근성(accessibility)의 문제이다. TV는 접근하기가 쉽지 않다. 대중은 TV를 볼 수만 있지, 자신이 원한다고 해서 그 TV에 적극적으로, 자유롭게 참여할 수는 없다. 그런 점에서, TV는 일방통행로이다. 반면, 인터넷은 접속되어 있는 사용자(user)들이 모두 그물처럼 연결되어 있는(world wide web) 매체이고, 누구나 의견제시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접근이 용이하고 열려있는 미디어다. 벤야민이 말했던 사진과 영화가 접근성에 있어서 일방적이라는 점에서 TV와 더 가깝다면, 인터넷은 벤야민으로서는 꿈꿔보지 못한 새로운 미디어일 것이다.

 

이 두 매체 모두 벤야민이 보기에는 아주 희망적인 미디어일 것이다. 이들은 '초'집단적인 수용을 가능케 하고, 신비적인 아우라와는 동떨어져 있으며, 대중의 변화도 적극적으로 이루어낼 수 있는 영향력 있는 미디어다. 그래서 TV와 인터넷은 벤야민에 의해서 영화에 뒤이어 새로운 생산력의 변화가 낳은 시대의 산물로서 칭송되었을 것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기본적으로 이미지가 중심이 되는 TV라는 매체는 바로 그 이미지를 통해서 대중을 조작할 능력이 충분하다. 이미지는 논리가 아니다. 이미지는 인식하기 이전에 이미 시(視)지각을 통해 우리 안으로 들어온다. 그래서 거기에 대한 설명이 없이도 이미지는 우리에게 어떤 상으로 맺혀있는 것이다. 거기에다 설명까지 가미되면, 그 이미지는 설명에 맞춰 변형되고, 나아가 조작 가능해진다. 92년 걸프전 당시 CNN 뉴스를 통해 방영되던 토마호크 미사일과 불타는 목표물의 이미지를 기억하는가. CNN을 보는 사람들의 머리 속에는 깜깜한 밤하늘을 가르는 미사일의 불꽃과 불타는 이라크의 목표물만이 인상깊게 기억될 뿐이지, 그 목표물 속에서 죽어간 병사들과 민간인들은 이미 사라지고 없는 것이다. 이렇게 뉴스의 이미지 속에서 전쟁의 비인간성은 사라지고, 카메라 렌즈에 의해 취사선택된 화면, 그리고 거기에 맞춰서 애국심을 고취하는 기자의 멘트만이 살아남는다. 그리고, 이라크의 TV에서는 그 반대가 되었을 것이다. 2001년 9.11 테러 장면도 마찬가지 분석이 가능하다. 반복되는 무역센터 붕괴 장면과 희생자들의 아비규환 이미지 속에서 남는 것은 잔인한 테러리스트에 대한 분노 뿐이고, 테러를 만들어낸 국제정치적 상황은 실종되고 없다. 이것을 우리는 TV의 이데올로기적 기능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또, 인터넷은 어떤가? 인터넷은 무조건 민주적인 매체일까? 그렇지만은 않다. '인터넷 사이트에는 누구나 접속할 수 있다'는 것도 사실은 허황된 신화에 불과하다. 그 말은 '인터넷 사이트에는 서버를 관리하는 사람에 의해 접속이 허용된 사람만 누구나 접속할 수 있다'는 문구로 바뀌어야 한다. 예컨대, 중앙대학교 홈페이지 게시판에 들어가서 글을 읽고 쓰면서 소통할 수 있는 사람은, 중앙대학교 학생과 교직원으로서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부여받은 사람들 뿐 이다. 또, 인터넷 사이트에 회원가입을 할 경우 요구되는 필수사항인 '주민등록번호'의 경우에도 문제가 있다. 주민등록번호를 반대하여 그 번호를 사용하지 않으려는 사람이나, 재일동포 혹은 재미동포이기 때문에 주민등록번호가 없는 사람은 사이트에 가입할 수가 없고 정보를 찾을 수도 없는 것이다. 또, 인터넷 사이트의 접속장소와 접속시간을 기업의 서버관리자가 조회할 수 있기 때문에, 기업에서 노동자들의 인터넷 사이트 접속을 체크한다고 공고를 내릴 경우에 노동자들은 인터넷 접속사이트 및 시간을 자발적으로 통제하게 된다.

 

요컨대, TV와 인터넷은 공히 기술복제 시대의 첨단에 있는 대표적인 대중매체라는 점에서 벤야민적인 희망의 대상이 될 수 있고, 실제로 대중의 결집을 이루어내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지만, 그 뒷면에는 각종 이데올로기 조작과 통제 관리되는 양상이 있는 것이다.

 

7. 벤야민의 단견: 매체의 양면성 간과

 

벤야민의 영화에 대한 희망이 그 이후에 철저하게 무너져 버린 것이 그가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헐리우드 영화의 성장 때문이었다는 내 추측, 그리고 영화 이후 등장한 영향력 있는 대중매체인 TV와 인터넷 또한 양면을 지니고 있다는 분석이 말해주는 것은 무엇인가. 벤야민의 분석이 날카로웠지만 단면적이었다는 것이다. 벤야민의 논문은 1936년 당시 발전하던 매체인 영화를 분석하면서 전통예술과의 단절점을 찾아내고, 특히 영화의 기법들을 회화 및 연극의 그것들과 비교하면서 영화의 탈신비성 및 대중성을 파악해낸 날카로운 감식안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그는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새로이 발명된 매체에서 너무 희망적인 면만을 보면서, 영화라는 매체가 자본에 의해 이용될 수 있으며 대중의 조작에 더없이 잘 사용될 수도 있음은 거의 눈치채지 못했다. 특히 러시아의 영화의 민중중심적 성향에 지나치게 감복한 나머지, 나치가 영화기법을 통해 대중집회를 연출한다거나(물론, 이 당시 벤야민은 파리 망명 시절이었기 때문에 그런 나치의 영화를 보지 못했을 수 있다.) 헐리우드에서 스튜디오-스타-장르의 삼박자 시스템이 바야흐로 등장하고 있는 현실을 정확히 짚어내지 못한 것이다.

 

연장선상에서, TV와 인터넷 매체를 분석한 결과를 보면, 역시 매체에는 양면성이 있음이 드러난다. TV와 인터넷은 대중의 소통 가능성을 한 단계 높인, 벤야민적 시각에서 보면 지극히 대중적이고 민주화된 매체이지만, 단지 그 이유 때문에 두 매체를 무조건 희망적으로 볼 수는 없는 것이다. TV는 지금껏 권력의 도구로 이데올로기적 여론조작의 기능이라든가 드라마와 쇼 등을 통한 현대적 신화 창출을 통해 대중을 탈정치화 시키는 기능들을 맡아온 것이 사실이고, 인터넷 또한 그 해방적 가능성의 이면에 인터넷의 컨텐츠와 접속장치들을 가진 기업과 관리자들에 의해 통제됨으로써 그 기능을 제대로 못하는 면이 있는 것이다.

 

8. 나오며: 다시 문제는 '권력관계'이다

 

이 논문에서 나는 발터 벤야민의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1936)이라는 논문을 분석하고, 벤야민 이후의 상황을 점검해 보았다. 벤야민은 20세기 초 영화의 등장을 보면서 그것이 전통예술과 다른 '기술복제'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으며, 그로 인해 영화가 과거와 달리 대중들의 접근을 매우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는 점을 파악해 냈다. 유물론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그는 이러한 현상들을 영화예술과 대중운동의 결합으로 연결시키려 한다. 그가 보기에 영화는 파시즘적인 '정치의 예술화'를 막아낼 공산주의적인 '예술의 정치화'의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벤야민의 통찰은 대단하지만, 그는 영화라는 '매체'에 집중한 나머지 영화라는 매체가 가진 다양한 가능성, 혹은 이면들에 대해서는 깊게 고찰하지 못했다. 당시의 나치 영화, 소련 영화, 헐리우드 영화라는 세 양상을 제대로 비교해서 분석했더라면, 아마도 파시즘의 '정치의 예술화'가 나치 영화를 통해 이미 실현되고 있음도 알았을 것이고, 헐리우드 영화의 상업주의적 잠재력이 얼마나 컸는지도 파악해냈을 텐데, 그는 소련 영화의 혁명성과 민중성이 마치 영화의 변함없는 본질인 것처럼 받아들인 것이다. 이러한 내 비판은 TV와 인터넷이라는 혁명적 매체의 이면을 잠깐만 들여다봐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매체' 자체가 아니라 매체를 둘러싸고 있는 '권력관계'이다. 벤야민이 영화라는 매체 자체의 성격만 분석하고, 특정 영화의 내용을 분석하지 않은 것은, 따라서 아주 큰 실수가 아닐 수 없다. 그 영화가 어떤 사회적 맥락 속에서 생산되었고, 그것이 영화 속에서 어떤 식으로 표현되었는지, 그런 표현 방식은 각국의 영화마다 어떻게 다른지, 그리고 그것을 일반화하여 분석할 수는 없는지에 대한 연구가 함께 되었어야 하는데, 그의 연구는 매체비평에서 끝나버린 것이다.

 

같은 이유로, 전통예술에 대한 그의 비판도 단면적인 구석이 많다. 시대가 흐르면 마법화되고 신비화된 종교적 의식의 산물인 회화와 연극 같은 전통예술도 사라지면서, 사진과 영화와 같은 근대적 예술형태에 자리를 내주어야 할 것처럼 그는 이분법적 구도로 둘을 갈랐다. 하지만, 연극과 회화는 여전히 살아남았다. 비록 대중적이지 못하다는 점에서 벤야민의 지적이 옳긴 하지만, 대중적 매체인 영화와 TV, 인터넷이 하지 못하는 급진적이며 근본적인 비판과 표현을 도맡는 것은 회화와 연극이다.

 

요컨대, 문제는 매체 자체가 아니라 매체를 둘러싼 사회경제적 환경과 권력관계임에도, 벤야민은 '매체'의 틀 안에서만 분석함으로써 다양한 측면의 논의들을 소홀히 했다. 비록, 그 논의들은 이후 비판이론가들과 문화연구가들에 의해 충분히 수행되어왔지만 말이다.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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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발터 벤야민, 반성완 편역,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민음사, 1983) ―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논문 번역의 이해에 도움.

- N.볼츠, 빌렘 반 라이엔, 『발터 벤야민: 예술, 종교, 역사철학(Walter Benjamin)』(김득룡 역, 서광사, 2000) ― 벤야민의 현대예술론에 대한 이해에 도움. 번역 안 좋음.

- 차봉희, 『비판미학』(문학과지성사, 1990) ― 벤야민의 '아우라'개념 및 미학이론 전반에 대한 이해.

-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영화학과 엮음, 한상준 외, 『영화에 대한 13가지 테마』(큰사람, 1998) ― '1장-3장'에서 영화의 역사에 대해 설명. 쉽고 잘 쓰여진 책.

- 존 스토리, 『문화연구와 문화이론(An Introductory Guide to Cultural Theory and Popular Culture)』(박모 역, 현실문화연구, 1999) ― '5장. 마르크스주의'에서 벤야민과 비판이론의 연관성을 설명. 잘 쓰여진 책.

- 존 레흐트, 『문화연구를 위한 현대사상가 50(Fifty Key Contemporary Thinkers)』(곽동훈 김시무 역, 현실문화연구, 1996) ― '41장. 벤야민' 편을 참고하고 그의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논문에 대해 (직접적 관련은 없지만) 비판적 착상을 얻음.

- 황광록, 「발터 벤야민의 비판미학에 대하여: 대중예술의 희망적 가능성에 대한 소고」(중앙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석사학위논문, 1997) ― 벤야민의 미학이론 전반을 평이한 문체로 서술.

- 피에르 부르디외, 『텔레비전에 대하여(Sur La Television)』(현택수역, 동문선, 1998) ― 저널리즘의 '장'의 개념에 대한 이해 및 권력관계에 대한 이해.

- 발터 벤야민, 한나 아렌트 편, 『문예비평과 이론(Illuminations)』(이태동 역, 문예출판사, 1987) ― 벤야민에 대한 한나 아렌트의 평가 때문에 봤으나, 별 도움 안됨. 번역 좋지 않음. 

[출처] 매체냐,권력이냐..|작성자 아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