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박인환의 시를 위한 몇 개의 회상/곽재구 1 지금 그 사람의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과거는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내 서늘한 가슴에 있건만 --------------<歲月이 가면>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종각 전철역을 빠져 나오자 쏟아지는 네온 불빛. 무수한 사람들의 파도가 인도를 가득 메우고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었다. 노점상들이 집어등을 켠 어선들처럼 늘어서 있었다. 오촉이나 십촉쯤 돼 보이는 알전구 불빛. 어디선가 귀에 익은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서른쯤 되었을까. 야전 잠바 형식의 윗옷에 잘 기른 구레나룻. 까닭 모를 친밀감이 손수레의 주인에게서 일어나고 있었다. 누가 노래한 거죠? 집어등 곁으로 다가서며 물었다. 박인환을 좋아하세요? 대답 대신 그가 되물었다. 사강의 흉내를 내고 있었지만 나는 그 되물음을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2 스무 살의 박인환은 아직 무명이었다. 관립 평양의학전문학교 이학년. 바로 그때 해방이 왔다. 그는 공부를 걷어치우고 곧장 서울로 왔다. 해방의 감격이 스무 살의 젊은 나이를 그대로 놓아 주지 않았다. 격동의 한복판에 몸을 섞고자 했다. 서울에 나타난 그는 종로 한 켠에 서점을 차렸다. 아버지와 이모에게서 빌린 오만 원이 자본금, 적지 않은 돈이었다. 마리서사. 마리는 재스민꽃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재스민. 인도, 이란 원산. 늘 푸른 떨기나무(灌木). 다섯 편으로 갈라지는 통꽃이 취산 꽃차례로 피며 꽃 향기가 아름답다. 잎은 식용(茶)으로 쓰인다. 이 년 전, 둔황 여행을 할 때 나는 그곳의 천년 불교 문화와 함께 재스만차의 향기에 완전히 넋을 잃었었다. 사막의 동굴 속에 간직된 불교 문화는 그 자체가 이미 신성이었다. 인간의 힘이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어떤 난해한 불가사의가 벽화와 소상들마다 깃들여 있었다. 황홀한 아픔이여. 이곳에 넋을 풀고 간 영혼들의 무수한 꽃송이여, 천재여. 나는 둔황의 모래 위에 그렇게 적었다. 그러나 신성에도 아쉬움은 깃들여 있었다. 둔황 예술의 향기는 기실 실존이 아닌 관념의 성격이 강한 것이었다. 나는 그 벽화들이 진실로 한 송이의 들꽃 향기와 천상의 꽃 내음들을 그대로 쏟아 주기를 바랐었다. 존재할 것 같으면서도 존재하지 않는 꽃 향기. 열리지 않는 미륵의 세상. 그 아쉬움 속에서 재스민차를 마셨다. 먼 지평으로 몇 마리의 낙타가 걸어갔다. 딱딱하게 굳은 빵이 차 향기에 풀어져 나갔다. 니하오. 보이는 모든 풍경들에서 향내가 났다. 박인환이 재스민 향기를 알았을까? 김수영은 그의 글 <마리서사>에서 ‘박일영이라는 이름의 초현실주의 화가가 시집 <<군함마리>>에서 따 준 것’이라 마리서사의 내력을 밝히고 있다. 일본의 모더니즘 시인인 안자이 후유에(安船衛)의 첫 시집 <<군함마리>>에는 같은 제목의 산문시가 실려 있다. 그 첫머리는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마리’라 불리는 군함이 북지나 달 밝은 정박장에 닻을 내리고 있다. 암염 모양 조용히 또 희게. 나는 함장이며, 대위였다. 말쑥한 기린과 같은 자태는, 나 스스로 너무나 아름다워 마치 여인처럼 느껴졌다. 나는 함장실의 모로코 가죽의 터번에 누워 주야 아편을 마시고 있었다. 이러한 내 옆에서는 순백한 한 마리의 코리종 개가 나를 지켜봤다. 나는 언제부턴가 거기 동작의 자유조차 상실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감금돼 있었다. (김규동 역) 바야흐로 대전의 기운이 성숙하고 있던 때였다. 함장은 아편 중독이 되어 있고 그는 모든 현실 속에서 감금돼 있다. 그의 의지가 반영될 세상의 허튼 구석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전쟁이 끝나고 해방이 되었을 때 <군함마리>의 선장에 대한 추억은 박인환과 그의 동무들, 이른바 후기 모더니즘 운동을 펼치고자 했던 모든 친구들에게 각별한 인상을 심어 줄 수 있었으리라는 것이 김수영 글의 의미였다. 재스민꽃 향기에 관한 언급은 없다. 그러나 해방이 된 서울의 거리에는 분명 새로 건립될 나라와 그 비전에 대한 새로운 향기가 넘실대고 있었다. 박인환은 이 거리에서 자기의 삶과 예술을 새로이 불태우고자 했다. 마리서사는 스무 살의 박인환이 해방된 삶을 향하여 고개를 내밀고자 했던 이른바 전초 기지였다. 당연히 이 전초 기지에는 당대의 전위, 시인▪소설가▪화가▪언론인, 혹은 그들의 어린 싹들이 모여들었다. 김광균, 김규동, 김기림, 이한직, 이시우, 김수영, 최재덕(화가) ▪▪▪▪. 기타 이름을 알 수 없는 뭇 전위들이 무시로 서점을 출입하였다. 나의 시간에 스코올과 같은 슬픔이 있다 붉은 지붕 밑으로 향수가 光線을 따라가고 한없이 아름다운 계절이 運河의 물결에 씻겨 갔다. 아무 말도 하지말고 지나간 날의 童話를 운율에 맞춰 거리에 花液을 뿌리자 따뜻한 풀잎은 젊은 너의 탄력같이 밤을 지구 밖으로 끌고 간다. -----<거리>부분 스물한 살. 박인환의 데뷔 작인 <거리>에는 그때의 환희가 잘 나타나 있다. 한없이 아름다운 계절이 운하의 물결처럼 씻겨 오고, 거리에는 화액이 넘쳐 흐른다. 어두웠던 지난 시절은 차리리 동화처럼 아름답고, 따뜻한 풀잎은 젊은 탄력으로 밤을 지구 밖으로 끌고 간다. 3 거리에는 생명의 힘이 넘쳐 흐른다. 이 점, 1946년이나 1992년이나 별반 다름이 없다. 다른 점이 있다면 전자는 상대적으로 낡은 거리 풍경에 비하여 사람들의 어깨가 한없이 넓고 푸르게 부풀어 있다는 점일 것이고, 후자는 그야말로 은성해 보이는 거리 풍경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정도일 것이다. 확실히 그렇다. 거리 풍경만으로만 치자면 1992년의 그것이 1946년의 그것을 압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람들의 어깨 넓이까지도? 갑자기 소변이 마려웠다. 칠 년 전 바로 이곳에 자리한 민음사에서 시집을 낸 적이 있었다. 황지우가 주간으로 있던 출판사였다. 김정환, 안도현, 황지우 그리고 나, 이렇게 넷이 한꺼번에 시집을 내게 되었다. 책이 나오던 날 우리는 함께 모여 술을 마셨다. 이차는 춤집이었다. 민음사 바로 곁에 ‘미스터 리’라는 디스코테크가 있었다. 스무 살 안팎의 아주 젊은 친구들이 드나드는 곳이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땀과 살과 술을 함께 비볐다. 맥주를 마시면 항용 그렇듯이 화장실 출입이 잦아야 했다. 두 번째 화장실에 들렀을 때 자정이 넘고 있었다. 방사를 하던 나는 눈앞의 어떤 그림 하나에 시선을 멈추었다. 빨간 고추 그림이었다. 그것이 내가 처음 본 콘돔 자동판매기였다. 이렇게 공공연히▪▪▪▪? 일을 마치고도 한동안 지퍼를 올리지 못했다. 그때였다. 한 여자애가 대뜸 내 곁으로 다가와 자판기에 동전을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손잡이를 달칵. 여자애는 내가 보는 앞에서 작은 종이 포장을 뜯었다. “아저씨 이거 쓰실래요? 난 하나면 돼요.” 난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얼른 알 수 없었다. 여자애는 씩 웃고 있었다. 여자애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순간 알 수 있었다. 함께 갈 수 있다는 뜻이었다. 눈이 참 예쁜데▪▪▪▪. 정말 예뻐. 나는 그 애의 어깨를 두번 두드려 주고 화장실을 나왔다. 춤집의 화장실이 아니었더라면, 대학의 캠퍼스나 클래식 음악이 번지는 고상한—진실로 고상함의 의미가 기실 무엇인가—찻집쯤 되었더라면 순애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었을 예쁜 눈이었다. 그 애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미스터 리의 화장실에서. 그 애의 눈이 그곳 밖에서 그보다 더 아름다울 수 있을까. 나는 헤엄치듯 거리를 헤쳐 나왔다. 전화 부스를 찾아 전화를 넣었다. 나해철과 김사인에게. 김사인과는 인사동의 ‘평화만들기’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는 한동안 박노해와의 어떤 관련성 때문으로 잠수함을 타야만 했다. 사람이 사람과 세상을 사랑하고 아파한 때문으로 박해를 받는 시절은 아름답다. 삶의 양대 본질. 절망과 희망 곁에서 해일처럼 밀려오는 그리움과 슬픔, 분노와 억압의 감정을 고스란히 경험할 수 있으므로. 인간이, 인간성이 무엇인지 뼈 끝으로 찍어 바르는 눈물을 경험할 수 있는 절박한 시절이므로. 한 사내 걸어간다 후미진 골목 뒷모습 서거프다 하루 세 끼니 피 뜨거운 나이에 처자식 입 속에 밥을 넣기 위하여 일해야 하는 것은 외로운 일 몸 팔아야 하는 것은 막막한 일 그 아내 자다깨다 기다리고 있으리 차소리도 흉흉한 두시 고개 들고 살아내기 어찌 이리 고달퍼 비칠비칠 쓰레기통 곁에 소변을 보고 한 사내가 걸어간다 어둠 속으로 구겨진 바바리 끝엔 고추장 자욱 ---<한 사내> 전문 김사인이 잠수함을 타던 시절에 썼음이 분명한 이 시 또한 삶에 대한 그리움이 뼈끝에 닿아 있다. ‘그 아내 자다깨다 기다리고 있으리’ ‘구겨진 바바리 끝엔 고추장 자욱’ 같은 시구는 특히 그렇다. 박인환의 시대는 고통과 억압이 사라진 환희와 감격의 시대였다. 이점 박인환의 예술을 위해 불행한 시절이었는지 모른다. 그에게는 싸워야 할 분명한 ‘적’이 없었다. 추구해야 할 대상은 있으되 증오와 적개심을 가질 수 없는 시대는 예술가를 위한 최적의 생존상태는 아닐지 모른다. 이상과 동경, 새로운 것에 대한 열망은 당연히 새로운 사조로의 출범과 이어졌다. 1948년, 박인환은 마리서사의 경영을 그만두고 동인지 <<신시론>> 창간에 나선다. 이른바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이라는 ‘오 인의 사화집’의 출간을 보게 되는 것이다. 오 인은 김경린, 임호권, 양병식, 김수영, 그리고 박인환이었다. 세상 사람들은 그들을 모더니즘 시인들이라 부르길 주저하지 않았고 그들 또한 기꺼이 그렇게 불리길 바랐다. 축복받을진저. 모든 새로운 것들이여, 그 탄생이여. 좌익과 우익으로 갈라진 문단이 피박 터져라 싸울 때 이들의 선택은 죄가 아니었다. 모든 인간은, 예술가는 근본적으로 새로운 세계에 대한 열망을 지니고 있었다. 이데올로기는 근원적인 것이 아닌 후천의 세계였다. 그런 점에서 이데올로기는 보다 순결하지 못한, 오염된 세계였다. 다섯 사람은 보다 새로운 세계, 보다 자유로운 세계의 존재를 꿈꾸었다. “어떻게 하여서든지 팔리지 않는 잡지와 책을 만들어야지.” 그들이 지닌 이데올로기의 극단적인 표현이 바로 이 말이었다. ‘팔리지 않는 책’을 지향한 그들의 작업은 이를 테면 김수영의 <공자의 생활난>이나 <아메리카 타임지>와 같은 난해시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기회와 油滴 그리고 능금 올바루 정신을 가다듬으면서 나는 수없이 길을 걸어왔다 그리하야 응결한 물이 떨어진다 바위를 문다 瓦斯의 정치가여 너는 활자처럼 고웁다 내가 옛날 아메리카에서 돌아오던 길 뱃전에 머리 대고 울던 것은 여인을 위해서가 아니다 -------<아메리카 타임지>부분 4 전쟁이 터졌다. 육이오. 전쟁은 여태껏 경험하지 못했던 극단적인 양분론을 강요했다. 삶과 죽음, 전방과 후방, 피난과 잠복, 기아와 포만▪▪▪▪. 세상은 한 순간에 바뀌었다. 전쟁은 새로운 세계에 대한 열망을 포연으로 가리웠다. 그리고 여태껏 생각하지 못한 지극히 형이하학적인 새로운 명분들을 삶의 한복판에 드리워 놓았다. 그것은 암시였다. 전쟁 후에 다가올 새로운 세계에 대한 그 암시는 일단 페허와 허무, 그리고 염세의 모습으로 다가왔다. 그들은 페허와 포연을 그리워했다. B29 의 폭격음과 선전 삐라와 전선의 사망자 명단이 기다랗게 실린 전우 신문을 보면서 그들의 삶의 뿌리가 박힌 ‘이곳’을 진저리치게 그리워했다. 그것은 역설이며 실존의 한 방편이었다. 박인환은 경향 신문사의 기자로서 전선에 종군했다. 점령된 서울에서 김수영이 선택할 방법이 의용군일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박인환의 선택 또한 하나였다. 이데올로기는 이제 예술보다 더 가까운 거리에 놓여 있었다. 敵을 쏘라 침략자 공산군을 사격해라 몸뚱어리가 벌집처럼 터지고 뻘건 피로 化할 때까지 자장가를 불러주신 어머니 어머니, 나를 중심으로 한 주변에 機銃을 掃射하시오 敵은 나를 둘러 쌌소. ------<신호탄> 부분 도저히 박인환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시편들이 그 전선에서 씌어졌다. 전쟁에서 제일 두려운 적은 밥과 공포일 것이다. 밥과 공포가 해결되는 한 편가름은 사실 무의미하다. ‘이쪽’에서 밥이 해결되는데 굳이 ‘저쪽’을 선망할 필요가 없는 것이 전쟁의 속성이다. ‘적’과 ‘비적’의 모호한 구분. 그것이 전쟁이 지닌 광기이며 살의이다. 밥을 위해서, 내가 살아 남기 위해서 상대방의 가슴에 기총을 소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전쟁은 전후에 확인된다는 고은의 말은 수정될 필요가 있다. 전쟁은 그 와중에서 가장 적나라한 모습을 드러낸다. 불가사의한 것은 언젠가 전쟁은 필히 끝난다는 것이다. 끝나지 않는 것은 전쟁이 아니다. 전쟁은 끝난다는 명제는 곧 인간은 살아남는다는 명제로 이어진다. 부산 피난 시절, 인간이 지닌 예술성과 자유 의지는 광복동 거리에 새로운 르네상스 시대를 만들어 놓았었나 보다. ‘밀다원’이나 ‘돌체’ 같은 다방들은 전쟁이 아닌 평상시보다 더 붐볐다. 거기 모여든 사람들은 늘 새로운 시와 음악과 회화를 꿈꾸었다. 본질이 지니는 향수. 전쟁이라는 극단전인 상황 속에서 예술이 지니는 아득한 그 향기를 그들은 더 그리워했다. 적막처럼 잔잔한 그러한 인생의 복판에 서서 여러 남녀와 군인과 또는 학생과 이처럼 쇠퇴한 철없는 시인이 불안이다 또는 황폐롭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야기한들 광막한 나와 그대들의 기나긴 종말의 노정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 없노라 오 난해한 세계 복잡한 생활 속에서 이처럼 알기 쉬운 몇 줄의 시와 말라빠진 나의 쓰디쓴 기억을 위하여 전쟁이나 사나운 애정을 잊고 넓고도 간혹 좁은 인간의 단상에 서서 내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야기할 때 우리는 서로 만난 것을 탓할 것인가 우리는 서로 헤어질 것을 원할 것인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야기할 때>부분 5 ‘평화만들기’안은 담배 연기가 자욱했다. 인사동의 한 작은 골목안에 자리한 대여섯 평 크기의 이 작은 카페는 까닭도 영문도 없이 젊은 시인이나 소설가, 화가, 영화평론가▪▪▪▪ 들의 단골 사랑방이 되어 있다. 정진규, 김주영, 황학주, 하재봉, 이문재, 박덕규, 김영승, 원희석, 박용재, 양선희, 황인숙, 김명리, 엄승화▪▪▪▪ 들 외에도 한두 번쯤 이곳을 거쳐 가지 않은 시인, 소설가들이 드물 터였다. ‘하가’ ’프리랜서’ ’연’ ’바람부는 섬’ ’시인학교’ ’신비한 무대의 춤’등 인사동 골목에 살구 씨처럼 박힌 많은 카페들 속에서도 유독 ‘평화만들기’에 글쟁이 손님이 많이 꾄다. 김사인은 아직 오지 않았다. 칸이 드리워진 작은 마룻방 안에 대여섯 명의 젊은 여자애들이 수선을 피우고 있었다. 실내에 가득 고인 담배 연기도 기실 이들이 모두 뿜어낸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검은 옷을 입고 있었다. 검은 옷을 입은 채 술잔들을 허공에 드리우고 있었다. 우연이었을까, 아니면 그들의 이름이 블랙에이프릴 정도쯤 되는 것일까. 그리고 보니 실내에 흐르는 음악이 시사적이다. 에이프릴 러브. 음악과 담배 연기와 허공에 뜬 술잔이 그들이 입은 검은 빛 옷과 왠지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木馬를 타고 떠난 淑女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木馬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傷心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셔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庭園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愛憎의 그림자를 버릴 때 木馬를 탄 사랑의 사람은 오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孤立을 피하여 시들어 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女流作家의 눈을 바라다 보아야 한다. ▪▪▪▪▪▪▪▪▪▪▪▪▪▪▪▪▪▪▪▪▪▪▪ 두 개의 바위 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거저 雜誌의 표지처럼 通俗하거늘 -----<木馬와 淑女> 부분 수복 후 인환은 서울로 돌아왔다. 서울은, 그 중에서도 명동은 예술가들의 새로운 낙원이 되었다. 모든 예술은 궁극적으로 일정 부분의 센티멘털리즘을 깔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더라도 전후 명동에 펼쳐진 예술의 그물, 예술적 향기는 진하고 또 진한 것이었다. 그들은 폐허 속에서 시와 소설과 음악과 회화와 장미와 무지개의 원형을 보았다. 보루지와 베니어 합판으로 붙인 임시 가옥에서 가생활을 시작하면서도 그들은 자유로웠고 행복했다. 고은의 표현을 빌리자면 ‘폐허에서는 모든 과거가 귀족화’되었다. ‘전차삯 이 원 오십 전, 칠면조 뼈다귀가 들어 있는 꿀꿀이죽 십 원, 그야말로 양키 쓰레기 돼지죽이 오 원’일 때 인환 또한 처음으로 미국이란 존재를 깨우치기 시작했다. 그에게 미국은 힘 있고 아름다운 나라였다. 전쟁은 그 사실을 구체적으로 확인시켜 주었다. 그는 럭키 스트라이크와 조니 워커와 진 피이즈를 사랑했다. 그것들은 다 미제였으며 미국의 향기를 뿜고 있는 것이었다. 그 당시 미국에게 패권주의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았다. 아니,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우리의 정치▪군사적 인식이 성숙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포연 속에 거대하게 드리운 미국의 큰 웃음을, 그 강철제 이빨을 이해하는 데는 삼십 년 이상의 세월이 필요한 터였다. 기록들에 의하면 서울로 돌아온 인환은 명동에 있는 술집의 술을 오 할 이상 마셔댔던 모양이다. 거의 모든 술자리에 박인환이 끼여 들었고, 다변 다혈질의 객담이 끼여 들었던 모양이다. <水馬와 淑女> <歲月이 가면> 두 편의 시들은 전후 서울, 전후 명동에서 출생신고를 마쳤다. 속마음의 그늘이 활딱 벗겨진 친구들과 술자리, 혹은 이제 연애의 감정이 막 무르익어 만나면 서로 귓볼이 붉어지는 연인들끼리의 차 한 잔에서 더욱 아름다워지는 이 시편들은 궁극적으로 전후 서울이라는 상황을 제거하고서는 이야기를 할 수 없다. 어떤 철모르는 삼류 평론가나 고지식한 강단 샌님들이 이 시를 퇴폐 혹은 허무주의의 온상으로만 바라보는 것은 전적으로 그들 삶의 이력의 가벼움, 또는 그들 영혼이 지닌 향기의 경박함으로 해석할 수 밖에 없다. 긴 죽음의 터널을 빠져 나와 아직 포연이 채 가시지 않은 야전 잠바를 벗어 놓고 ‘엉터리 화랑 위스키와 명성 소주’를 마셔 보지 않은 사람은, 그 전쟁에서 친구와 부모와 애인을 잃고 핏발 선 두눈이 세 달 네 달 가라앉지 않는 경험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기실 이 시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낙동강아 잘 있거라 우리는 전진한다’랄지 ‘올해는 일하는 해 모두 나서자 새 희망 새 아침의 태양이 떴다’ 라는 재건 체조풍의 문학만이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다. 시대성은 명분 이상의 명분을 축적할 때가 있다. 그 시대성이 오류로 판명되는 것은 전적으로 뒷날의 일일 뿐. 두 개의 바위 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아름답고 쓸쓸하지 아니한가. 아름다움과 쓸쓸함을 이야기하는 것이 꼭 오류이며 퇴폐인가. 우리들의 삶이, 역사가 그토록 진한 도덕성과 건강성으로 점철되어 있는가. 6 수다를 떨던 여자애들이 일어서기 시작한다. 이십삼 시가 넘어섰다. 김사인은 오지 않을 모양이다. 분명 집에서는 나왔다고 했는데▪▪▪▪▪. 도착할 시간은 이미 한 시간이 넘었다. 술 한잔 사 주시겠어요? 문득 등뒤에서 누군가 말을 걸어 왔다. 여자 목소리였다.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만약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더라면 얼마나 주책없는 일이 되었을까). 말을 받을 대상은 내가 아니었다. 내 앞자리에는 어느 곁에 한 사내가 앉아 있었다. 검은 물을 먹인 야전 잠바 형식의 옷을 걸친 사내였다. 1950년대나 지금이나 서울은 서울이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왕 바라거니 그들이 오늘 밤 예쁘고 진한 사랑의 꽃 한송이를 피우기 바라며, 머릿속에서는 전후 명동에 실존했다는 ‘검정옷을 입은 선의의 전후파 여자’들을 생각했다. ---이 선생님과 하룻밤 자고 싶어요. 여관비도 있어요. 저는 그 동안 대학 시절부터 이 선생님을 좋아했어요. 이 선생님이 좋아하시는 비발디의 <사계>를 저도 좋아하고 있어요. ---그러슴마? 곱수다, 고운 처녀십니다. 중섭은 술에 취했지만 아주 정중하게 부끄러워하면서 그녀와 한잔 더 마셨다. 그는 그녀의 강제나 다름없는 유혹에 따라 나섰다. 명동에는 하나 둘 여관이 번성해 가고 있을 때였다. --------高銀, <<이중섭>>부분 아름다워지시라. 시간이여. 정조는, 순결은, 사랑이 존재하는 한 영원히 존재하는 법. 나는 술집 ‘탑골’로 갈 것인가 아니면 ‘파고다극장’으로 향할 것인가 잠시 망설여야 했다. 지금 이 시간 ‘탑골’에 가면 강형철이나 김형수 패거리들을 만날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문학 운동을 하면서도 근본적으로 인간성에 바탕을 둔 그들의 삶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은 확실히 즐거운 일이다. 임진택 씨나 김용태, 송기원 형의 모습을 볼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나는 걸음을 파고다 극장 쪽으로 옮겼다. 그곳은 삼 년 전 기형도가 세상을 뜬 곳이다. 그의 나이 서른 살. 그가 죽기 전까지 아무도 그의 시 작업을 눈여겨보아 주지 않았다. 문화부 기자로서 그는 외롭게 시를 썼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빈 집> 전문 박인환은 서른한 살에 세상을 떴다. 과음에서 비롯된 심장마비였다. 죽기 일년 전, 그는 ‘남해호’라는 배의 사무장 자리를 얻어 꿈에 그리던 미국을 다녀왔다. ‘거대하고 아름다운’ 나라 미국에 대한 그의 구체적 인상이 어떠한 것이었는지 지금 그에게 물어 볼 방법이 없다. 그는 미국에서 텔레비전도 처음보고 칼로리가 없는 맥주도 마셔본다. 미스터 몬이라는 이름의 친구와 함께 차를 타고 에베레트의 일요일을 배회했다는 시 구절도 보인다 (<에베레트의 日曜日>). 파파 러브스 맘보. 그 당시 유행하던 미국 대중 가요의 한 구절도. 한국으로 들어오는 뱃머리에서 그는 다음과 같은 시 한 편을 남긴다. 나는 돌아가도 친구들에게 얘기할 것이 없고나 유리로 만든 인간의 묘지와 벽돌과 콘크리트 속에 있던 도시의 계곡에서 흐느껴 울었다는 것 외에는▪▪▪▪▪. 天使 처럼 나를 매혹시키는 허영의 네온 너에게는 眼球가 없고 정서가 없다. ▪▪▪▪▪▪▪▪▪▪▪ 바람에 날려온 먼지와 같이 이 異國의 땅에선 나는 하나의 微生物이다. 나는 극장으로 들어가는 계단을 밟았다. 습한 바람 한줄기가 어디선가 휙 불어왔다. “조지 거유인의 음악을 듣고 싶어. 그놈의 음악을 들으면 미칠 것 같아.” 어디선가 인환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 선생님, 집에는 아무도 없어요. 가정 방문 오지 마세요. 저희 집은 너무 멀어요.” 기형도의 어린 시절 목소리도 떠올랐다. 문득 나는 박인환과 기형도 사이에 어떤 은밀한 연결 고리가 존재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것이 무엇일까. 피곤하다. 차츰 생각하도록 하자. 나는 심야 프로의 좌석 위에 몸을 푹 주저앉혔다. 삼 년 전 3 월 어느 날의 새벽 기형도처럼. -----<<내가 사랑한 사람 내가 사랑한 세상>>, 한양출판, 1993 [출처] 박인환의 詩를 위한 몇개의 회상..|작성자 아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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