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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리의 일상/길위의 학교

[스크랩] 박경리공원 탐방기

by 拏俐♡나리 2010. 6. 25.

                                               박경리공원 탐방기

 

                               *탐방일자:2010. 1. 31일(일)

                               *탐방지   :경남통영시 미륵도소재 박경리공원

                               *동행      :나홀로

 

 

  대하소설 “토지”를 지으신 박경리선생의 묘지를 참배한 것은 참으로 우연이었습니다. 산림청에서 명산100산의 한 산으로 선정한 경남통영의 미륵산을 오르고자 통영시외버스터미널에서 택시를 타고 들머리인 금평마을로 가는 길에 “박경리공원” 안내판을 보고 공원을 들러 선생의 묘지를 참배했습니다. 명산100산 중 이제껏 오르지 못한 산은 홍도의 깃대봉과 통영의 미륵산 뿐이어서, 고교동창 넷이서 이틀 동안 성삼재-노고단-천왕봉-중산리를 잇는 지리산종주산행을 마치고 이참에 가까운 통영의 미륵산을 오르고자 저 혼자 진주에 남아 하룻밤을 묵었습니다. 아침 일찍 통영시로 가서 택시로 미륵산 입구로 향하다가 “박경리공원” 안내판을 보고 기사분에 부탁해 선생의 묘지를 먼저 탐방한  것입니다. 뒤이어 긴 시간의 종주산행이 예정되어 있어 15분가량 공원을 둘러본 후 더 머무르지 못하고 바로 금평마을로 이동했습니다. 선생께서 남기신 토지문학관이 원주에 있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향리인 통영에 묻히신 일은 여기 와서 처음 알았기에 미륵산을 산행하겠다면서도 이 산의 한 자락에 자리한 선생의 묘지를 참배할 계획을 잡지 못했습니다. 이렇게나마 선생의 묘지를 찾아 참배를 마치고나자 앞으로 선생의 소설을 마음 편히 읽을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박경리선생은 1926년 경남 통영에서 태어나시고 그 20년 후 진주여고를 졸업하셨습니다. 1955년 김동리선생의 추천으로 문단에 등단하셨는데 데뷔작은 <현대문학>에 실린 단편 "계산"이라 하니, 2008년 82세로 세상을 뜨시기까지 무려 53년이라는 긴 세월을 문학과 씨름하며 살아오신 것입니다. 선생의 대표작인 "토지" 또한 1969년에 현대문학에 연재를 시작해 1994년 문화일보에서 맺을 때까지 25년이라는 긴 세월을 필요로 했습니다. 선생에게 시인 이상처럼 요절한 작가라면 꿈도 꿀 수 없을 정도의 긴 호흡이 필요했던 것은 "토지" 같은 대작을 낳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제가 선생의 소설을 처음 접한 것은 1972년이었습니다. 저는 그해에 대학을 졸업하고 제 고향 파주의 한 고등학교로 발령을 받아 학생들에 화학을 가르쳤었습니다. 학교를 다닐 때는 돈이 궁해 꿈도 꾸지 못하다가 직장을 잡고 월급을 타면서 주머니에 여유가 생겨 정기구독을 신청한 월간지가 그해 10월 막 첫 호를 낸 <문학사상>이었습니다. 이어령교수의 권두언이 지가를 올린 이 문예지의 창간호에 선생의 대하소설 "토지"의 2부가 실린 것이 제가 선생과 만나게 된 인연이었습니다. 당시 저는 24세의 열혈청년으로 교육과 민주화에 관심을 집중했던 때라 이어령 주간의 권두언과 다른 작가들의 단편소설 몇 편만 겨우 읽었을 뿐 선생이 피땀 흘려 올리시는 "토지"를 계속 읽지 못했습니다. 소설의 배경이 낯설었고 당시는 선생이 다른 유명 여류작가들보다 덜 알려진 것이 제가 "토지"를 놓은 주 이유였을 것입니다. "토지"보다 일찍 발표된 “전장과 시장”이나 “김약국의 딸들” 모두 이름은 들어 알고 있었지만 이 두 작품 모두 장편소설이어서 선뜻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제가 선생의 대표작인 "토지"를 다시 읽기 시작한 것은 그 24년 후인 1996년의 일입니다. 그 때는 "토지"의 5부가 마지막까지 연재되었고 나남출판사에서 전22권으로 출판한 후였습니다. "토지"의 문학적가치가 널리 알려진데다 저 또한 어느새 지천명을 두 해 앞둔 48세가 되어 이 소설의 시간적 공간적 배경이 낯설지 않았는데 이 전집을 먼저 읽은 대학동창이 일독을 권해와 몇 권씩 빌려다 석 달 만에 다 읽었습니다. 단편소설이나 중편소설은 말할 것도 없고 장편소설 몇 권으로는 도저히 담아낼 수 없는 장대한 스케일의 이 소설을 이름하여 대하소설(大河小說)이라고들 했습니다. 대하소설 "토지"는 구한말로부터 해방을 맞을 때까지 이 나라 민중들이 토지를 중심으로 어떻게 살아왔고 무엇을 생각했나를 리얼하게 보여주었습니다. 선생은  25년이라는 긴 세월을 4만장 분량의 "토지"의 원고를 쓰는데 바치셨습니다. 선생의 노고가 결실되어 "토지"가 한국문학이 낳은 최고의 걸작으로 자리매김한 것은 선생은 물론 이 나라 현대문학의 영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선생의 "토지"는 그 후 드라마로 방영되었고 청소년용 "토지"가 따로 출간될 만큼 "토지"의 열기는 좀처럼 식지 않았습니다.

 

 

  "토지"로 맺어진 선생과의 인연이 그 이상 진전되지 못한 것은 선생의 "토지"가 빌미되어 제가 다른 작가들의 대하소설에 빠졌었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선생보다 먼저 제가 천착한 작가는 최인훈 선생과 이청준 선생이었습니다. 소설“광장”으로 대학생인 저를 매료시킨 최인훈 선생은 "화두"를 끝으로 이렇다 할 작품을 내놓지 않아 1990년대 후반 이후로는 선생의 작품을 더 이상 접하지 못했습니다. 이청준 선생은 재작년 세상을 뜨실 때까지 작품활동을 계속 하시어 고맙고 또 고마웠습니다. 월간지 <신동아>에 연재된 “당신들의 천국”을 읽고 꼭 한 번 소록도에 가보자고 별렀던 꿈은 3년 전 호남정맥 종주 때 이루어졌습니다. 이청준선생의 유작이자 유일한 대하소설인 “신화의 시대”가 완결되었다면 선생의 또 다른 면을 볼 수 있었을 텐데  매듭짓지 못한 채 돌아가셨습니다. 문학의 문외한인 제가 감히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제가 빠져들었던 이 두 분들은 우리 말로 어떠한 감정도 담아낼 수 있도록 우리 말글을 갈고 닦으셨다는 것입니다. "토지"를 읽고서 제가 자연스럽게 손에 쥔 대하소설은 조정래선생의 작품인 “태백산맥”과 “아리랑” 및 “한강”이었습니다. 처절하도록 아름다운 대하소설 “태백산맥”을 읽고 가슴이 뭉클하면서도 저도 모르게 공산주의자들의 소행을 아름답게 볼 까봐 두려웠습니다. 앞서 최인훈 선생이나 이청준 선생의 소설을 읽을 때는 모르고 지났던 가진 자에 대한 공분 같은 것이 느껴져 두렵기도 했습니다. 제가 조정래선생의 작품을 재독하지 않은 것은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선생의 소설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이 지나치게 미화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선생의 소설에 장미가 숨어 있다고 생각하는 저의 편견이 부끄럽기는 하지만 저로서는 선생의 작품은 항상 긴장해서 읽어야 했습니다. 똑 같이 민중을 역사를 움직이는 주체로 설정했으면서도(?) 박경리선생의 "토지"는 책속에 빠져들 수 있었는 데 조정래선생의 "태백산맥"은 작가와 한 판 붙어볼 각오로 읽어야해 상당히 부담스러웠습니다.

 

 

  강원도 원주에서 생을 마치시고 영면할 장소로 옮겨 오신 곳이 고향 땅인 경남 통영시의 산양읍 신전리 1426-14번지입니다. 박경리공원에는 시비(詩碑)와 묘지 그리고 정자들이 들어 앉았습니다. 규모가 그리 큰 것 같지 않은데도 널찍널찍하고 시원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선생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시비, 앞이 탁 트여 바다가 잘 조망되는 정자와 곡선미가 빼어난 길지 않은 오름 길들로 공원의 분위기가 일반 묘지와는 달리 밝고 안온해 보였습니다. 혼자 누워계시기에는 어떨지 몰라도 선생이 이룬 업적에 비하면 턱도 없이 작아 보이는 묘지가 이 공원의 주인공이 자연에 그리고 토지에 더 없이 겸손했던 박경리선생임을 조용히 드러내보였습니다.

 

 

  저는 박경리선생의 작품을 그다지 많이 읽지 못했습니다. 대신에 저는 친구에게서 빌려본 "토지"에 매료되어 사서 다시 읽었습니다. 두 번 읽어도 처음 읽는 것처럼 감동되었고 된장 같은 깊은 맛이  더 진하게 느껴졌습니다. 몇 번을 이사 다니면서 경영서와 처세서 및 다른 소설들 여러 권을 내버렸지만 선생의 "토지"는 지금도 제 서가에 한 자리 잡고 있습니다. "토지"는 우리 말과 글의 보고입니다. 선생이 아니셨다면 우리 말과 글이 이렇게 풍성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선생이 돌아가시고 얼마 안 지나 이청준 선생도 같이 세상을 뜨셨을 때 이제 누가 남아 우리 말과 글을 풍요롭게 할 까 걱정도 됐습니다. 최근까지 제 독서목록에 추가된 선생의 작품은 여행기 “만리장성의 나라”,수필집 “생명의 아픔”과 소설 “시장과 전장”뿐이었습니다. 선생의 묘지를 다녀 온 후 추가된 장편 한 권이 ”김약국의 딸들“입니다. 소설 두 권은 "토지" 이전인 1960년대 초기 작품으로 여기 나오는 인물들은 어떤 식으로든 "토지"에서 이름을 바꿔 다시 살아났다는 생각입니다. "토지"의 공간적 배경인 만주를 다녀오신 이야기는 ”만리장성의 나라“에 실렸고 선생의 생명에의 외경심은 ”생명의 아픔“에서 읽었습니다.

 

 

  선생의 생명예찬은 생명의 속성인 능동적인 것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여기 시비에 적힌 선생의 생명예찬은 “마지막 산문”에서 따온 것입니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의 생명은 다 아름답습니다.

     생명이 아름다운 이유는 그것이 능동적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물질로 가득 찼습니다.

     피동적인 것은 물질의 속성이요,

     능동적인 것은 생명의 속성입니다.

 

 

  살아 있는 생명이 모두 아름답듯이 아름답게 살다간 영혼도 역시 아름답습니다. 선생은 가셨어도, 아름답게 살다 가셨어도 선생의 영혼은 언제까지나 아름답게 존재할 것입니다. 아직 선생께서는 펜을 놓으실 때가 아닙니다. 육신은 사라져도 영혼은 저희들과 함께해 저희들로 하여금 생명을 예찬하도록 해주셔야 합니다. 그 일을 끝내신 후 펜을 놓으시고 편히 쉬시기 바랍니다.

 

 

                                                                                                       <탐방사진>

 

 

 

 

 

 

 

 

 

 

 

 

 

 

 

 

출처 : 방송대 국어국문학과
글쓴이 : 우명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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