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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리의 수업/문학과 관련하여

최문규, <초기 낭만주의에서의 포에지 개념>

by 拏俐♡나리 2010. 8. 26.

초기낭만주의에서의 포에지 개념 연구*

                                                                                                    

 

I. 포에지 개념의 다의성

 

  본 연구는 초기낭만주의를 논할 때마다 언제나 불투명하게 사용되는 "포에지"(Poesie) 개념을 더욱 세밀하게 조명하고자 한다. 초기낭만주의에 관한 이차연구 문헌을 살펴보면 포에지 개념의 의미망과 문맥이 정확하게 설정되지 않은 채 그 개념이 매우 애매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그러한 현상의 일차적 원인은 하나의 투명한 기의(Signifikat) 없이 마치 부유하는 듯한 기표(Signifikant)로서 포에지 개념을 사용한 초기낭만주의자들에게 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포에지 개념은 결코 하나의 고정된 의미를 지니지 않으면서 끊임없이 변화되고 확장되는데, 이러한 점은 다음과 같은 대목에서 간접적으로 읽어낼 수 있다. "시인은 자신에게 천성적으로 부여되고 형성된 고유한 포에지를 정지해 있는 작품 속에 표현해 내는 일로 만족해서는 안될 것이다. 시인은 자신의 포에지와 포에지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영원히 확장시키는 일에 경주해야 하며 또한 포에지를 이 지상에서 가능한 최고의 포에지로 만들어가려고 노력해야만 한다." 이처럼 포에지는 결코 정지된 상태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변화와 확장의 길을 걷는다. 그렇지만 초기낭만주의가 포에지 개념의 끊임없는 변화와 확장을 주장했다고 해서 관찰과 해석의 임무를 띤 연구자들까지도 그 개념의 의미망을 무조건 열린 상태로 방치할 수는 없으며, 특히 이차 연구는 개념의 모호한 의미를 가능한 한 학문적 담론의 틀 안으로 가져옴으로써 소통 가능성과 이해 가능성의 길을 열어 놓아야만 한다.
본래 창조하는 행위를 뜻하는 "포이에시스"(Poiesis)에서 파생된 포에지 개념은 흔히 좁은 의미에서 산문(Prosa)과 대립하는 운문이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또한 두 개념 모두 은유적 표현으로 사용되는데, 예컨대 맑스는 자본주의적 삶을 "산문"으로, 미래의 새로운 사회적 삶을 "운문"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그러나 "문학적/비문학적"의 기준으로 작용했던 운문과 산문이라는 전통적 대립이 초기낭만주의에서는 해체되며 포에지의 대립은 다름 아닌 철학이었다. 또한 포에지 개념은 정치사회적 맥락으로 전이된 은유적 의미를 지닌 것도 결코 아니다. 포에지 개념은 사실 "예술" 영역 - 혹은 오늘날의 체계이론적 시각에서 보면 "체계"라고도 할 수 있는데 - 을 나타내는 총체적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요컨대, 예술을 구성하는 수많은 세부영역(문학, 음악, 미술 등)뿐만 아니라 그 세부영역에서 생산된 예술작품, 그리고 예술을 가능케 하는 근본적인 힘인 상상력 등을 포괄하는 개념이 곧 포에지 개념인 것이다. 그리고 초기낭만주의가 고대 이후 지속적으로 사용되어 왔던 예술(Kunst) 개념보다 포에지 개념을 더 선호했던 까닭은 기계적이고 체계적인 범위에 머무는 예술의 의미를 뛰어 넘어서 다양성, 개별성, 상상력 같은 측면까지도 포에지 개념에 포함시키려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왜 유독 초기낭만주의에서 포에지 개념이 중시된 것일까? 그것은 "절대적 자유의 힘"으로서의 예술적 행위를 뜻하는 포에지 개념이 곧 자율적 특성에 대한 예술의 자기 인식과 밀접하게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이 점을 모리스 블랑쇼는 매우 적절하게 서술한 바 있는데, 즉 초기낭만주의의 포에지 형태로서 "문학(그 표현은 문학의 모든 표현 형식, 요컨대 그것의 해체현상까지도 뜻하는데)은 갑작스럽게 자기 자신을 의식하고 자신을 표명하였으며 그러한 표명 가운데 그 유일무이한 과제 및 특징은 바로 자기 자신을 설명하는 것"이었다. 블랑쇼는 주체로서의 예술가나 시인의 자유 인식보다는 포에지 영역 자체의 자기인식이 곧 초기낭만주의의 주체임을 강조해 주고 있는 것이다.
물론 초기낭만주의의 포에지 개념은 다양한 방향에서 해석되어 왔다. 우선 가장 눈에 띄는 경향으로는 무한성, 신비, 사랑 같은 특징을 포에지 개념에 전이시키는 시도인데, 이러한 형이상학적이며 관념론적 개념에 의존한 설명은 문예학적 시각을 도외시함으로써 포에지 개념의 모호성을 더욱 증폭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또한 관념론의 핵심 개념인 정신 개념도 초기낭만주의의 포에지 개념을 이해하는 데 자주 사용된다. 예컨대 "포에지 개념 하에 슐레겔은 문학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포괄하고 관통하는 정신적 능력을 말하고 있는데, 즉 하나의 대상이나 현상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흥분과 활동을 지배하는 정신 그 자체를 말한다"는 어느 이차문헌의 구절을 보면 포에지 개념이 정확하게 분석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인간의 흥분과 활동을 지배하는 정신 그 자체" 같은 심리학적, 인류학적 맥락을 끌어들임으로써 예술 자체의 작동보다는 인간의 특성만을 강조하고 있을 뿐이다.
이제 포괄적인 의미를 지닌 포에지 개념을 더욱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본 논문은 그 개념의 의미를 종교적, 형이상학적 차원에서 이해하기보다는 예술 자체를 구성하는 내적인 측면과의 연관 속에서 파악할 것이며, 더 나아가 정치, 철학, 도덕 같은 예술 외적인 영역들과도 분리되는 예술의 자율성 맥락 내에서 고찰될 것이다.

 

II. 역사철학적 맥락에서의 "교양"(Bildung)과 "포에지"
 
초기낭만주의에서 포에지 개념이 본격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글로는 슐레겔의 {그리스 포에지 연구에 관하여  ber das Studium der griechischen Poesie}(1795/6)를 들 수 있다. 쉴러의 {소박 문학과 성찰 문학에 관하여}와 거의 같은 시기에 발표된 그 글은 신구논쟁의 배경 하에 쓰여졌으며, 초기낭만주의의 포에지 개념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단초로 작용한다. 글의 주된 내용은 교양(Bildung)과 포에지의 밀접한 관계에 놓여 있는데, 다시 말하면 교양에 대한 인류학적, 역사철학적 사유를 바탕으로 포에지를 파악하면서 그러한 인식을 토대로 고대 예술과 현대 예술의 차이점을 다루고 있다. 그렇다면, 교양이란 어떤 의미를 지닐까? 그것은 관념론적 사유의 특징인 불변과 변화, 필연과 우연, 자연과 자유 같은 이분법적 틀 내에서 정의되고 있는데, "교양이란 모든 인간적 삶의 본래 내용이고, 변화하는 것에서 필연적인 것을 찾아내려는 한층 숭고한 역사의 진실한 대상"이라고 규정되고 있다. 이러한 교양을 추구해 나가는 인간은 "순수한 자기 자신과 낯선 본질로 혼합된 특성"을 지닌 존재로서 파악되며 마찬가지로 인간성도 "이중적 놀이 방식, 즉 신성함과 동물성의 이중적 혼합"이라고 정의되고 있다. 이처럼 두 가지 특성을 동시적으로 간직한 인간 혹은 인간성의 정의는 후에 이성과 광기 사이의 극복될 수 없는 간극을 주제로 삼는 바켄로더, 호프만 등의 문학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인간의 이중적 특성과 관련하여 간과될 수 없는 점은 그 특성이 중심과 주변 혹은 흑백의 논리를 통해서 파악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인간 혹은 인간성의 이중적 특성을 바탕으로 교양은 두 가지 형태의 교양으로 나뉜다. 즉 "자연과 자유의 상호작용"에서 전자가 우세할 경우 "자연적 교양nat rliche Bildung"이 형성되며, 이와 달리 후자가 우세할 경우 "인위적 교양k nstliche Bildung"이 싹튼다는 것이다. 자연과 자유는 교양이 형성되는 과정에 항시 동시적으로 존재하는 동인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세성"의 원칙에 따라 서로 상이한 형태의 교양이 나타난다. 다시 말하면, 자연과 자유 가운데 불투명한 욕구를 지닌 자연(충동)이 우세한가 아니면 특정한 목적을 추구하는 자유(오성)가 우세한가에 따라서 각각의 교양 형태가 결정된다. 자연과 자유의 대립은 때로 객관성과 주관성의 대립으로도 설명되는데, 예컨대 자연적 교양에서는 객관성이 우세하며 인위적 교양에서는 주관성이 우세하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자연과 객관성이 우세한 자연적 교양에 자유와 주관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은 결코 아니며, 역으로 자유와 주관성이 우세한 인위적 교양에 자연과 객관성이 결여되어 있는 것도 결코 아니다.
이러한 자연적 교양과 인위적 교양의 구분은 곧 두 가지 형태의 포에지가 생성되는 근거로 작용한다. 즉 자연적 교양과 함께 하는 포에지는 객관적(objektiv)이고 아름다운(sch n) 특성을 띠며, 인위적 교양과 함께 하는 포에지는 특성적이고 (charakteristisch) 흥미로운(interessant) 특성을 지닌다. 또한 이러한 두 가지 형태의 교양과 포에지는 다시금 고대적 포에지와 현대적 포에지라는 시대적 구분과 연결되는데, 호머와 소포클레스가 고대적 포에지를, 셰익스피어와 괴테가 현대적 포에지를 대변하는 전형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나중에 언급하겠지만, "현대적"이라는 범주는 "낭만적"이라는 범주와 비슷한 의미로 사용되면서 점차 시대 구분을 뛰어 넘어 자율적 포에지의 내적 원리와 인식과 관계한다.
 {그리스 포에지 연구에 관하여}는 사실 고대 그리스 포에지에 대한 고찰보다는 현대적 포에지의 특성과 의미 발견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는 글이다. 그것은 초기낭만주의자들이 자주 사용했던 "연구"(Studium)라는 개념을 통해서도 간접적으로 암시되고 있는데, 연구란 지나간 것에 대한 탐구와 애착이 아니라 자신이 처한 현재를 인식하고 극복하려는 자기치유적 작업 형식의 의미를 띤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 포에지 연구에 관하여}의 핵심은 고대로의 복귀가 아니라 현대적 포에지의 경향을 진단하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모색하는 데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자유가 지배 원칙으로 작동하는 현대의 인위적 교양 및 포에지의 특징은 어떻게 파악되고 있을까?

"현대의 미적 교양의 인위성은 다름 아닌 현대적 포에지의 전체 모습에서 엿보이는 개인적인 것, 특성적인 것, 철학적인 것의 대단한 우위를 통해서만 잘 설명되고 입증될 수 있다."

교양과 포에지의 밀접한 관계를 다시 읽어낼 수 있는 대목이며, 더욱이 현대의 미적 교양의 인위성은 "개인적인 것". "특징적인 것", "철학적인 것" 등으로 서술된 현대적 포에지의 특성에서 찾을 수 있음을 말해 주고 있다. 이러한 현대적 포에지의 특징은 슐레겔이 최초로 제안한 예술적 코드인 "흥미로운 것"(das Interessante)이라는 개념을 통해 압축적으로 서술되고 있으며, 그는 현대의 경우 주관적인 심미적 힘에서 표출되는 "흥미로운 것은 미적 성향의 무한한 완전성을 위한 필연적인 사전 준비로서 심미적으로 허락된다고 입증되어 있다"고 밝힌다. 비록 현대적 포에지의 특징이 계몽의 역사철학적 사유 방식의 특징인 "완전성"(Perfektibilit t)의 논리에서 거론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에지와 교양의 관계에서 중요한 점은 심미적인 차원에서의 "흥미로움"이 적극 옹호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흥미로움이 지배하는 현대적 교양과 포에지는 매우 극단적인 모습까지도 취한다.

"게다가 현대 예술의 전체를 보면 유별난 것, 개인적인 것 그리고 흥미로운 것이 총체적으로 우세해 있으며, 무엇보다도 후기에 더욱 그럴 것이다. 결국 새로운 것, 자극적인 것, 기발한 것을 끊임없이 지칠 줄 모르게 추구하는 행위가 나타날 것이며, 그 소망은 결코 채워지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포에지의 극단적 특징인 "새로운 것", "기발한 것", "자극적인 것"에 대한 언급은 매우 조심스럽게 해석되어야만 한다. 그것은 처음에는 부정적인 것으로 인식되는데, 예컨대 현대의 흥미로운 포에지는 "하찮은 풍만함과 역겨운 강렬함"과 함께 감성적 자극만을 던져준다고 진단되고 있거나 혹은 독자의 수용 능력도 뚜렷한 미적 판단을 결여한 채 이런 저런 작품들을 무조건 섭렵하는 경향을 띤다고 비판되고 있다. 이러한 비판은 계몽주의의 이념인 "문학적 공공성"(literarische  ffentlichkeit)이 그 본래의 이념에서 벗어나 잘못된 방향으로 진행하고 있다는 인식에서 제시되고 있을 뿐이며, 그러한 잘못된 현상 때문에 "흥미로움"이라는 새로운 특징을 띤 현대적 포에지 자체가 완전히 부인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 점은 슐레겔이 얻어낸 결론 - 이 결론은 본문보다 뒤늦게 작성된 서문에 실려 있는데 - 을 보면 더욱 명확하게 읽어낼 수 있는데, 그는 고대적 포에지의 종말을 선언하고 현대적 포에지의 독자성을 강조하고 나선다. "아름다운 것은 현대적 포에지의 이상이 아니며 흥미로운 것과 근본적으로 구별된다." 고대적 포에지의 특징인 아름다움이 더 이상 현대의 기준이 될 수 없음을 선언해 주는 결정적인 대목인 것이다. 이처럼 슐레겔이 현대적 포에지와 관련하여 흥미로움을 강조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노발리스도 낭만적 포에지란 "정감을 흥분시키는 예술" 혹은 "기분 좋은 방식으로 놀라게 하는 기술, 대상을 낯설게 만들고 매력을 불러일으키는 방식"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노발리스나 슐레겔 모두 고대적 포에지와는 완전히 다른 특성을 지닌 현대적 포에지를 강조하고 있는 셈이다. 특히 흥분(Erregung), 자극(Reiz), 매력(Anziehung)을 강조한 노발리스의 사유를 보면 현대적 포에지가 더 이상 아름다움을 강조하는 미학 차원에서 파악될 수 없고 오히려 아방가르드 미학 같은 예술 특성까지도 선취해 주는 차원에서 읽혀져야 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가령 자극은 내적 자극과 외적 자극으로 나뉘어지며, 외적 자극이 기계적인 법칙에 종속된다면 내적 자극은 상상력, 꿈, 충동, 비밀스러운 것, 놀라운 것, 미지의 것과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 그런 연유에서 "미지의 것"은 곧 "절대적인 자극"이며 이러한 자극이 다시금 "인식능력"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그리고 자극과 흥분은 필연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며 우연과 무질서에 기초하며 이를 통해서만 미학적 유희가 가능해 진다.
슐레겔은 혼돈과 무질서 개념을 현대적 포에지가 처해 있는 상황과 관련하여 처음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그 대목은 다음과 같다.

"특징 없는 상태가 바로 현대 예술의 유일한 특징처럼 보이며, 혼돈이 현대 예술 전체의 유일한 공통점처럼 보이며, 무법칙성이 예술사의 정신처럼 보이며, 회의주의가 곧 예술 이론의 결과처럼 보인다"

개별 영역 간의 경계가 무너진 "탈경계성"의 현상 속에 현대적 포에지가 놓여 있을 뿐만 아니라 현대적 포에지 자체도 그러한 탈경계적 혼돈의 양상을 띠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혼돈 개념도 이중적인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한편으로 인위적 교양을 이끌어 가는 이성과 주관성이 극단화되는 과정에 대한 비판적인 의미를 담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 나중에 분석될 [신화에 관한 강연]에서처럼 - 통일성보다는 다양성을 근본으로 삼는 예술 내적인 특성을 암시해 주고 있다.
{그리스 포에지 연구에 관하여}에서 슐레겔이 어떤 관점을 취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이미 극단적인 논쟁이 야기된 바 있다. 즉 그 글에서는 현대에 대한 비판과 함께 자연적 교양과 객관적 포에지를 요청하는 의고전주의적 시각이 지배적이라는 시각과, 이와 달리 그 글에서는 주객관성의 변증법적 종합을 추구하는 관점이 내재되어 있다고 해석된 바 있다. 이러한 첨예한 논쟁 가운데 후자의 시각이 비교적 설득력을 지닌 것으로 보이지만, 포에지 개념을 고찰하는 필자의 관점에서 중요한 점은 {그리스 포에지 연구에 관하여}에는 사실 역사철학적, 관념론적 사유가 깊이 각인되어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교양과 포에지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는 측면이다. 멘네마이어(Mennemeier)에 의하면, 포에지가 포에지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 "역사적인 인간의 운명"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정치철학적, 역사철학적 차원에서 그 점을 부연하자면, {그리스 포에지 연구에 관하여}에서 요청된 "심미적 혁명"( sthetische Revolution)은 사실 프랑스 혁명을 옹호하는 정치적 시각과 관계를 맺으며, 이런 점에서 {그리스 포에지의 연구에 관하여}는 쉴러 미학과 비슷한 맥락을 형성한다. 그렇지만 흥미로운 점은 교양과 포에지의 연관성을 강조하는 역사철학적 시각은 {그리스 포에지 연구에 관하여}에서만 엿보일 뿐, 잡지 {아테네움}을 기점으로 그러한 시각은 완전히 뒷전으로 밀려나며 그 대신 포에지 자체의 내적인 구성과 원리를 강화시키는 시각으로 전환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환은 포에지가 더 이상 역사철학적 함의를 갖지 않는 예술의 자율성 논리와 연결되며, 정치적 개념들까지도 그러한 예술의 자율성을 강화시키려는 목적에서 과감하게 차용된다. "포에지란 공화국과도 같은 담론이다. 그 자신의 법칙이며 자신의 목적인 담론, 그리고 거기서는 모든 부분들이 자유로운 시민들처럼 동등한 결정을 내려도 좋은 담론인 것이다." 포에지의 특성은 모두 계몽주의 시대 및 프랑스 혁명을 특징짓는 정치철학적 어휘(republikanisch, Gesetz, Zweck, freie B rger, mitstimmen)로 점철되어 있지만, 이러한 정치철학적 어휘는 포에지 자체의 특성을 강화시켜 주는 수사적 언어로 전이되고 있을 뿐 본래의 정치철학적 유토피아의 의미를 더 이상 담지 않고 있는 것이다.

 

III. 세 가지 유형의 낭만적 포에지: 선험적 포에지(transzendentale Poesie), 보편적 포에지(universelle Poesie), 포에지의 포에지(Poesie der Poesie)

 

잡지 [아테네움]에 단편 형식의 파편적 글쓰기를 도입했던 시기에 슐레겔과 노발리스는 예술 영역의 역동성과 자율성을 나타내는 의미로 포에지 개념을 자주 사용하였으며 동시에 포에지 내적 원리에 따라 그 유형을 다각도로 세분화하였다. 그에 대한 대표적인 예로는 선험적 포에지, 보편적 포에지, 포에지의 포에지라는 유형의 세분화를 들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측면은 노발리스보다는 슐레겔에게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다만 노발리스의 경우 "낭만주의. 개인적 계기와 개인적 상황 등의 절대화 - 보편화 - 분류화, 이것이 바로 낭만화의 고유한 특성"이라고 짧게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반면에 슐레겔은 "선험적 포에지, 보편적 포에지, 포에지의 포에지"라는 세 가지 유형을 다름 아닌 "현대인들의 특성"이라고 파악하면서 낭만적 포에지 개념을 현대적 맥락에서 전개하려 했다. 물론 선험적 포에지, 보편적 포에지, 포에지의 포에지라는 세 가지 유형을 근본적으로는 동일한 것의 다양한 형태로 간주하면서 "포에지" 자체만을 강조할 수도 있다. 그러나 포괄적인 차원에서 포에지만을 강조할 경우 그 세 가지 유형 간의 미세한 차이점이 간과되거나 희석될 수 있기에 그 차이점을 인식하는 것이 더욱 바람직하다. 또한 차이점의 인식은 포에지의 내적 원리를 밝히면서 동시에 자율적 포에지의 자기 인식을 강화하는 차원과도 연결되기 때문에 더욱 중시된다. 그렇다면, 포에지의 세 가지 유형을 강조하고 있는 대표적인 단편으로 아테네움 247번을 살펴보자.

"단테의 예언적인 시는 선험적 포에지의 유일한 체계이며 여전히 그러한 방식에서 최고의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보편성은 낭만적 예술의 절정과도 같다. 괴테의 순수한 포에틱한 포에지는 가장 완성된 포에지의 포에지다. 이것이 바로 현대 포에지의 위대한 삼화음으로서 현대 예술의 고전주의자를 비판적으로 선택하는 일에 있어서 협의의 차원 및 광의의 차원 하에 엿볼 수 있는 가장 내면적인 신성한 그룹이다."

이처럼 세 가지 유형을 구분하는 언술의 흔적은 슐레겔의 문학에 관한 메모집에서 무수히 발견되며, 그러한 파편적 단편들을 종합해 보면 단테의 경우 "선험적" 포에지로, 셰익스피어의 경우 "보편적(낭만적) 포에지"로, 괴테의 경우 "포에지의 포에지"로 명명되고 있다. 그리고 이 세 가지 유형 모두 초기낭만주의가 구상했던 포에지 개념에 포함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 세 가지 유형에 의해 구성된 포괄적이고 총체적인 포에지가 곧 초기낭만주의가 제시하고자 했던 역동적이고 자율적인 예술의 자기인식과 부합하는 것이다. 이러한 점을 정확하게 간파하지 않은 채 세 가지 유형 중 하나의 유형만을 초기낭만주의의 포에지로 동일시한다면 그것은 불완전한 시각으로 머물고 만다.
이 세 가지 유형들은 포괄적인 포에지 체계 내에서 상호 전환과 이행의 가능성과 잠재력을 갖고 있지만 이 점에 대해서는 나중에 밝히기로 하고 우선 각 유형의 특성을 살펴보자. 우선 칸트 철학(일명 "선험철학")의 용어를 차용한 선험적 포에지의 특성은 무엇일까? 칸트 철학에서 선험적이란 인식 대상과 관련된 질문이 아니라 인식을 가능케 하는 경험 이전의 조건을 묻는 것인데, 이러한 의미를 근거로 삼을 경우 선험적 포에지란 포에지의 대상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포에지를 가능케 하는 경험 이전의 "생산조건"(Produktionsbedingung)과 관련된 유형을 뜻한다. 그렇다면, 포에지를 가능케 하는 생산조건은 무엇일까? 이에 대한 답변은 아테네움 단편 238번에 주어져 있으며, 거기서 선험적 포에지는 "그 하나이자 전부는 다름 아닌 이상과 현실의 관계"라고 언급되어 있다. 즉 현실과 이상 간의 관계가 선험적 포에지의 생산조건이며, 그에 따라 선험적 포에지는 세 가지 하부 장르를 갖게 된다.

"선험적 포에지는 풍자로서 이상과 현실의 절대적인 차이로 시작하며, 비가로서 그 양자의 사이에서 부유하며, 마침내 목가로서 그 양자의 절대적인 동일성으로 끝난다."

고전주의 미학에 정통한 독자라면 선험적 포에지의 특징이 누구의 미학적 성찰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는지 쉽게 감지할 수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소박문학과 성찰문학에 관하여}에서 이상과 현실의 관계로 풍자, 비가, 목가를 논했던 쉴러 미학과 관계를 맺는다. 따라서 선험적 포에지의 특성을 언급하면서 낭만주의자인 슐레겔이 다름 아닌 고전주의자 쉴러에 의존해 있다는 점은 흔히 문학사에서 범해지는 "고전주의"와 "낭만주의"라는 확고한 경계 긋기가 얼마나 불안정한 도식성에 의존해 있는 것인지를 말해주는 측면이기도 하다. 어쨌든 쉴러의 도식 그대로, 슐레겔은 이상과 현실 간의 차이, 대립, 동일성을 토대로 선험적 포에지를 규정하고 있으며, 또 다른 단편에서 선험적 포에지는 "모든 시공간에서, 혹은 특정한 시공간에서" 유희를 펼친다고 밝히고 있다. 이것은 선험적 포에지가 특수성과 보편성 사이에서 움직이고 있음을 말해 준다. 그렇지만, 선험적 포에지가 반드시 선험적이라는 철학적 개념의 의미에만 고착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것은 선험적 포에지가 "예언적"이라거나 "절대적"(absolut) 혹은 "사변적"(spekulativ)이라는 속성을 띤다고도 언급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노발리스도 "선험적 포에지는 철학과 포에지의 결합"이라고 언급하고 있는데, 이 경우 선험적이란 인식과 상상력의 결합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셰익스피어 문학으로 대변되는 보편적 포에지는 "낭만적 포에지"라고도 언급된다. 여기서 주의해야할 점은 이 경우 "낭만적"이란 슐레겔이 아테네움 116번에서 선언한 낭만적 포에지와 동일한 것이 아니라 보편적 소재를 재구성하고 강화시키는 예술 유형을 가리킨다.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바 있듯이, 초기낭만주의가 내세운 낭만적 포에지가 창작행위와 그 생산물을 포함한 예술 전체를 가리키는 개념이라면, 여기서 언급되는 보편적 포에지로서의 "낭만적 포에지"는 셰익스피어 문학의 유형에만 제한되는 것이다. 이 유형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언급되어 있다.

"셰익스피어는 고대인들이 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소재 자체를 구성하고 소화해 내고 있으며, 자신의 창작 방식과 문체에 따라서 과거의 방식과 문학화 방식을 변형하고 더욱 폭넓게 형성해 나갈 뿐만 아니라 강화시켜 나간다. - 그는 특정 장르의 이상에 의해서가 아니라 개인적인 포에지의 이상에 의해 소재를 완전히 변형시켜 구성해 내었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점은 보편적 포에지란 소재의 변형 및 구성과 관계한다는 것이며, 더욱이 "개인적인 포에지의 이상"에 따라서 소재 변형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낭만적 포에지의 특징은 선험적 포에지와의 차이를 통해서 읽어낼 수도 있는데, 예를 들면 선험적 포에지가 이상과 현실을 놓고서 "긍정과 부정"의 논리로 작동한다면 보편적 포에지의 특성은 그러한 긍정과 부정이 아닌 "분석과 종합"을 특징으로 삼는다. 이 밖에도 슐레겔은 낭만적 포에지는 "신비적, 육체적, 역사적"이라는 특징을 지닌다고 밝히고 있다.
세 가지 유형 중 가장 중요하고 흥미로운 유형으로서는 "포에지의 포에지"를 들 수 있으며, 이 유형의 대표적인 예로는 괴테 문학이 언급되고 있다. 이미 앞에서 인용했던 아테네움 247번처럼 포에지의 포에지는 "포에틱한 포에지 poetische Poesie"로도 불리며, "포에틱한"이라는 측면이 강조됨으로써 그 유형은 철학적 포에지, 수사적 포에지, 문헌학적 포에지 같은 유형과 구분되기도 한다. 이 유형의 결정적인 특징은 포에지 혹은 예술 체계의 자율성과 관련해서 밝혀질 수 있다. 20세기 중반 로만 야콥슨은 언어의 여섯 가지 기능을 언급하면서 언어가 언어를 기술하는 기능을 "메타언어적" 기능 - 이에 대한 대표적인 예는 특정 언어의 의미를 언어로 기술하는 사전(辭典)을 들 수 있는데 - 이라고 명명한 바 있으며, 그것은 곧 언어의 자율성과 깊은 관련을 맺는다. 이러한 사유와 비슷한 차원에서 슐레겔은 이미 자율적 포에지와 관련해서 그러한 "메타포에틱"이라는 특성을 거론하고 있는 것이다. 즉 포에지가 포에지 밖의 현실적 혹은 이상적 대상을 그려 낼뿐만 아니라 포에지 자체(예: 서술 방식)를 서술 대상으로도 취할 경우 포에지의 포에지가 생성되는 것이다. 이에 대한 전형으로 괴테 문학이 언급되고 있는 것은 괴테 작품이 대부분 그러한 문학적 서술 자체를 서술 대상으로 취하고 있기 때문이며, 이에 대한 예로 슐레겔은 {빌헬름 마이스터}를 들고 있다. 슐레겔은 사실 이 세 번째 유형을 가장 중시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것은 "모든 낭만적 예술작품은 포에지의 포에지이며 특성 서술(Charakteristik)과 관계를 맺고 있는 비판적 포에지"라고 언급했기 때문이다. 포에지의 포에지, 다시 말하면 자신의 포에틱한 서술 자체를 다시금 포에지의 서술 대상으로 취하는 방식은 포에지의 자기투영 방식이라고 할 수 있으며, 바로 이 점이 자율적인 현대 예술의 특징과 긴밀한 관계를 맺는다.
포에지의 포에지는 "추상적" 혹은 "비판적" 혹은 "윤리적" 포에지라고 명명된다. 이 때 윤리적이란 윤리적인 삶의 소재나 의식을 보여주는 포에지가 아니라 "자아까지도 포에지가 되어야만 하는" 당위성을 지닌 포에지를 말한다. 또한 추상적, 비판적 같은 개념도 정치사회적, 역사철학적 의미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예술 체계 내의 의미를 지니는데, 즉 그 개념들은 일종의 포에지의 자기 전개와 관련된 것으로서 포에지 내에서 혹은 포에지를 통해서 전개되는 포에지의 자기 강화(Selbst- potenzierung)라는 의미를 지닌다. 그 결과 포에지의 포에지는 궁극적으로 예술의 자기 비판력을 통해 강화되는 미적 자율성을 암시해 주고 있다.
이렇듯 세 가지 유형의 차이점이 명확하게 드러나지만, 또 다른 단편에서는 그 세 가지 유형이 미학적 범주에 의해서 차이를 갖는다. 가령 선험적 포에지는 "숭고한 것 das Erhabene"과, 보편적 포에지는 "자극적인 것 das Reizende"과, "포에지의 포에지"는 "아름다운 것 das Sch ne"과 관계를 맺는다. 이미 {그리스 포에지 연구에 관하여}에서도 슐레겔은 "추의 미학  sthetik des H  lichen"을 정립하기 위해 그 미학적 범주를 사용한 바 있는데, 여기서도 세 가지 유형 간의 차이점을 드러내기 위하여 그러한 미학적 범주를 끌어들이고 있다. 중요한 점은 칸트 미학에서도 제시된 그 범주들이 더 이상 역사철학적 함의를 갖지 않으면서 포에지 자체의 특성으로만 파악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슐레겔은 낭만적 문학이론에서 매우 중시된 세 가지 개념(아이러니, 패러디, 기지)을 그 세 가지 유형의 포에지에도 적용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선험적 포에지에는 "아이러니"가, 보편적 포에지에는 "패러디"가, 포에지의 포에지에는 기교적인 "우아함"  혹은 "기지 Witz"가 지배적이라는 것이다. 이 밖에도 슐레겔은 독일 관념론에서 자주 사용되는 "다양성, 통일성, 전체성"이라는 세 개념을 통해 세 가지 유형 간의 차이점을 밝히고 있다.

"낭만적인 것을 통해서 작품은 다양성, 보편성, 강화력을 지닌다. 추상을 통해서 작품은 통일성, 고전성, 점진성을 지닌다. 선험적인 것을 통해서 작품은 전체성, 절대성, 체계성을 지닌다."

셰익스피어로 대변되는 보편적 포에지는 "다양성, 보편성, 강화력"을 가져다주며, 포에지의 포에지의 특성인 "추상"은 "통일성, 고전성, 점진성"을 작품에 부여하며, 선험적 포에지의 특성인 "선험성"은 "전체성, 절대성, 체계성"을 작품에 부여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철학적 개념은 존재론적, 역사철학적 차원에서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예술 체계의 내적인 방식과 작동을 설명해 주는 개념으로 전이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제 더욱 중요한 점은 세 가지 유형 간의 상호 이행과 전환을 통해 궁극적으로는 별 포에지의 통합이 제시된다는 것이며, 그 점을 암시해 주는 중요한 단편은 다음과 같다.

"셰익스피어의 본질은 낭만적이며 그의 경향은 선험적이다. 그는 낭만적이며 고전화된다. 괴테의 본질은 추상과 포에지며 그의 경향은 낭만적이다. 그는 고전적이며 낭만화된다. - 괴테는 고전성을 넘어서 점진성으로 나아간다. 셰익스피어는 낭만성을 넘어서 선험성으로 나아간다. - 단테와 셰익스피어는 마치 거인처럼 대지에서 뛰쳐나온다."

이 단편은 매우 흥미롭다. 그것은 특정 유형이 자신의 "본질"을 유지하지만 동시에 다른 유형의 본질을 "경향"으로 취한다는 논리가 작동되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셰익스피어는 괴테의 본질을 경향으로 취하고 있다면, 역으로 괴테는 셰익스피어의 본질을 경향으로 취하고 있는 것이다. 셰익스피어와 괴테만이 언급되고 있지만 단테의 경우도 그 본질과 경향이 상호 교차 논리를 통해 충분히 서술될 수 있다. 예컨대, 단테의 본질은 "예언적"(혹은 사변적, 절대적)이지만 괴테의 본질인 "추상성"을 "경향"으로 취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단테, 셰익스피어, 괴테를 통해 표현된 선험적 포에지, 보편적 포에지, 포에지의 포에지는 각각의 고유한 특성을 넘어서 서로 다른 유형으로 전환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다.

"추상적 포에지는 절대적이며 보편적이다. 보편적이며 낭만적인 포에지는 선험적 포에지와 추상적 포에지와 섞인다. - 절대적 포에지는 보편적 포에지와 추상적 포에지의 결합과 섞인다."

처음에 제시되었던 아테네움 247번이나 다른 단편의 경우 분명 단테(선험적, 사변적, 절대적 포에지), 셰익스피어(보편적, 낭만적 포에지), 괴테(포에지의 포에지, 추상적, 비판적 포에지)가 서로 구분되었지만, 이 단편은 특정한 포에지가 다른 두 형태의 포에지의 특성을 취한다는 점을 말해 주고 있다. 즉 궁극적으로 그 경계가 해체되고 있는 것이다. 그 예로 첫 문장인 "추상적 포에지는 절대적이며 보편적"이라고 언급되고 있는 것은 곧 추상적 포에지(포에지의 포에지)는 절대적(즉 선험적 포에지)이며 동시에 보편적(낭만적 포에지)이라는 것을 뜻하며, 이러한 논리는 보편적 포에지나 선험적 포에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세 가지 유형 간의 상호 이행과 전환은 다음의 단편을 통해서 분명히 입증된다.

"낭만적 포에지는 경험적이며, 선험적 포에지는 신비적 혹은 논쟁적이며, 추상적 포에지는 절대적 포에지 혹은 보편적 포에지와 함께 비로소 비판적이 된다."

처음 두 문장은 각기 낭만적 포에지와 선험적 포에지의 특성에 관한 언급이지만, 세 번째 문장의 경우 "추상적 포에지"(포에지의 포에지)가 다른 유형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즉 추상적 포에지가 "비판적"이기 위해서는 "절대적 포에지 혹은 보편적 포에지와 함께" 할 때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호 보완과 전환의 가능성은 다시금 아테네움 단편 238번에서 제시되어 있다. 사실 그 단편의 전반부는 선험적 포에지에 관한 서술이지만, 후반부의 경우 "핀다르, 그리스의 서정적 단편, 괴테에게서 발견되는 예술적 성찰과 아름다운 자기투영"의 포에지가 언급되고 있다. 여기서 "예술적 성찰과 아름다운 자기투영"은 사실 선험적 포에지의 특성이 아니며 포에지의 포에지로 전환한 것으로 보아야만 하는데, 그 점은 "자신의 서술 속에서 자기 자신을 서술하면서 도처에서 포에지가 되고 포에지의 포에지로 된다"는 대목을 통해서 뒷받침된다.
그렇다면 서로 분리된 유형들이 상호 보완과 전환의 가능성을 갖는 까닭은 무엇일까? 사실 초기낭만주의에서 포에지의 특징은 위에서 언급된 세 가지 유형 중 어느 하나의 것에만 고착되는 것이 아니라 그 세 가지 특성이 서로 혼합되는 과정에 놓여 있으며, 그 점은 다음과 같은 단편에 제시되어 있다.

"포에지의 불가능한 이상 = 무한히 환원되고 무한히 강화된 절대적인 소설 + 무한히 환원되고 무한히 강화된 절대적인 예언 + 무한히 환원되고 무한히 강화된 절대적인 포에틱한 포에지"

"절대적인 소설", "절대적인 예언", "절대적인 포에틱한 포에지"는 각기 위에서 언급된 세 가지 유형을 나타내며, 궁극적으로는 그 세 가지 유형이 통합된 형태로서 "포에지의 불가능한 이상"이 설정되고 있다. "불가능한 이상"이라고 언급되고 있는 까닭은 포에지 자체가 결코 고정될 수 없는, 항상 개방적인 움직임의 상태를 유지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완성된 예술이란 실현불가능하지만 그러한 실현불가능성이 곧 예술을 생산케 하는 힘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세 가지 유형들이 통합되는 마지막 순환 단계에서의 포에지, 즉 "포에지의 불가능한 이상"은 다시금 "절대적 로망"(absoluter Roman), "로망포에지"(Romanpoesie)로도 불리는데, 여기서 "로망"이란 좁은 의미에서 소설이라는 장르 개념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위에서 언급된 유형들이 통합된 포에지를 가리킨다. 마찬가지로 그 불가능한 이상은 "점진적 보편포에지"라고 명명될 수도 있다.

 

IV. "점진적 보편포에지"(progressive Universalpoesie)

 

아테네움 116번은 초기낭만주의를 대표하는 단편이지만 동시에 오해와 선입견을 야기하는 단편이기도 하다. 이 단편의 주된 내용은 낭만적 포에지의 특성을 마치 강령처럼 선언하는 것이지만, 여기서 염두에 두어야 할 중요한 점은 낭만적 포에지는 위에서 언급한 바 있던 셰익스피어로 대변된 낭만적 포에지와 동일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세 가지 유형을 종합하는 형태라는 것이다. 그것은 전체 내용을 살펴보면 세 가지 유형의 속성이 그 단편에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우선 이 단편을 분석하기 전에 낭만적 포에지라는 개념에서 "낭만적"의 의미를 살펴보자. 초기낭만주의가 사용한 낭만적이라는 개념은 특정한 예술 형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독자성과 자율성을 인식한 현대 예술 자체를 나타낸다. 그 점은 낭만적이라는 개념의 근본적인 의미에서 찾을 수 있는데, 가령 {포에지에 관한 대화}의 그 유명한 구절을 보면 "낭만적"이란 "감상적 소재를 환상적 형식으로 서술해 내는 것"이라고 정의되고 있다. 물론 감상적(sentimental)과 환상적(phantastisch)이라는 개념 자체도 상세한 의미부여를 요구하지만, 우리의 맥락에서 더욱 중요한 점은 "낭만적"이란 새로운 사조의 특별한 형태가 아니라 소재와 형식을 결합시키는 예술적 생산의 기본 조건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이 점은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 사실 초기 낭만주의자들이 "낭만적 포에지" 혹은 "낭만주의"라는 개념을 사용했을 때 그것은 특정한 예술관이나 세계관을 설파하려 했던 것이 아니라 단지 현대 문학과 예술의 기본적인 특성, 더 나아가 자율적 예술의 의미를 환기시키려 했던 것이다. 더욱이 낭만적이라는 개념이 18세기에 태동된 낭만주의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점은 위에서 언급된 세 가지 유형을 통해서도 이미 암시되는데, 거기서 단테, 셰익스피어, 괴테라는 이름은 - 물론 그 시인들의 문학도 해당되지만 - 예술의 세 가지 유형을 나타내는 일종의 은유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낭만적 포에지라는 개념에서 "낭만적"이 현대 문학과 예술의 기본적인 특성을 나타낸다면 "포에지" 개념도 그러한 특성에 정확하게 상응하며, 그 점은 {포에지에 관한 대화}에서 찾을 수 있다. 등장인물인 로타리오는 "말로 야기되는 모든 예술과 과학은, 만약 그것이 예술로서 그 자신을 위해 사용되고 또한 절정에 도달할 경우, 포에지로 나타난다"고 밝히고 있다. 여기서 포에지의 특징은 언어화("말로 야기된")이며 또한 "그 자신을 위해"라는 표현은 포에지의 자율성을 암시해 주고 있다. 이러한 로타리오의 시각에 대해서 루도비코는 다른 시각에서 화답하는데, "언어 문자로 그 본질적 특성을 제시하지 않는 것도 모두 보이지 않는 정신을 갖고 있으며, 그것이 포에지다." 로타리오가 포에지의 읽을 수 있는(혹은 볼 수 있는) 언어화의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면, 루도비토는 포에지의 읽을 수 없는(보이지 않는) 정신의 측면을 강조하고 있는 셈이다. 로타리오와 루도비코가 언뜻 서로 상이한 견해를 피력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넓은 의미에서 두 인물은 {포에지에 관한 대화}를 구성하는 인물이다. 다시 말하면, 두 인물의 서로 대척하는 듯한 시각은 넓은 의미에서 초기낭만주의가 염두에 두었던 포에지에 모두 포함되는 것이다. 즉 두 인물의 주장은 포에지의 두 가지 측면, 즉 보이는 것(das Sichtbare)과 보이지 않는 것(das Unsichtbare), 말할 수 있는 것(das Sagbare)과 말할 수 없는 것(das Unsagbare), 문자(Buchstaben)와 정신(Geist), 물질과 영혼, 형식과 내용과 관계하며, 이러한 두 가지 특성이 곧 포에지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낭만적 포에지의 특징, 그리고 앞서 언급된 세 가지 유형의 특징을 종합하는 것이 116번 단편이다. 우선 "점진적 보편포에지"란 두  개념을 결합시킨 개념임을 알 수 있다. 점진적 혹은 진보적은 역사의 발전에 대한 낙관적 믿음을 표출하는 정치철학적 용어로서 계몽주의의 담론에서 자주 사용되었지만, 여기서는 그러한 정치철학적 의미와는 무관하게 단지 끊임없이 발전해 나가는 포에지의 역동성을 강조하는 문학적 토포스로 차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보편포에지"에서도 "보편" 개념은 인류학적, 역사철학적 의미에서 출발하지만 여기서는 단지 포에지의 무한한 확대 가능성만을 나타내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즉 "보편"이란 "모든 형식과 소재를 서로 교차시키면서 충분히 소화해 내는 것"을 뜻하며, 따라서 보편포에지는 결코 협소한 틀에 제한되는 포에지가 아니라 상상력, 기지, 예견 등을 통해 자신의 범위를 확대시켜 나가는 포에지를 가리킨다. "포에지란 보편적 예술이다. 포에지를 작동케 하는 상상력은 자유와 매우 긴밀하며, 외부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그리스 포에지 연구에 관하여}에서 발견되는 대목을 보면, 상상력과 자율성이 보편포에지의 근본적 특징임을 알 수 있다.
낭만적 포에지가 곧 예술 자체의 역동성과 자율성을 뜻한다는 점은 116편의 구체적인 내용 분석을 통해 더욱 명확해진다. 이 단편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그 첫 번째 부분은 낭만적 포에지는 분리된 예술적 장르를 다시 통합한다는 내용이며, 이 점은 시작 부분에서 "...기교 없는 노래로....in kunstlosen Gesang"까지 해당된다. 두 번째는 그러한 포에지의 내적 작동 방식에 관한 내용, 다시 말하면 예술작품의 안과 밖, 작가의 의도와 작품 형식 간의 관계, 예술작품 자체의 특징인 "포에틱한 성찰 poetische Reflexion" 등에 관한 내용이며, 이 부분은 "마치 거울들이 끝없이 배열된 듯이 배가시킨다 wie in einer endlosen Reihe von Spiegeln vervielfachen"까지 해당된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부분은 포에지가 외적인 것(인간적, 사회적인 여타 영역)과의 상호 관계 속에서도 무한한 확대 가능성과 자율성을 구축한다는 내용이다.
우선 첫 번째 부분을 살펴보자. 낭만적 포에지는 서로 분리된 다양한 영역(문학, 철학, 수사학, 비평, 인위적 문학과 자연적 문학 등)을 다시금 통합하는데, 그 통합 과정은 점층적 논리로 이루어지고 있다. 즉 문학 내의 장르뿐만 아니라 철학, 수사학 같은 문학과 인접해 있는 영역들, 더 나아가 삶과 문학의 관계가 다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낭만적 포에지의 보편화 과정은 "어린아이의 입맞춤" 같은 감각적 표현과, 동시에 "여러 체계들을 그 자체 내에 포함하고 있는 예술의 거대한 체계 vom gr  ten wieder mehrere Systeme in sich enthaltenden Systeme der Kunst"라는 매우 추상적인 표현을 통해서 다시금 강화된다. 이것은 낭만적 포에지가 매우 소박한 소재뿐만 아니라 예술 자체에 존재하는 수많은 부분체계들 - 예를 들면 위에서 언급된 세 가지 유형의 포에지나 혹은 비가, 풍자, 목가 등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는데 - 을 자신의 대상으로 취하는 메타담론적 특성까지도 지닌다는 점을 말해 준다. 이러한 포에지의 보편화 과정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포에지의 보편화 과정은 사실 포에지 자체의 자율성 프로그램으로 읽혀질 수 있는데, 그것은 개별 체계는 환경으로 존재하는 여타체계를 자기 체계의 시각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다는 체계이론적 시각으로 설명될 수 있다. 즉 자신의 내적 세계뿐만 아니라 외적 세계까지도 통합하겠다는 포에지의 보편화 과정은 포에지의 사회적 기능, 역할 등과는 무관하게 그 자체의 내적 논리를 강화시키는 프로그램으로 읽을 수 있는 것이다.
포에지의 보편화 과정이 그 자체의 특수성을 강화시킨다는 점은 그 단편의 두 번째 부분, 즉 포에지의 내적 작동 방식을 담고 있는 내용을 통해서 입증된다. 우선 위에서 언급된 보편화 과정의 결과로서 포에지가 마치 시간과 역사 속에 제한되는 듯한, 더욱이 반영이론 논리로 이해될 수 있는 듯한 특성을 갖게 되는데, 즉 낭만적 포에지는 "서사시처럼 전체 주변 세계의 거울, 시대의 형상 gleich dem Epos ein Spiegel der ganzen umgebenden Welt, ein Bild des Zeitalters"이라는 것이다. "거울", "형상" 같은 개념을 통해 포에지와 현실 사이의 동일성이 가능한 듯한 환상을 불러일으키지만, 사실 그러한 동일성에 대한 언술은 수사적 언술에 불과하다. 그러한 환상은 다음과 같은 포에지의 내적 작동 원리에 의해서 깨지고 만다.

"그것(낭만적 포에지:역주)는 서술된 것과 서술하는 이의 사이에서, 현실적이거나 이상적인 모든 이해관심사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포에틱한 성찰의 날개로 그 가운데서 부유하고 이러한 성찰을 다시 강화시키고 마치 거울들이 끝없이 배열된 듯이 배가시킨다."

이것은 바로 포에지의 내적 작동 방식을 제시해 주는 대목이다. 즉 비동일성을 특징으로 삼는 상상력 개념과 일치하는 부유(Schweben) 개념이 포에지의 특성이라는 것이며, 또한 포에지는 소재나 창작 정신 사이에서 그 어느 것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것이다. 특히 "포에틱한 성찰" 개념은 주관적 자아의 성찰적 힘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포에지 자체의 내적 작동 원리를 뜻하는데, 예를 들면 서술의 전후 관계를 이어가거나 혹은 작품과 작품 간의 상호텍스트적 관계를 만들어 내는 원리, 더 나아가 "포에지의 포에지"를 가능케 하는 원리로서도 이해될 수 있다. 요컨대, "포에틱한 성찰"은 포에지 자체의 강화(Potenzierung)와 배가성(Vervielfachung)을 가능케 하는 원리인 셈이다. 포에지가 포에틱한 성찰이나 부유의 특성을 지니기에 작가의 정신과 형식 간의 완전한 일치도 불가능하다.
더욱 중시해야할 점은 포에지가 자신의 포에틱한 성찰을 "마치 거울들이 끝없이 배열된 듯이 배가시킨 wie in einer endlosen Reihe von Spiegeln vervielfachen"다는 측면이다. "마치 거울들이 끝없이 배열된 듯"이란 표현은 사실 위에서 언급된 "전체 주변 세계의 거울, 시대의 형상"이어야 한다는 구절과 완전히 대척한다. 예를 들면 오로지 하나의 거울만이 존재할 경우 대상과 형상 간의 동일성 논리가 작동할 수도 있지만, 거울들이 끝없이 배열되어 있을 경우 그 정황은 완전히 다르다. 끝없이 배열된 거울들은 본래의 실상과는 무관하게 형상의 형상이라는 무한대를 여는, 마치 이탈과 다름을 생산하는 "이화하는 기계 eine dissimilierende Maschine"처럼 작동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포에지가 "마치 거울들이 끝없이 배열된 듯"이 자신의 성찰을 작동시킬 경우 사물과 형상 간의 동일성이란 결코 존재할 수가 없으며 오히려 형상의 형상, 형상의 형상의 형상 간의 무한한 차이와 다름이 생산될 뿐이다. 그 결과 "거울들이 끝없이 배열된 듯"이 포에틱한 성찰을 강화시키는 포에지의 형상은, 후에 호프만이 [모래인간]에서 포에지의 자기성찰적 구절처럼 밝힌, "흐릿하게 가공된 거울에 비친 불명확한 영상처럼 wie in eines matt geschliffnen Spiegels dunkelm Wider- schein" 나타난다. 결국 세계의 거울이나 시대의 형상이라는 대목은, 앞에서 언급한 바 있는 현실과 이상을 생산조건으로 삼는 "선험적 포에지"와의 관련성에서 출발하지만, 그러한 선험적 포에지는 포에틱한 성찰로 인해 포에지의 포에지로 전환되고 마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낭만적 포에지는 "현실적이거나 이상적인 이해관심사로부터 벗어나" 있는 것이다.
세 번째 부분은 자신의 내적 작동에 바탕을 둔 포에지가 자율성을 획득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물론 외적 영역과 포에지 간의 밀접한 관계가 다시 반복되고 있지만, 그러한 관계는 곧 포에지의 내적 자율성을 위해 지양되고 만다. 그 점은 "포에지의 첫 번째 법칙은 바로 자유로운 시인의 자의성은 자신을 억누르는 그 어떤 법을 용인하지 않는 것"이라고 제시된 구절에서 찾을 수 있다. 물론 창작하는 이의 절대적 자유를 언급해 주고 있지만, 사실은 창작하는 이의 절대적 자유는 곧 포에지 자체의 자율성을 강화시키는 논리로 이해된다. 이처럼 창작하는 이의 자유가 보장된 포에지는 결코 완성된 형태가 불가능한, 끊임없이 변화하고 확장되는 특성을 지니는데, 즉 "낭만적 창작방식은 생성 중에 있으며, 이것이 곧 포에지의 본래 특성"이다. 여기서 "생성"(Werden) 개념은 이중적으로 파악된다. 그것은 포에지의 시공간화와 탈시공간화라는 모순적 특성을 말해준다. 다시 말하면, 포에지는 특정한 시공간에서 형성되지만 동시에 절대성을 향한 과정 속에 놓여 있기에 그러한 시공간적 유한성에 의해 제한되지 않는다. 이런 연유에서 "포에지에서 일어나는 것은 결코 일어나지 않거나 혹은 언제나 일어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진정한 포에지가 아니다"라는 양면성의 논리가 가능해진다. 이와 같은 포에지의 이중적 특성은 다시금 좁은 의미에서 예술 작품의 특성에도 그대로 적용됨으로써 개별 작품은 "제한성"과 "무제한성"이라는 양면적 속성을 갖게 된다.

"다각도로 예리하게 제한되어 있지만 그 경계 내에서도 그 어떤 한계 없이 무한정 할 경우, 즉 자기 자신에 충실하고 다각도로 균형이 있지만 동시에 자신을 뛰어 넘을 경우 작품이 형성되어 있는 것이다."

이처럼 포에지가 시간성과 탈시간성, 닫힘과 열림, 유한과 무한이라는 모순적 특성을 지닌다는 시각, 혹은 특정한 예술작품이 제한성과 무제한성을 지닌다는 시각은 후에 보들레르에게서도 반복된다. 그에 의하면 예술이란 일시적이고 유행적인 측면과 변하지 않는 영원불변한 측면, 즉 현대성과 절대성이라는 두 가지 특성을 지니는데, 이러한 모순적인 시각은 초기낭만주의에서 엿보이는 포에지의 특성과 정확하게 부합하고 있다.

 

V. "새로운 신화"와 포에지

 

1800년 [아테네움]에 발표된 슐레겔의 [포에지에 관한 대화]는 글자 그대로 포에지의 특징을 다각도로 규명하려는 초기낭만주의의 주옥같은 글로 간주된다. 그 글에서 포에지에 관한 논의는 대체로 이론적으로 전개되고 있지만, 글 전체의 특성은 마치 소설과도 같은 형식을 띠고 있다. 혹은 글의 등장인물 안토니오가 "소설의 이론도 그 자체 하나의 소설이어야만 할 것"이라고 요청하듯이, 글 자체가 그러한 "소설이론적 소설" 혹은 "이론적 에세이"의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이다. 글의 배경을 이루는 상황 설정도 매우 흥미로운데, 요컨대 몇 명의 친구들이 특정한 장소에 모여서 각자 자신의 글을 발표하는 듯한 상황 설정은 실제 초기낭만주의자들이 주기적으로 가졌던 독서모임인 "문학살롱"을 상기시키면서 동시에 그러한 역사적인 배경과는 무관하게 포에지 개념을 다각도로 조명하려는 글쓰기 행위를 나타내고 있다. 다시 말하면, 글 전체는 동시대의 삶을 반영하는 듯하면서도 동시에 포에지에 관한 포에지로서, 포에지를 이론적으로 배가하려는 포에지로서 읽혀지는 것이다.
[포에지에 관한 대화]는 포에지 개념 정의에서 출발하고 있다. 글의 서술자는 "이성이란 언제나 하나이자 모두에게 동일한 것이다. 그러나 모든 이가 자신의 고유한 특성과 사랑을 갖고 있듯이, 각자는 자신의 고유한 포에지를 자신 내에 지니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포에지의 새로운 측면이 제시되고 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이성과의 대립이다. "각자는 자신의 고유한 포에지를 자신 내에 지니고 있다"는 구절이 말해 주듯이 포에지는 통일성이나 획일성보다는 다양성에 특징을 두고 있는 것이다. 또한 포에지가 "형식 없고 의식 없는 formlos(e) und bewu tlos(e)" 특성을 지닌다는 대목은 포에지의 두 가지 특성을 암시해 주고 있다. 그 하나는 포에지란 완전한 형식을 갖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특성을 갖는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포에지와 무의식(혹은 꿈의 상태) 간의 연결이다. 특히 후자의 특성은 이성이나 합리성과는 관련이 없는 포에지의 특성을 강조해 주고 있다. 포에지의 근원이 의식적인 정신보다는 의식 이전의 상태인 꿈이나 무의식에 놓여 있다는 점은 정신분석학적 의미보다는 포에지의 실험적 특성을 강조하는 차원에서 이해되는데, 즉 꿈과 무의식이 주로 파편적인 장면의 자유로운 연결이라면 포에지도 그러한 특성을 지닌다는 것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포에지에 관한 대화] 글 자체가 그와 같은 다양한 형식의 글이 자유롭게 연결되는 실험적 특성을 지닌 포에지로 제시되고 있다는 것이다. 가령 글의 모두에서 서술자는 자신의 전반적인 시각을 밝힌 후 아말리아와 카밀라에 의해 주도되는 살롱의 분위기를 서술하고 동시에 네 명의 인물이 자신의 글을 발표한다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창작예술의 시대], [신화에 관한 연설], [소설에 관한 편지], [괴테의 초기 및 후기 작품에 나타난 다양한 문체에 관한 시도] 같은 제목으로 네 명의 인물은 각각 역사적 글, 강연 식의 글, 편지, 논문 같은 다양한 형태로 자신의 글을 발표하며, 또한 각각의 글이 발표되고 나면 그 글에 대한 토론적 행위가 뒤따른다. 요컨대, 이질적인 형식의 글이 자유롭게 연결되어 있는 [포에지에 관한 대화]는 곧 다양성 이념에서 출발하는 초기낭만주의의 포에지 특성을 간접적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네 개의 글 가운데 포에지 개념을 파악하는 데 가장 중요한 글은 루도비코의 [신화에 관한 강연 Rede  ber die Mythologie]이다. 제목으로 보면 "신화"에 관한 글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신화에 관한 글이 아니라 포에지란 무엇인가를 다루는 예술이론적 글임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고대 그리스 신화나 중세 신화에 관한 언급이 전혀 없고 관념론, 자연, 포에지의 상관 관계를 제시하는 글인 것이다. 그리고 신화라는 개념은 포에지 혹은 예술작품을 다른 식으로 명명한 은유적 기표라고 할 수 있다. 그 점은 상대방을 처음부터 압도하려는 강연 식의 수사적 어투로 새로운 신화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시작부분에 잘 나타나고 있다.

"나는 즉각 결론을 밝히겠습니다. 고대인들의 포에지에는 신화가 중심이었다면, 우리들의 포에지에는 그러한 하나의 중심이 부재해 있다고 저는 감히 주장합니다. 현대의 창작이 고대와 경쟁하는 본질적인 측면은 다음과 같은 말로 요약됩니다. 요컨대 우리는 신화를 갖고 있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부연하자면 우리는 하나의 신화를 가질 시점에 와 있습니다. 아니, 오히려 우리가 하나의 신화를 만들어 내는 일에 진지하게 참여해야 할 시간이 올 것입니다."

고대의 경우 신화와 포에지가 서로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었다면 현대의 경우 그러한 중심으로서의 신화가 부재해 있다는 것이며, 이러한 상황에서 새로운 신화에 대한 요청이 역설되고 있다. 그렇다면, 새로운 신화란 무엇일까? 그것은 우선 고대와의 차별성을 통해서 제시되는데, 즉 고대의 신화가 감성적인 세계에서 만들어졌다면 현대의 신화는 "정신"에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정 반대로 새로운 신화는 정신의 깊은 심연에서 만들어져야만 합니다. 그것은 모든 예술작품 중 가장 인위적인 예술작품이어야만 합니다." 정신에서 만들어지는 새로운 신화, 다시 말하면 인위적인 예술작품에 대한 요청은, 칸트 식의 자연미를 부정하면서 정신에 의해 만들어지는 인공미를 강조했던 헤겔 미학과 공통점을 형성하는 듯이 보인다. 또한 루도비코는 정신에서 만들어지는 새로운 신화에 대한 예로서 관념론(Idealismus)을 들면서 그것을 "혁명의 정신"이라고 명명한다. 여기서 정신이란 "자기 자신을 규정하고 영원한 변화 속에서 자기 자신에서 나오지만 다시금 자신에게로 되돌아가는" 것으로 정의되고 있다. 이러한 정신을 바탕으로 관념론은 실제를 만들어 내며 그 결과 정신적인 것과 실제적인 것이 통합된다. 루도비코에 의하면, 관념론은 새로운 신화에 대한 하나의 예일 뿐만 아니라 "간접적인 방식에서 새로운 신화의 원천"이라고도 언급되고 있다.
여기까지만 독서할 경우 포에지, 신화, 정신은 사실상 동어반복처럼 읽히며, 특히 물질, 육체, 감성보다는 정신이 강조됨으로써 초기낭만주의가 관념론적 헤겔 미학에 매우 가까이 놓여 있는 것처럼 읽혀진다. 그러나 자세히 읽어보면, 관념론은 단지 글자 그대로 "간접적인 예"에 불과할 뿐 포에지와 신화는 결코 "정신"에만 기초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또한 초기낭만주의와 관념론의 관계도 전혀 동일하지 않음을 명백히 알 수 있는데, 그러한 점은 "스피노자"가 도입되는 부분부터 드러난다.

"그(스피노자:역자)는 체계의 호전적인 장식을 벗어 던지고 새로운 문학의 성전에 호머와 단테와 함께 거주하며 신적인 영감을 지닌 시인의 수호신 및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입니다."

새로운 신화에 대한 요청 차원에서 스피노자가 언급되고 있지만, 사실 스피노자라는 이름은 그의 철학 때문에 언급되고 있기보다는 체계에 대한 거부, 상상력의 옹호, 자연에 대한 옹호, 이성보다는 혼돈, 개인적 방식의 신비주의 같은 포에지의 다양한 특징을 옹호하기 위한 은유적 기표로 작용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다양한 특징은 칸트, 피히테, 헤겔의 관념론적 사유와는 완전히 배치된다. 포에지의 독특한 특성을 강조하기 위해 스피노자라는 기표가 사용되고 있다는 점은 스피노자야말로 "포에지의 시작과 끝"이며, 그리고 "상상력의 본래성과 영원성"을 위한 토대라고 강변되고 있는 대목을 통해서도 읽어낼 수 있다. 아울러 "신비주의를 개별적인 방식으로 행하는 것에 대한 보편적 토대이자 근거"로 스피노자가 언급되고 있는데, 이것은 스피노자의 철학보다는 비의적(esoterisch)인 특성을 지닌 포에지를 강조하는 언술로 파악된다.
스피노자라는 기표를 통해 상상력, 신비주의 같은 포에지의 특성이 강조되고 있다면, 마찬가지로 신화도 특정한 신화적 소재와 관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작품"에 내재해 있는 구조적 특성을 가리키는 기표로 작용한다. 특히 "모든 것이 관계와 변화이고, 동화와 변형이며, 이러한 동화와 변형이 곧 신화의 본래 방식"이라고 언급되고 있는 대목을 보면, 신화란 동시대의 사회구조적인 차원에서 새로운 삶의 방식이나 정치 체계를 위한 요청이 아니라 예술작품 자체의 구조적 방식("관계", "변화", "동화", "변형")을 표현해 주는 기표임을 알 수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초기낭만주의가 내세운 신화에 대한 요청이 포에지 혹은 예술작품의 내적인 구성 방식과 관계된 것임을 명확히 알 수 있게 된다. 특히 신화와 "낭만적 포에지의 그 위대한 위트" 사이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언급되는데, 여기서 위트란 단순히 웃음을 불러일으키는 소재나 행위가 아니라 "전체의 구성 ganze Konstruktion"을 뜻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혼돈, 모순의 매력적인 균형, 도취와 아이러니가 서로 놀랍게도 영원히 변화하는 것", "순박한 통찰력"과 "바보 같은 모습"이 서로 함께 어울리는 것, 이러한 모순성이 곧 예술작품의 구조적 특성으로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신화라는 개념 하에 루도비코가 염두에 두고 있던 것은 특정한 신화적 소재와 내용보다는 예술작품의 내적인 구조이며, 이와 같은 신화와 예술작품의 관계는 다시금 포에지와 연결된다. 그 점은 "이성적으로 사유하는 이성의 진행과 법칙을 지양하고 우리를 다시금 상상력의 아름다운 혼돈 속으로 전이시키는 것이야말로 모든 포에지의 시작"이라는 대목에 표출되어 있다. 상상력과 이성, 신화적 세계와 합리적 세계, 포에지와 포에지가 아닌 것이 서로 대립을 형성하며, 이러한 대립을 슐레겔은 다른 글에서 다음과 같이 부연 설명하고 있다.

"상상력은 사물이나 객관적인 세계의 법칙에 구속되지 않으며 이성에 극단적으로 대치된다. 형식에 있어서도 이성과 상상력은 다르다. 이성은 모든 형상적인 것을 피하며 추상적인 것을 추구하지만, 상상력은 이와 반대로 형상적인 것을 추구하고 추상적인 것을 피한다."

이처럼 초기낭만주의가 포에지에 이성적 사유의 특성을 더 이상 부여하지 않은 것은 비합리적인 삶이나 역사로부터의 도피를 옹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포에지를 이성과는 질적으로 다른 영역으로 과감하게 정립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요컨대, 끊임없는 변화와 다양성을 지닌 포에지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기획되는 사회적인 요청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고유한 내적 원리와 작동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VI. 나가는 말

 

초기낭만주의는 고대를 전범으로 삼아 그것을 모방해 내려는 시도와는 결별하는 차원에서 포에지를 파악했다. 그런 점에서 낭만적 포에지란 자기자신을 끊임없이 변화시키고 변형시키려는 모든 현대 예술을 가리키며, 후에 이 점을 정확히 통찰했던 이는 보들레르였다. 그는 "낭만주의에 관해 말하는 사람은 곧 현대 예술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 즉 예술이 지닌 모든 수단으로 표현된 내면성, 유심론(唯心論), 색깔, 무한성에 대한 추구가 그것이다"고 밝힌 바 있다. 물론 보들레르도 여전히 내면성, 유심론, 무한성 같은 형이상학적이고도 관념론적 개념을 사용하고 있지만 그보다 더욱 중요한 측면은 낭만주의란 과거 예술과는 결별하는 현대 예술을 지칭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현대 예술이란 그 어떤 정지된 완전한 형태를 가질 수 없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잠재력을 지닌 예술을 뜻한다. 그런 의미에서 슐레겔은 "미적 교양의 절대적인 정지상태는 결코 생각될 수 없다. 현대적 포에지는 언제나 자신을 변화시킬 것"이라고 인식하였다.
또한 포에지와 관련된 초기낭만주의의 언술이 대체로 이론적 언어로 점철되어 있는 점도 매우 시사적이다. 그것은 예술이 더 이상 사회의 다른 부분영역(종교, 철학, 정치 등)에 의해서 설명될 수 없고 그 자체의 내적 작동 원리에 의해서만 인식되어야 했음을 말해 준다. 그런 점에서 "낭만주의는 문학으로서의 이론 자체"를 뜻하기도 한다. 요컨대, 상상력을 통해 자유롭게 작품을 생산해 내는 낭만적 포에지는 자신의 이론화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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