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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리의 수업/문학과 관련하여

브나로드운동

by 拏俐♡나리 2009. 11. 13.

브나로드운동 [v narod movement]
sunpa 


19세기 후반 러시아 젊은 지식인층에 의해 전개된 농촌운동.

브나로드는 ‘민중 속으로’를 뜻하는 말이다. 공동체 미르(mir:러시아의 독자적인 농민자치공동체)를 기초로 하여 자본주의 단계를 거치지 않고 사회주의로의 이행이 가능하다고 믿는 지식계층이 민중계몽을 위해 농촌으로 파고들었을 때에 '브나로드'를 슬로건으로 내세웠다.
이 슬로건 아래 1873년에서 1874년을 정점으로 하여 약 2,500명에 달하는 러시아의 진취적인 젊은 지식인층이 교사 ·의사 ·점원 ·노동자가 되어 농민에게 나로드니키(Narodniki)의 혁명사상을 선전하였으나 기대한 만큼의 성과를 얻지 못하고 1874년 가을까지 많은 선동자들이 검거되어 이른바 ‘193인 재판’에서 처벌을 받았다. 이 운동은 농본주의적 급진사상으로 발전하는 1870년대의 혁명적 나로드니키의 출발점이 되었다. 한국에서도 이 운동의 영향을 받아 1931년부터 1934년까지 브나로드운동이 농촌계몽운동으로 전개되었다.


나로드니키 [Narodniki]  
  
19세기 후반 러시아에서 사회주의혁명운동을 실천한 세력. 인민주의자(人民主義者)라는 뜻의 러시아어이다.

1861년 농노해방을 에워싸고, 농노소유자로부터의 인신해방(人身解放)과 봉건성(封建性)의 타도를 위하여 발생한 이 이데올로기는 서유럽 부르주아체제의 실태를 봄으로써 충격을 받았으며, 자본주의를 뛰어넘어 사회주의에 이를 것을 꿈꾸고 러시아 후진성의 상징이었던 농촌공동체를 그 기반으로 삼았다. A.I.게르첸과 N.G.체르니솁스키는 비밀결사 '토지와 자유파'를 만들어 활약하였다. 그들은 "인민 속으로(브나로드:V narod)"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농민에 대한 계몽운동을 벌였다. 1874년 봄부터 여름에 걸쳐서 이루어진 이 운동이 탄압으로 분쇄된 후 혁명노선을 두고 대립이 생겼으며, 1879년 '인민의 의지파(Narodnaya volya)'와 '흑토(黑土)재분할파(Chyornyi peredel)'로 분열하였다.

'인민의 의지파'는 '토지와 자유파'의 중앙집권적 음모집단의 원칙을 계속 지키면서 테러 중심의 전술을 썼으며, 차리즘(황제에 의한 전제적 정치체제)에 대해서 과감히 공격하여 알렉산드르 2세의 암살에 성공하였으나, 조직도 큰 손해를 입었다. 1880년대 중반부터는 지방활동에도 중점을 두기 시작하였으며 노동자 계몽에도 착수하였다. 제랴보프·페로프스카야·피그네르·키바리티치 등이 중심이 되어 기관지 《인민의 의지》 등을 1880년대까지 계속 간행하였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의 영향력이 커짐에 따라 힘을 잃었으며 일부는 러시아사회민주당에 가입하였다.

'흑토 재분할파'에는 프레하노프·아크세리로드·데이치·자스리치 등이 가입하였다. 19세기 말부터 러시아의 자본주의가 급속히 발전하자 나로드니키는 자유주의적 색채가 강해지고 혁명적 성질이 상실되었다. 농민 분여지(分與地)의 확대, 농민은행의 확대, 시민권의 보증 등을 요구한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의 자유주의적 나로드니키는 마르크스주의와 대립하였으며, 레닌은 이 경향과 정력적으로 싸워야 하였다.

1902년 이들 나로드니키파들이 러시아사회혁명당(SL)을 만들었으나, 볼셰비키혁명 후 내부분열이 일어나면서 혁명운동의 주류는 나로드니키에서 볼셰비키에게로 이행되었다.




한국의 농촌계몽운동 [農村啓蒙運動]  
  
학생이나 학식 있는 지도자들로 구성된 단체가 농촌을 대상으로 하여 교양을 기르고 사상을 깨우치며 생활을 개선하고 보건위생 등을 교화, 보급하고자 하는 운동. 한국에서는 일제강점기에 민족주의 계열이 주도한 농민·농촌 계발운동이 그 시초였다. 주로 농촌의 교양수준 향상, 생활의 질적 개선, 보건위생에 대한 인식 확대, 생산성 향상 또는 국가정책에 대한 교화·보급에 역점을 두었다. 이 운동은 자본주의의 발달에 따라 도시와 농촌간의 생활·문화양식 및 그 수준의 커다란 지역 차이 때문에 더욱 강조되었다.

농업기술 및 토지소유제도의 정체성 등에 바탕을 둔 사회집단으로서의 농촌의 후진성, 교육·문화 수준의 질적 문제, 빈곤·과중노동·인구·보건위생의 문제, 농촌의 여성·청년 문제 등이 도시지역에 비하여 수준이 낮으며, 발전이 정체되어 있다는 점이 문제시되었다. 따라서 도·농간의 위화감, 농촌의 정치적·경제적 낙후성 극복이 우선과제였다. 농촌의 문맹을 위한 야학 개설, 새로운 영농 방법의 지도 등이 모두 농촌계몽운동의 일환으로 추진되었다.

한국의 새마을운동, 러시아의 브나로드 운동 등은 농촌계몽운동의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박정희의 절대적인 후원과 우수한 남녀 새마을지도자, 그리고 정부(공무원과 정부지원)라는 3자의 연합이 핵을 이루면서 추진된 새마을운동은 정치적 의미가 어떠하든 1970년대의 경이적인 경제발전의 기틀이 되었다.

러시아에서는 1861년 나로드니키(인민주의자)들이 농노해방을 중심으로 농노의 인신해방(人身解放)과 봉건성(封建性)의 타도라는 기치를 내걸고 브나로드 운동을 벌였다. 후진성의 상징이었던 러시아 농촌의 공동체를 그 기반으로 삼은 이들은, 자본주의를 뛰어넘어 사회주의에 이를 것을 꿈꾸었다. 농민 분여지(分與地)의 확대, 농민은행의 확대, 시민권의 보증 등을 요구한 나로드니키는 마르크스주의와 강하게 대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