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을 통해서 보는 ‘작품론’과 ‘작가론’
양백산인 박희용
이문열, 그의 문학. 당대에도 대중적인 호평을 받지만 몇 백 년 후세에도 20세기 말 한국문학사의 한 봉우리를 이루는 문학으로 자리매김 받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왜냐면 후세의 문학사가들이 그의 문학을 평가할 때 당대에 행한 언행보다는 활자로 남은 그의 작품을 중심으로 조명하기 때문이다.
40대까지의 치열한 창작기를 거친 다음인 40대 중반 이후, 1990년대 이후에 그가 가끔 보인-그는 정당한 발언이었다고 여태 생각하겠지만, 많은 진보적 지식인들이 보기엔 황당한-반역사성, 반시대적 뻘짓은 한갓 야사, 문학외적인 가십거리 정도로 여겨질 뿐, 그의 문학과 유명세를 이어주는 데는 거의 방해물이 되지 않을 것이다.
문학과 인간이 괴리되는 경우는 멀리는 송강 정철에서부터 볼 수 있다. 그는 당파와 숙청 주모자임에도 그의 사미인곡 등은 충의 대표작으로 조선조 때도 주류문학이었고 오늘날에도 한국문학사에 귀하게 대접받고 후세들의 감성과 의식을 배양하기 위한 중등교육 교과서에 실리고 있다.
가까이는 이광수에게서 볼 수 있다. 이기형 시인이 한국작가회의 ‘내일을 여는 작가 51권’의 ‘한용운과 이광수를 방문한 이야기’ 73쪽에서,
<일본 옷 하까마를 입고 있었다. 병풍 앞 얕은 상에는 불상을 모셨는데 촛불이 켜졌고 향불이
피워져 있었다.
‘오이 나니 스루노(얘 뭣들 하는 거야)?’
그는 아이들과 일본말을 주고받았다.>
라고 쓴 대로 골수까지 일본화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21세기 초 현재에도 그의 작품은 계몽기 문학의 태두로 한국문학사에서 높이 대접받고 있다.
그들이 한국문학사에서 유명세를 유지하고, 대대로 후한 대접을 받는 이유 가운데에서 가장 뚜렷한 것은 ‘작품에 관류하는 우수한 문학성’이다. 물론 그들의 높은 벼슬과 사회적 지위도 문명을 끌어올리는데 역할 하였겠지만 그래도 우수한 작품을 많이 썼기 때문에 그만한 문학사적 지위를 얻을 수 있었다. 누가 무어라 해도 그들의 작품이 고급 문학성을 갖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런데, 이렇듯 우수한 문학작품을 써서 수백 년에 걸쳐 대중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훌륭한 작가들임에도 불구하고, 뜻있는 후세 작가들로부터는 천한 대접을 받는 까닭은 무엇일까?
이러한 괴리가 왜 생겨나는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볼 문제가 바로 ‘작품론’과 ‘작가론’의 관계이다.
‘작품론’을 안경으로 해서 보면 정철이나 이광수, 이문열 등이 크게 보인다. ‘작가론’을 중심으로 보면 이육사와 윤동주 등이 보인다. 정철, 이광수, 이문열 등은 매우 문학성이 화려한 우수한 작품을 생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현실 역사상에선 민중의 요구에 상반되는 언행을 하였다. 이육사와 윤동주 등은 문학성이 화려하지 못한 작품을 소량 생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현실 역사상에선 민중의 요구에 부응하는 언행을 하였다. 작품론과 작가론 둘 중에서, 대중적인 작가나 독자들은 어느 것을, 뜻있는 작가나 독자들은 어느 것을 선택할까?
물론 작가론과 작품론이 합치되는 경우도 많다. 허균, 박지원, 김만중, 한용운, 김지하, 황석영, 조정래 등은 작품도 우수하고 언행과 역사적 실천에서도 우수하다.
이문열, 필자가 처음으로 그를 알게 되고 읽어본 작품은 1970년대 중반 동아일보 신춘 당선작 ‘세하곡’이다. 군복무시 외출 나가서 산 월간지 신동아에 들어있는 그 작품을 단번에 재미있게 읽었다. 그의 고향이 같은 영남이고 이웃인 영양이라서 개인적으로 호감을 가졌다. 이후에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등 몇 권 소설집을 읽고, 삶에 대한 청춘의 고뇌를 무척 많이 앓고 있으며 문장력이 우수한 소설가로구나 하는 평가를 내렸다.
그 후엔 그의 이름을 잊어버렸는데, 90년대부턴가 그의 이름이 슬슬 언론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작품에 관한 이야기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정치성을 띤 그의 일상적 말과 행동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더니 어느 당 공천심사위원장으로 화려하게 뜨고, 독자들과 그의 작품집 소장가들로부터 분서를 당하고, 진보정권 10년 내내 수구세력의 주논객으로 대진보전선의 입이 되고, 2008년 유월 현재 ‘촛불장난’과 ‘반촛불 의병 봉기’ 독설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로 하여금 ‘오늘의 작가상’을 받도록 해 대중적 명성을 일거에 얻도록 한 ‘사람의 아들’은 종교와 사상, 철학의 문제를 깊이 천착한 명작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요즈음에 와서는 그 사상성이 더욱 익어서 불후의 대작을 형성하지 못하고, 삼국지나 초한지 등 고전 개작, 문학성이란 돋보기로 훑어봐도 찾을 수 없는 정치성 발언 -그것도 수구성의- 등에 치우치는 것은 그의 문재를 아끼는 사람들로서는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또,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한 작가의 저서가 일부 독자들에 의해 불태워진다는 것은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참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의 문학정신이 고갈되면서부터 그의 정치성이 솟아났다고 할 수 있다. 그는 40대 중반까진 그래도 매우 치열한 문학정신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후부터는 생물적 한계에 따라 두뇌 능력이 소멸기로 접어들면서 문학정신이 고갈되어버린 빈자리를 정치성, 물욕, 명예욕이 채워버리기 시작했다.
이문열 그의 일생은 앞선 시대의 정철과 이광수 -전반기 젊은날의 화려한 문재와 후반기 늙은날의 화려한 장식-의 일생을 잇는 선상에 놓여있다. 그 선은 인류에게 정신과 문화의식이 살아있는 한은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문학 자체가 이미 ‘문학성’과 ‘실용성’이란 두 속성을 운명적으로 공유하기 때문에 ‘작품’을 쓰는 ‘작가’로 하여금 작품 이외의 것을 욕망하도록 하고 있다. 그 욕망의 출로가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는 길이면 ‘작품’에 걸맞은 ‘작가’가 되는 것이고,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지 않고 사적이나 당파적인 요구에 부응하면 ‘작품’과 ‘작가’가 따로 노는 것이다.
‘문학성’과 일란성 쌍둥이인 ‘실용성’이란, 사적이고 당파적이며 명예란 이름으로 장식된 물욕이 아니라 공적이며 시대적이며 민중적이며 실천적인 정신욕이다. 많은 작가들이 그들의 천부적인 문재의 산물인 우수 작품에도 불구하고 뜻있는 후세 작가들로부터 배척당하는 까닭은 ‘실용성’에 대한 해석과 처방에 오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오류는 이전까지에 입력된 지식과 정보, 경험에 의해서 발생하는데, 그 오류를 발견하고 미처 수정하기도 전에 오초본드를 뿌린 것처럼 굳히는 것은 아집이다. 그 아집은 생물적 한계에 따라 육신의 쇠약과 함께 진행되는 두뇌의 쇠약 때문에 생긴다.
그들의 두뇌는 이미 오초본드로 굳혀졌기 때문에 뜯어내어 수정할 수가 절대로 없다. 한 가지 방법이 있다면 망치나 드릴로 단번에 내리쳐서 온전한 파괴 다음의 재조립이다.
문학에서 말하는 ‘실용성’이란 작가 개인의 이익을 위한 실천이 아니라 민중의 이익을 위한 실천을 의미한다. 당대의 민중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느냐, 무엇을 요구하고 있느냐, 역사가 어느 방향으로 어떻게 흐르고 있느냐, 민중과 역사의 진보를 방해하는 것들은 무엇이고 어떻게 처리할 것이냐 등의 문제에 대하여 골똘히 생각하고 행동화 하는 게 바로 ‘실용성’이다.
‘작가론’은 곧바로 ‘실용성’과 이어진다. 민중과 역사에 무한한 책임을 지는 의식과 행위는 ‘실용성’에 충실하게 되고, 그 ‘실용성’은 곧 ‘작가론’으로 표현된다.
허균, 연암, 만해, 김지하, 황석영, 조정래 등 작품론과 작가론이 합일 되는 경지를 이룬 많은 선배 작가들의 삶이 있기에, 작품론이 승한 정철, 이광수, 이문열 따위의 대중적 유명세를 탄 작가들의 삶이 후배 작가들에게 일반화 되지 못한다.
21세기 초의 한국문단, 한국작가회의, 경북작가회의를 구성하는 작가들은 작품론과 작가론 중 어느 쪽에 무게 중심을 두고 있을까. ‘민족’을 중심 정조로 하는 한국작가회의, 그 하부를 이루는 경북작가회의에는 작품론과 작가론이 동전의 양면을 이루고 있음을 잘 알고 있는 작가들이 그 둘을 합치하기 위하여 묵묵히 창작 작업에 몰두하고 있지만, 게 중에는 문학정신이 고갈된 빈자리에 명예욕과 출세욕이 차오른 ‘실용성’ 오류자들이 있지나 않은지, 이문열의 경우를 반면교사로 삼을 일이다.
‘작품 창작과 감상이라는 문학 본연의 순수함을 멀리하고 세속적 지위와 물질적 풍요를 잣대로 하는 문단 교류 풍조, 순수 작가의 말이나 감상보다는 대학 교수의 평가를 더욱 중요시 하는 경박한 물신주의 풍조, 출판과 비평이 문학 권력화 되어 있는 카오스 현상, 시는 짧은데 해설은 긴 이상한 신문 시평들 -시인이라 자부하는 자여, 제발 시보다 긴 산문 쓰지말라, 조상 뼈다귀 자랑하듯 수십 년 전의 등단을 수십 년 동안 울궈먹는 옛시인과 그에 동조하는 후배 문도들, 문단 마당발을 자랑하며 그것으로 한 행세하는 작가들, 우리 지역성을 내세워 슬슬 문도들을 끌어 모아 시군 단위 지역 문단 맹주로 자족하려는 작가들, 명분은 그럴듯 하다만 한 눈에 훤히 꿰이는 크고작은 문단 파벌, 원고지에 쓰는 손품보다는 발품과 입품을 팔아 문명을 얻고 유지하는 작가들, 시와 소설 창작 알기를 우습게 여겨 작은 재주로 기웃대는 문자 좀 아는, 예술 좀 아는 지식인들, 특히 창작이 주이고 비평은 종임에도 불구하고, 고등학교 교과서 수준의 문학 쟝르 6분법에 의지해 비평이 창작보다 앞선다는 요상한 자위 현학으로, 그것도 대학 강사급 이상 비평가는 늙든 젊든 신으로 받드는 문학 사춘기들, 등 등. 아 언제나 검은 구름이 지나가고 청청백일 아래 순수 문학이 오랴!
이러한 행태들도 결국은 핏기 떨어지고 문학정신이 고갈된 후반기부터 써먹을 명예와 물질을 마련하기 위한 준비라고 보는 건 필자의 무지, 편견 때문일까?
작가’는, ‘시인’과 ‘소설가’란 명칭은 영속성을 갖는 게 아니다. 등단은 그 사람이 ‘작가’란 명칭을 받을 만큼 작품이 익었다는 뜻이지 이후에 작품이 생산 되지 않거나 생산되어도 품질이 조잡한 경우에도 여전히 갖는 명칭이 아니다. 그러므로 ‘시인’과 ‘소설가’란 명칭은 유통기한을 갖는다. 그러므로 이제 등단하였다고 나는 영원한 시인이요 소설가라고 자부해선 안 된다. 시를 쓰는 순간만이 시인이요 소설을 쓰는 순간만이 소설가인 것이다. 나머지 시간은 그냥 ‘사람’이다. 작품을 쓰는 시간에는 '작가'가 수면 위로 떠오르고 일상의 시간에는 '사람'이어야 그의 문학이 '작품성'과 '실용성'을 함께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하루 종일, 일 년 내내, 평생 동안 나는 시인이요 나는 소설가요 하고 으스대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소잡한 짓인가. 그 소잡한 으스댐이 작게는 지역 문단, 크게는 전국 문단에서 ‘문학 정신’의 고갈과 ‘실용성’의 오류를 초래하고야 만다는 필연의 법칙을 통찰하는 자만이 작품론과 작가론을 합치할 수 있을 것이다.
2008년 6월 21일 열락연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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