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가곡 ‘동심초’의 노랫말을 우리나라 사람이 지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사실은 당(唐)나라의 기생인 ‘설도(薛濤)’의 詩이다. 설도(770~832)는 송나라의 이청조와 함께 중국 여류시단을 대표하는 인물로서 당시의 최고 문인들인 백거이(白居易), 원진(元[禾眞]), 유우석(劉禹錫), 두목(杜牧) 등과 교류했으며 특히 원진과의 정분은 각별했다고 한다. 두 사람의 관계는 다음 두 가지 이야기로 전해진다. 1 원진(779~831)은 설도보다 10여세 연하로서 자는 미지(微之)이며. 9세 때부터 시를 짓기 시작했고 15세 때 과거에 급제한 수재였다. 그는 백거이와 아주 절친한 관계였고 그와 더불어 알기 쉬운 새 시풍을 개척했는데, 사람들은 그들을 경박하고 속되다며 비방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는 나중에 권력 다툼에 기인해 중앙에서 밀려나 동천(東川, 혹은 통주(通州))에 좌천되었다. 약 5년 후에 백거이도 '강주'라는 곳으로 귀양을 갔다. 809년 3월 설도와 원진이 처음 만난다. 당시 원진은 동천으로 좌천되어 와 있었는데 설도의 문명(文名)을 듣고 사모해서 방문하게 된다. 설도 역시 원진의 문학적 재능을 높이 평가했다. 설도는 자기가 직접 만든 아름다운 색종이에 백여 편의 시를 써서 그에게 주며 그의 마음을 위로해 주었고, 원진 역시 설도에게 향한 정을 시로써 화답하며 사랑을 나누었다. 얼마 후 두 사람은 이별을 하게 되는데, 그때 둥근 벼루를 반으로 나누어서 하나씩 간직하며 다시 만날 날을 기약했다. 그러던 중 원진은 옛 은사였던 위하경(韋夏卿) 을 만난 적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 스승은 원진이 기생을 좋아하고 있다고 책망하면서 자기 질녀(姪女)를 아내로 삼기를 권하였다. 세월이 흐른 후 원진과 설도는 성도에서 만나게 되었다. 그러나 위(韋)씨녀가 원진을 사랑하여 그 벼루를 잡고 가는 것을 막았고 급기야 벼루를 시냇물에 빠뜨려 버리고 말았다. 설도는 자신의 한계를 느꼈고 원씨 문중과 부딪칠 수 없음을 알았으며, 또 위씨녀 때문에 사랑이 깨어지는 아픔을 감수해야 했다. 결국 원진과 위씨녀는 결혼을 했고, 설도는 홀로 남아 외로운 난새가 되어 버렸다. 2 원진이 설도를 만날 때 약 30세의 나이였는데 이미 처가 있었고, 설도를 만난 후 약 2년 후에 다른 여자를 첩으로 들였다고 한다. 그리고 다시 4년 후에 또 배(裴)씨 여자를 들였다. 이것은 아마도 그는 설도에 대해 단지 풍류 끼를 발휘한 것이고 처음부터 설도와 함께 맺어질 생각이 없었을 것이라는 말이 된다. 사실 그렇지 않았다 해도 두 사람은 설도의 조건 때문에 맺어지기 어려웠을 것이다. 우선 설도는 악기(樂妓)였고, 원진보다 10년 정도 연상이었을 뿐만 아니라, 천한 집안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명문 출신도 아니었고, 설도의 나이는 이미 청춘을 벗어나고 있었다. 40세나 되어서야 마음을 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난 설도였다. 하지만 이미 그것은 떨어진 꽃의 심사(心思)였고, 그녀에게 오로지 정을 바칠 수 없는 원진은 흘러가는 바람이었다. 사람은 찾았으나 영원히 마음을 엮을 수 있는 '동심인(同心人)'이 되지는 못한 것이었다. 설도는 비록 원진과 함께 할 수는 없었지만 죽을 때까지 그를 사랑했다. 설도는 성도(成都)의 완화계(浣花溪)라 불리는 시냇가에 살았다. 집이 창포(菖蒲) 꽃으로 가득했고, 설도는 대나무를 무척 좋아했다고 한다. 성도에는 현재 설도를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망강루(望江樓)공원이 있는데 약 130 종 이상의 대나무가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녀는 성도의 종이의 폭이 너무 넓다고 생각해서 직접 종이를 만들어 사용했다. 곧 완화계의 맑은 물을 사용하고 연꽃즙을 집어넣고 해서 여러 색깔의 작고 아름다운 종이를 직접 만들었던 것이다. 그녀는 그것을 가지고 다니다가 거기에 시를 쓰곤 했다. 그래서 이 종이를 ‘설도전’ 또는 ‘완화전’이라고 부른다. 후에 많은 문인들이 이 종이에 대해서 시를 썼다고 한다. 지금은 중국사회도 산업화로 인해 민간에서 종이를 만드는 기술이 거의 사라졌기에 중국에서는 '설도전'이 큰 의미를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대만민속촌(台灣民俗村)에는 과거에 어떻게 종이를 만들었는지를 보여주는 전시관이 있는데 그 관의 이름이 바로 '설도장(莊)'이다. 설도는 계속 시를 썼고, 후에, 당시의 기록에 의하면 도교의 사제가 되었다고 한다. 그녀는 약 450편의 시를 썼다고 전하는데 지금은 약 90수만 남아 있다. 하지만 이 숫자만으로도 당대(唐代)의 어떤 여류 시인의 글보다 많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동심초는 설도(薛濤)의 시 춘망사(春望詞) 4수(四首) 중에 3수를 소월의 스승이기도 한 안서 김억이 번안한 것이다. 동심초 2절 가사는 춘망사 제 3수 1, 2행을 1절과 다르게 번역한 것이라 한다. 자, 그럼...... 꽃잎은 하염없이 바람에 지고 만날 날은 아득타 기약이 없네 무어라 맘과 맘은 맺지 못하고 한갓되이 풀잎만 맺으려는고 한갓되이 풀잎만 맺으려는고 바람에 꽃이 지니 세월 덧없어 만날 길은 뜬구름 기약이 없네 무어라 맘과 맘은 맺지 못하고 한갓되이 풀잎만 맺으려는고 한갓되이 풀잎만 맺으려는고 1946년 김성태 作曲 김억 譯詩 성악곡 ‘동심초‘는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안겨주었다. 참고로 간혹 어느 성악가 음반 자켓에 ’동심초‘가 신사임당 시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그럼 설도의 춘망사(春望詞) 四首를 들어보자 (一) 花開不同賞 (화개불동상) : 꽃 피어도 함께 즐길 이 없고 花落不同悲 (화락불동비) : 꽃 져도 함께 슬퍼할 이 없네 欲問想思處 (욕문상사처) : 묻노니 그대는 어디에 계신고 花開花落時 (화개화락시) : 때맞춰 꽃들만 피고 지네 (二) 攬草結同心 (람초결동심) : 풀을 따서 한마음으로 맺어 將以遣知音 (장이유지음) : 지음의 임에게 보내려 하는데 春愁正斷絶 (춘수정단절) : 봄 시름은 속절없이 끊기고 春鳥復哀吟 (춘조복애음) : 봄새들은 다시와 애달피 우네 (三) 風花日將老 (풍화일장로) : 꽃은 바람에 날로 시들어 가고 佳期猶渺渺 (가기유묘묘) : 만날 날은 아득히 멀어져 가네 不結同心人 (불결동심인) : 그대와는 한마음 맺지 못하고 空結同心草 (공결동심초) : 부질없이 풀잎만 맺었는고 (四) 那堪花滿枝 (나감화만지) : 어찌 견디리 가지 가득 핀 저 꽃 煩作兩相思 (번작양상사) : 괴로워라 사모하는 마음이여 玉箸垂朝鏡 (옥저수조경) : 눈물이 주루룩 아침 거울에 떨어지네 春風知不知 (춘풍지불지) : 봄바람은 아는지 모르는지 그렇다면 ‘동심초’라는 의미가 무엇일까? 노랫말을 보면 "꽃잎은 하염없이 바람에 지고"로 시작하고 있어 ‘아! 동심초 꽃잎이 바람에 지는구나’하고 생각하기가 쉽지만, 사전에 보면 동심초라는 단어가 없다. 중국말 사전에도 동심초라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엄밀히 말하면 동심초라는 꽃이나 식물은 없다는 말이다. 그러면 동심초는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은 무슨 풀이름이 아니라 바로 연서(戀書), 곧 러브레터란다. 노랫말에 나오는 동심초(同心草)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동심쇄(同心鎖)를 보면 금방 이해가 될 거라 한다. 중국의 산에 가면 쇠사슬에 자물쇠로 달아 놓은 것을 많이 볼 수 있단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영원한 사랑을 바라는 마음으로 매다는 풍속이라고 한다. 그런데 왜 '풀 초(草)'가 들어가는가? 종이는 풀로 만드는 것이며 연서를 접는 방식이 바로 돗자리 짜는 풀의 매듭방식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란다. 동심초(同心草), 동심인(同心人), 동심쇄(同心鎖) 전부 같은 배경에서 나오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영원한 결합을 의미한다. -출처: 여기저기서 따고 보태고 다듬어서 옮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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