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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리의 수업/작가, 작품론

[스크랩] 이기영의 장편소설..........고향

by 拏俐♡나리 2011. 2. 11.

장편소설 ‘고향’ 베스트셀러 오르다


 

 

농민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연 민촌 이기영. <고향> 문학사상가 인용


주인공 이름을 ‘공산’이라고 한 것부터 맑스주의자를 색골로 그린 이광수(李光洙) 장편소설명색 <혁명가의 아내>를 꾸짖고자 쓴 것이 <변절자의 아내>였다. <신계단>에 연재하기로 하였으나 1회분만 실리고 원고를 빼앗긴다. ‘카프작가’들에게 더욱 모지락스런 일제 검열을 뚫고 발표한 것이 중편 <서화(鼠火)>였는데, 3·1운동을 앞뒤로 한 농민들 삶을 속속들이 현실 속에서 그렸을 뿐 아니라 농민들이 두루 지니고 있는 소소유자로서의 두길보기를 거짓없이 보여준 작품으로 높은 값을 받았다.

1933년 7월 17일부터 8월 말까지 한 40일 동안 고향 성불사(成佛寺)에서 쓴 것이 <고향>이었다. 한 2000장 되는 애벌글로 생각이 잘 풀리는 날에는 100장 위를 쓴 적도 있을 만큼 검님(신명)이 올랐던 민촌이었다. 1933년 11월 15일치부터 이듬해 9월 21일까지 <조선일보>에 연재되어 독자들한테 커다란 손뼉을 받은 <고향>은 검열로 꺾자당한 곳이 적지 않았음에도 2500장을 넘는 부피였다.

그런데 <고향>을 연재 중이던 8월 25일 딴 이름 ‘신건설사사건’, 곧 제2차 카프사건이 터지면서 민촌은 전주형무소에서 16개월 동안 징역을 살게 된다. 잡혀간 카프 동아리들이 모두 200명이나 되었는데, 프로문학의 이론적 목대잡이였던 팔봉(八峰) 김기진(金基鎭), 회월(懷月) 박영희(朴英熙) 같은 거의 모든 카프맹원들이 사상 전향을 하게 된다. “얻은 것은 이데올로기요 잃은 것은 예술”이라는 유명한 박영희 ‘전향의 변’이 나온 것도 이 무렵이다.

이광수의 ‘흙’보다 두 배 이상 팔려
1935년 여름 경성경찰부에서 여러 차례 김남천(金南天)을 불러 카프를 흩어버릴 것을 윽박질렀고, 1935년 5월 21일 문학부 책임자였던 김기진 이름으로 카프 해산계를 내게 되니, 1925년 8월 비롯된 이래 10년 만에 카프는 그 막을 내리게 된다. 이때 끝까지 지조를 지켜 전향을 하지 않은 것은 딱 세 사람이었으니, 민촌과 한설야, 그리고 평론가 안함광(安含光)이었다. 여기서 골칫거리가 되는 것이 일제강점기 리얼리즘소설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로 꼽히는 <고향>이다. 연재 동안 작가가 잡혀갔으므로 연재가 동강나게 되었던 것이다. 다음은 김기진 증언이다.

“이기영은 그때 조선일보에 <고향>이라는 장편소설을 쓰고 있는 중이었으므로 만일 자기가 나보다 먼저 붙잡혀 가게 되거든 <고향>의 원고를 나더러 계속해서 써주는 동시에 신문사에서 주는 원고료를 자기집에서 찾아가도록 해달라는 부탁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것을 승낙하였다. 그러자 과연 이기영이 먼저 붙들려 가고(9월 하순경) 나는 12월 7일에 검거되었는데 이 동안에 나는 이의 집으로부터 <고향>의 신문 절취철을 가져다가 처음부터 읽어보고서 그 소설을 끝맺어 주기에 신문 횟수로 35,6회를 매일 계속해서 집필하였던 것이다. 나는 병원에 누워 있었고 내 원고는 이의 처남이 날마다 신문사에 날라갔었으므로 신문사에서도 내가 쓰는 것임을 알지 못했다. 그후 이것이 상·하 두 권으로 출판되었을 때, 이때 나는 이더러 <고향>의 최종 35,6회분을 본인이 다시 집필하여 고쳐 가지고서 출판하라 하였건만 이는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고 하고서 그대로 단행본을 내놓았다. 그런 까닭으로 지금도 <고향>의 말단은 내가 쓴 그대로이다.” (김팔봉 ‘한국문단측면사’ <사상계> 1956. 12)

그런데 이런 팔봉 말에 다른 생각을 다는 사람이 있다. 바로 민촌 손자인 이성렬이다. 이성렬이 2006년 펴낸 <민촌 이기영 평전>을 보자.

<고향>의 마지막 36회분의 시작은 ‘34. 경호’ 편의 ‘이 바람에 경호는 오랫동안 참고 있던 분한 생각이 (…)’로 시작되는 1934년 8월 8일자 연재분(217회)이다. 그로부터 그해 9월 21일자의 마지막 연재분(252회)까지는 전체의 약 1/7에 해당된다. 또 40여 회(전체의 약 1/6)를 김기진이 더 썼다면 ‘33. 재봉춘’부터, 또는 그 이전부터 김씨가 이어 썼는지도 모른다.

연재중 체포돼 김기진이 대필
‘9월 하순경’에 민촌이 ‘붙들려 가고’ 그해 8월 8일부터 <고향>을 이어 썼다는 김씨의 기억에는 문제가 있다. 필자가 조사한 민촌의 검거 시점은 그해 25일이다(<조선일보> 1934. 8. 26 보도). 아무래도 아귀가 맞지 않는다. 이상한 일이다. 김씨는 8월 26일 이후 20여 회분만 대필했을지도 모른다. 전문가라면 문체의 차이를 식별하여 양인의 글을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고향>의 종반부에는 왜말에서 유래하는 속어도 종종 튀어나오는데 이는 그 전반부나 또는 민촌의 다른 작품에서는 좀체로 나타나지 않는 현상이다. 또 맞춤법의 기준이 없었을 때이므로 철자법과 띄어쓰기를 비교함으로써도 그 구분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수고를 들이지 않더라도 갑자기 글의 속도감이 떨어지고 장황해지며 전체적으로 지리멸렬해지는 것을 웬만한 독자라면 다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고향>의 전반부 민촌의 글은 짧고 빠르게 전개되며, 관념을 그대로 표출하지 않고 구체적으로 형상화하되 결코 장황하지 않은 서술로 상황을 적확히 묘사하고 있는 데 반하여, <고향>의 끝부분에서는 사건의 전개가 느려지고 관념이 그대로 표백되는 경우가 많이 나온다.

김씨의 대필 부분에 확대경을 들이댈 필요가 있다. 다음은 <고향>에 대한 문학평론가 김재용 교수 평이다.

그는 시종일관 농민소설을 창작했는데, 일본 독점자본의 진출로 인한 식민지자본주의에 의해 끊임없이 양극분해되어 가는 조선 농민의 현실을 그렸다. 특히 노동자의 눈으로 농민을 보았기에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다른 농민소설과는 그 근본부터가 다르다. 당시 대부분의 농민소설 작가들은 농민이 노동자계급과 어떤 연관관계를 맺고 있으며 또한 그 관계가 전체운동 속에서 어떠한 위상을 차지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인식을 결여하고 있던 반면, 이기영은 식민지자본주의에 의해 끊임없이 양극분해되어 가고 있는 농민계급은 더 이상 봉건시대처럼 단일한 계급일수 없으며, 특히 빈농계급은 반제국주의적 입장을 가짐으로써 노동자계급의 믿을 만한 동맹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농민작가들이 농민적 입장에서 농민운동을 보고 전체운동의 관점에서 농민운동을 보려고 노력하였으며, 이것에 근거하여 농민소설을 발표했다. 그가 쓴 작품들 중에는 노농동맹을 주제로 한 소설들이 많이 있으며, <고향>은 이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그리고 그가 농민의 전형을 그리면서 주의깊게 본 점은 농민의 소소유자적 특성에 대한 관찰이다. 농민들 중에는 약간의 생산수단의 소유로 생활의 환상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쉽게 노동자의 세계관을 가지기 힘든 면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기영은 농민의 이런 속성에 대해서도 눈을 감지 않고 자세하게 관찰하여 작품화하였다. 이처럼 이기영은 농민의 변혁주체로서의 가능성과 그 한계를 일본독점자본의 침탈로 인한 식민지자본주의라는 전체 현실과의 연관 위에서 그려내었다.

민촌은 왜 <고향> 마무리가 제 처음 뜻과는 아주 뒤쪽으로 이제까지 내려온 봉건도덕관념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하는 바보짓을 하였을까? 다음은 이성렬 어림짐작이다.

 

 

 

 

<고향>의 무대인 천안시 유량동. 밭 언덕 아래 내려다보이는 집이 이기영이 살았던 집. <고향> 문학사상가 인용


민촌의 의도대로 그것을 뜯어 고쳤다가는 사건과 인물을 맘대로 처리해달라고 부탁했던 김기진씨에 대한 예의도 아니겠거니와, 대필 사실이- 일제검열당국에- 드러나 김씨에게 어떤 누가 끼쳐질지도 모를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독자들의 반응은 대단하였고 문단에서도 평이 좋았다. 그러니 민촌이 이를 어찌 뜯어고칠 수 있었겠는가? 그가 야심을 가지고 설정한 두 번째 모티브(조혼)가 완결되지도 못하고 두 개의 모티브가 조화롭게 매듭지어지지지도 못한 채 어정쩡하게 끝난 이 소설을 민촌은 그대로 단행본으로 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고향>이 북한에서 1955년에 다시 간행될 때에도, 희준이가 아내와 이혼하고 옥희와 재혼하는 것으로 고쳐 그리기에는 이미 <고향>은 너무 유명해져 있었다. 또 민촌은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중혼 경력을 건드리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이미 헤어진 아내에게도 못할 짓이었을 것이다.

<조광> 1937년 2월호에 따르면 한성도서에서 상·하 두 권으로 나온 <고향>(1936. 10, 1937. 1)은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이광수 <흙>보다 두 배 이상 팔렸다고 한다. 2만질 이상이었다니 그때로서는 대단한 ‘베스트셀러’가 아닐 수 없다.

<조국>이라는 책이 있다. 대남공작원으로 내려왔다가 18년 징역을 산 김진계 옹이 1956년 여름 평양 모란봉 극장에서 민촌이 한 ‘선전선동 활동에 대하여’라는 강연을 들을 때였다.

“저는 남조선 일대에서 광부, 막노동꾼, 머슴 등의 일을 닥치는 대로 하면서 도처에서 가난한 농민들의 굶주린 형편과 노동자들의 비참한 생활을 목도할 때마다 치솟는 민족적 격분을 금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이런 비참한 생활을 극복하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분야는 무엇인가 고민했지요. 그건 소설이었어요. 그래서 당연히 제 소설의 내용은 인민의 터전이었고, 인민이 사는 삶의 전형을 순간순간 잘 포착해야 했습니다. 말하자면 소설을 쓰면서 선전선동이란 인민이 사는 터전에 맞게 창안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배운 겁니다.”

극장 문 앞에서 민촌과 악수했을 때 느낀 생각이다.
“나는 깜짝 놀랐다. 그의 오른손 검지손가락에 큰 혹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글을 하도 많이 써서 딱딱하게 굳은 자죽임에 틀림없었다. 그가 얼마나 이악스럽게 자기 일에 집중했는가를 피부로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장편소설 ‘두만강’으로 노벨상 후보
민촌이 한설야, 안막·최승희 내외와 함께 월북한 것은 1945년 11월 하순이었다. 굳건한 믿음에 따른 제1차월북이었다. 손자 이성렬 글이다. 민촌 밑에서 문예총부위원장을 하였던 정률(본명 정상진, 1918~ )한테 들은 이야기 가운데 한 대목이다.

“1946년부터 1955년 북한을 떠나기까지 10년간 민촌을 모셨다는 것이다. 민촌은 부하들을 매우 사랑하였고 회식 자리에서 먼저 일어설 때에는 술값을 더 내놓고 가곤 하였다고 하였다. 주량이 대단해서 군악대장인 소련군 중령이 술 마시기 시합을 하자고 대들었다가 큰코를 다친 일화를 소개하기도 하였다. 그렇게 술을 많이 해도 말수가 적어 평소나 다름없이 묻는 말에나 대답할 뿐 거의 말이 없었다는 것이다. 수 차례 거듭된 문인들의 숙청에 관한 자신의 의견이 없지도 않았을 터인데도 일체 함구하였다는 것이다. 이태준, 한설야 등이 연회석에서 늘 여자들을 희롱하고 즐겨도 민촌은 여자들에게 눈길 한 번 주는 법이 없었다고 하였다.”

민촌은 조·쏘문화협회 중앙위원장, 조선문학예술동맹중앙위원장(종신까지 역임), 최고인민회의부의장을 하며 조선인민 사절단장과 푸쉬킨·고골리 제전, 소련작가대회 참석차 4번 소련을 방문하였다. 노력훈장과 인민예술가 칭호 및 국기훈장 1급을 수훈하였고, 장편소설 <두만강>으로 인민작가상을 받으면서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르기도 하였다. 그는 1984년 신미리 애국열사릉에 묻혔다. 향수 90.

출처 : 글밭문학기행
글쓴이 : 至殷★(김미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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