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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리의 수업/작가, 작품론

높고, 넓고, 깊은 마음으로 빚어 내는 세계

by 拏俐♡나리 2011. 3. 30.

시인 구상 님

시인 구상 님을 만나러 가는 길은 마냥 즐거울 수만은 없었다. 평소 때라도 낯선 객이 번거로울 텐데, 팔순 나이에 당한 갑작스런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몇 달째 병상을 지키고 있으니…. 그의 집이 있는 여의도로 접어들자, 하늘까지 잔뜩 흐려 마음이 더욱 무겁다.
“어서들 와요. 내가 몸이 좀 불편해서, 모든 게 마땅찮을 거요. 미안합니다. 허허….”
시인은 따뜻한 웃음과 함께 오히려 사과의 말을 건넨다. 무겁던 마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편안해진다.
“뜻밖의 사고로 원래 나쁘던 폐가 안 좋아져서 여러 사람들을 걱정시켰지요.”
그 당시는 생사를 헤맬 만큼 위급했다는데, 고생담이라도 몇 마디 늘어놓으련만 영 그런 게 없다. 깔끔한 그의 성품이 그대로 느껴진다.
그래도 그가 이만큼 건강을 회복한 건 천만다행한 일이다. 누군가의 말처럼 그는 아직 할 일이 많은 문단의 어른이 아닌가. 그에게는 아직도 맑은 마음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풀어 낼 삶의 노래가 많이 남아 있질 않은가.
“왜 시를 쓰는가 물으면 시인마다 답이 다르겠지요. 제 경우엔 언제나 사물에 대한 인식이나 감동에는 독자적인 진실이 있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문학을 한다고 답합니다.”
그리고 그에게 문학은 살아갈수록 구질구질하게 묻어나는 생존의 때를 벗기기 위한 언어의 방망이질과도 같은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그의 작품들을 통해 더욱 순수한 세계, 높고 넓은 세계로 안내되곤 한다.
구상 님은 1919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네 살 되던 해 가족들을 따라 함경북도 원산으로 생활 터전을 옮긴 그는 유년시절, 문학적 감성이 풍부한 어머니와 종교적인 분위기가 강한 집안의 영향으로 생각이 깊고 상상력이 풍부한 아이로 자라났다.
성장한 뒤에는 신부가 되기 위해 신학교에 입학했으나, 3년 만에 환속한다. 일본 니혼대학 종교과를 졸업한 뒤에 그는 1946년 원산문학가동맹의 동인시집 <응향>에 시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문학의 길을 걷게 된다. 그러나 그 시들 때문에 반체제분자로 몰려 북한을 탈출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기도 했다.
“젊어서는 제가 현실 인식이나 역사의식이 아주 강한 사람이었어요. 그러다가 자유당 말기에 감옥을 가게 되면서 많은 고민을 했지요. 그리고 현실 참여에 대한 생각을 접고 평생 문학으로 살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뒤로 그는 활발하게 작품을 발표하는 한편, 후배 문학도들을 가르치는 대학 교수로, 언론인으로 다방면에서 활약을 했다. 그리고 최근에 발표한 <인류의 맹점(盲點)에서>를 비롯한 여러 권의 시집과 수필집, 평론집, 시나리오집 등 사십여 권의 저서를 펴내면서, 문단의 어른으로 대접받는 위치에 이르렀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가서 상도 주고, 축하도 하고, 강연도 했지만, 자신을 드러내는 일이나 세속적인 명예를 얻는 일과는 늘 거리가 멀었다. 그가 자청해서 맡은 감투라곤 오상순, 이중섭 등 먼저 세상을 떠난 예술가들을 기리는 사업에 관한 것이 전부였다. 그는 언제나 조용한 말소리와 온화한 표정으로 한국 문단의 보이지 않는 대들보 역할을 해왔던 것이다.
한편 그의 시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널리 읽히고 있는데, 이미 그의 시집들은 프랑스, 영국, 독일, 스웨덴, 일본에서 번역 출판되었다.
“제가 특별히 잘 쓰기 때문은 아니지요. 서양인들도 쉽게 공감하는 존재 인식론적인 것, 형이상학적인 것을 주제로 삼으니까`….”
돌아보면 그에게도 많은 인생의 시련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폐결핵으로 많은 시간을 투병 했던 것이 가장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여러 번 죽을 고비도 넘겼어요. 아는 사람들은 벌써 죽었을 사람이 부인 덕에 살았다고도 하는데 사실이에요.”
몇 해 전에 세상을 뜬 그의 아내는 의사였다. 생전에 그의 아내는 남편의 충실한 주치의이자 고아와 버려진 노인들을 위해 평생 봉사하는 삶을 살았다.
“의사 부인 때문에 잘살겠다는 얘기도 여러번 들었는데, 우리집에서는 안 통하는 얘기였지요. 아내가 세상 뜨기 전까지 집에 가져 온 돈이라고는 넉 달 동안 삼십만 원씩이 전부였으니까. 평생 내 건강을 돌봐 준 것만으로도 정말 감사할 일이지요.”
말을 끝낸 노시인이 벽에 걸린 아내의 사진을 올려다본다. 그의 등 위로 쓸쓸한 바람이 한가닥 감겨든다.
아내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나이를 잊은 채 원고 집필과 강의로 분주하게 생활했던 구상 님. 그는 빨리 건강을 회복해서 동서양의 사상가들을 연구하고 인문고전을 강의하는 '성찬아카데미'에도 나가고, 구상해 두었던 시극과 시나리오 작업도 진행하고 싶다고 말한다.
“지금의 현실이 다들 어렵다고 합니다. 하지만 남의 세상이 아니라 자기 세상이니까 절망할 수만은 없지요. 그리고 세상 탓할 필요가 없어요. 제가 <그 분이 홀로 가듯이>라는 시에서 적은 것처럼 자기 길을 참되게 가면 되는 거죠.”
시와 세상살이가 하나 되기 어려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그가 있다는 것은 정말 다행한 일이다.
문득 창밖을 내다보니 어느새 잔뜩 흐렸던 하늘이 풀어지고 새하얀 함박눈이 쏟아진다.

필자 : 조선혜님 기자 
출처 : 월간《좋은생각》 1999년 0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