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부재가 소통인 시대의 시 읽기 3 - 이동호 [조용한 가족]
권기만
현대시는 가볍다. 가볍다는 것은 변용에 능통하다는 것이다. 능통할 뿐 아니라 전지전능을 꿈꾼다. 그러나 능통과 전지전능은 그만의 몸짓이 통용되는 공간에서만 일어난다. 그만의 방을 만들어놓고 거기서 은밀한 작업을 수행한다. 바람 한 스푼 콩나물 한 시루 키우면서 별과 달을 불러다 놓고 주문을 건다. 이동호의 시를 읽다보면 그의 시선이 머무는 곳이 연금술사가 비밀리에 숨겨둔 작업 공간이란 생각을 가지게 한다. 때로는 공간을 가르고 들어가고 때로는 거미처럼 허공에 매달려 있기도 하다. 어떤 자세를 취하던 그곳은 가볍게 몸을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다. 그가 부리는 언어들은 주변의 것들과 신경망처럼 연결되어 있다. 허공의 근력들을 통째로 뜯어내어서 피 뚝뚝 흘리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고 박제시키기도 한다. 그의 언어가 입고 있는 것은 살아있는 공간이다. 죽음조차도 생생하게 살아 있는 공간이다. 총포사에 박제되어 있는 늑대를 보면서 시인은 살기를 경험한다. 그의 촉수가 어느새 공간을 찢고 들어가 늑대가 살았던 공간의 충격음을 도려내어 박제된 늑대에게 입혀 놓고 있다. 공간이동이 순간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시어들은 공간으로 몸을 바꾸고 이동하는데 탁월한 기동성을 보인다. ‘콩나물국, 끓이기’에서는 공중부양을 시도하고 있다. 콩나물들은 자신도 모르게 공중부양을 경험한다. 끓었을 뿐인데 그들은 모두 음이 되어 허공에 떠오른다. 그의 언어는 지휘봉이고 지휘자다. 그가 후-불면 언어들은 나뭇잎처럼 공중부양을 경험해야한다. 이동호가 만나고 경험하는 사물들은 뿌리가 없다. ‘폐가’에서는 풀들조차 죽은 자의 발자국으로 돋아난다. 형상들은 뿌리를 잃고 길 위의 길로 포개져 있거나 중심에서 밀려난 곳에서 몸짓을 드러낸다. 그것을 붙잡기 위해 시인은 객관적 거리와 냉철함을 잃지 않는다. ‘만선’에서 사람들은 생선비린내를 풍기는 어족으로 둔갑하고 사람들을 나눠가진 가로등의 발걸음이 바빠진다. 역사는 거대한 공동 어시장이 된다. 그곳은 그가 만들어낸 곳이 아니라 공간 속에 오랫동안 섞여 있던 것을 포착한 것이다. 시간과 공간이 어긋난 곳에서 사물들은 위치가 바뀐다.
그러한 여행을 통해 그가 우리에게 보여주려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다. 괴리되고 비틀린 소통 부재의 고립된 시대를 살아가는 몸짓, 공중부양과 공간이동으로 이루어진 언어의 번뜩이는 몸짓은 소외된 만큼 비현실적인 공간을 거느린다. 그러나 그에게 그곳은 숨바꼭질할 때 숨었던 공간처럼 익숙하고 편안한 곳이다. 술래가 쉽게 찾을 수 없는 그만의 공간에서 밖의 동정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고 예민한 촉수를 최대한 웅크린다. 그러한 웅크림은 먹잇감을 사냥하기직전 최대한 낮은 자세로 공격대상물 가까이 접근하는 표범의 포즈에 가깝다. 풀잎들의 속삭임조차 놓치지 않는다. 그리하여 기꺼이 숨통을 끊어 놓는다. 그가 내딛는 곳은 공간이고 배경은 비틀린 시간이다. ‘신발 한 켤레’에서 아스팔트는 도시의 근력으로 이완되어서 강으로 공간이동 한다. 덤프트럭은 상어로 이완되고 신발은 죽음의 부표로 이완되어서 삶의 난파선으로 돌아온다. 규격화로 단절된 세계에서 그가 선택한 숨통은 긴장이완을 통해 기존의 사고와 시공을 해체하는 것이다. 소통부재를 해소하는 그의 전략은 정면으로 부딪치는 것이 아니라 제3의 공간으로 공간이동해서 이루어진다. 그가 입은 공간은 화해이고 넓이이자 해방구다. 이쪽과 저쪽의 경계를 허물고 삶뿐만 아니라 죽음도 함께 변주되는 공간이다. 그러한 해방구를 향한 몸짓은 ‘포구’에 잘 나타나 있다. 수평선의 포장마차가 어서 오라 “손짓 하얀 갈매기 난다”고 저 광활한 술잔 속으로 몸을 던지고 싶다고 말한다. 물론 그곳은 그의 몸짓을 받아줄 수 있는 제3의 공간이다. 그는 늘 그런 공간으로 밀항하기를 꿈꾼다. “한 사내가 부두에 묶어둔 그림자를 풀고 있다”고 토로한다. 우리가 지상에 묶여 있는 것은 그림자 때문이라는 인식은 충격적이다. 그림자를 풀어버리지 못해 우리는 지상에 붙잡혀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거꾸로 짚어보면 그의 시에는 그림자가 없다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림자를 지우기 위해 끊임없는 이동을 시도한다는 것은 이완으로 생긴 틈(공간)으로 몸 구부린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포구’에서 화자는 몸 던지려는 모습에 취해 있다. 그것은 삶 밖으로의 여행과 죽음 이후의 세계를 향해 여행을 떠나는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쓴 [티나토노트]를 연상시킨다. [티나토노트]에서 죽음의 세계로 영계 탐사를 떠나는 것은 혼이지만 이동호의 시에서는 모든 사물이 다 영매가 된다. “일엽편주가 되어 떠나려는 자여/ 나는 또 그대 뒷모습에 취해/ 이 밤을 밝힌다 등대라도 뽑아가서/ 그대 어두워진 등에,/ 불빛을 붓고 싶다”는 배웅은 그가 가려는 길이 얼마나 험한 여행인가를 암시하고 있다.
이제 그가 밀항한 세계를 여행해보자.
지하철 계단을 오른다
계단 중턱 뽀오얗게 구름 아득한데
노인들은 지팡이를 한 손에 움켜쥐고
남은 근력으로 계단을 힘껏 밀어 내린다
이승에서는 좀체 추진력이 생기지 않는다
위를 올려다보면 하늘이 두어 평
출입문을 활짝 열어놓고 있다
노인들은 지팡이를 난간에 세워놓고
이마의 능선들을 손질 한다
이마 위에 한 줄 능선을 더 새기며
다시 계단을 오른다
지팡이를 손에 쥐고 두어 칸 위 계단을 짚으면
산맥의 척추를 지탱하던 힘으로 지팡이는
계단을 이승으로 주욱 밀어 내린다
땅 속에서는 전동차가 계단을 어디론가 실어 나른다
-노인과 계단/ 부분
노인은 계단을 오르다가 허공의 계단을 만난다. “하늘이 두어 평 출입문을 열어놓고 있”는 허공의 계단으로 공간이동하는 순간 “지팡이는 계단을 이승으로 주욱 밀어 내린다.” 그가 들어선 공간은 어긋난 공간이다. 그것은 아무 때나 열리는 공간이 아니다. 칠십 계단을 올라야 만날 수 있는 공간이다. 그가 발견한 계단과 계단 사이 제3의 공간은 경험이 아니라 칼날 같은 직감이 도려낸 틈이다. 천상과 지상이 만나는 곳이며 전생과 후생이 소통되는 곳이기도 하다. 몸을 가볍게 띄워서 생각의 키를 넘어 상상의 어깨를 훌쩍 뛰어넘는 공간이동은 아무런 표시 없이 이미 일어나 있다. 그의 시를 읽다보면 갑자기 낯선 곳에서 유령처럼 배회하게 된다.
감나무 가지에 홍시처럼 매달려 있는 그를
처음 발견한 사람은 우체부였다
감나무에는 우표가 무성했으므로 그의 혼은
무사히 하늘로 잘 배달되었으리라
집은 끝내 함구했다
그가 가꾸다만 황폐해진 가을 속으로
참새들이 하나둘 몰려들어 혀를 찼다
그가 신고 다닌 마당의 발자국 속으로
밤새 서리 내리고, ...
그해 겨울
답장처럼 눈이 내렸고
지붕은 상복을 입었다
상주처럼 쓸쓸하게 서 있던 감나무의 가지가
툭 꺾이고, 최후로 그가 벗어둔 장화 속으로
침묵이 고여들었다 마당을 가로질러
그의 발자국이 하나 둘 새로
돋아났다
-폐가/ 부분
홍시는 조등이고 소포다. 그러나 다시 답장처럼 눈이 내리고 상복을 지붕으로 입고 상주처럼 쓸쓸하게 감나무로 서 있다. 그의 말은 장화 속 침묵으로 발음되고 그의 발자국은 풀로 돋아난다. 물론 유령의 실체는 쓸쓸함이다. 박목월의 “구름에 달 가듯 가는 나그네”의 쓸쓸함이 아니라 “침묵은 끝내 함구했다”와 같은 쓸쓸함이다. 그는 서성거리고 배회한다. 그러한 풍경은 매일신문 등단작품이자 표지제목이기도한 ‘조용한 가족’에서도 허공의 복도를 배회하는 소외로 나타난다.
무상임대 아파트 8층 복도
한 덩이 어둠을 치우고 걸어 들어간다
복도가 골목 같다
이 골목은 일체의 벗어남을 허용하지 않는다
복도에게 사표를 낸다는 것은
극빈極貧의 뜻이고
담을 뛰어넘는다는 것은
일층으로라는 의미를 지닌다
저승은 일층에 국한되어 있었으므로
작년, 두 사람이 일층으로 순간이동 했다
올해는 벌써 두 명분의 숟가락이
고층에서 주인을 퍼다버렸다
사람들은 아파트 속에 조의금처럼 들어 앉아있다
이곳에서는 침묵도 하나의 종파宗派가 된다
사람들은 침묵을 광신도처럼
따른다
-조용한 가족/ 부분
유령은 말을 하지 않는다. 복도 밖의 삶은 저승이고 그곳은 일층으로 지칭되고 있지만 일층은 도달할 수 없는 곳이기도 하다. 그는 소외 되고 갇힌 공간에서 유령처럼 배회한다. 그가 서성이는 그곳은 침묵으로 구금당한 곳이다. 소통을 위해 담을 넘는 것은 구제가 아니라 부제가 되는 곳을 우리는 서성거린다고 고백한다. 아니 그것을 구제해 달라고 하소연한다. 그러나 그에겐 말이 없으므로 그것을 ‘수화’로 할 수 밖에 없다.
그는 나무다 상록수다 그의 입은 가지이고
그의 언어는 푸른 잎이다
그가 나이테에 가둔 말을 풀어낸다
그는 가지 가득 말을 올려놓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눈으로 듣지 못한다
사람들은 잎사귀를 이해하려 애써보지만
푸른빛이 시끄러울 뿐이다
대문 앞에 서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그가 잎을 오물거린다
잎이 점점 심록색深綠色이라는 것은
세상에 대한 궁금증이 극에 달한 증거
사람들도 나무다 단풍나무다
방언이 깊어 사람들은 늘 가을이다
불필요한 상징을 없애고 나면
늘 그와의 앙상한 거리를 드러낸다
그와 사람들이 일정한 거리에 서 있는 것이
서로에 대한 부정은 아니다 삶이다
그러나 그는 아픈 나무다
자신의 말에 늘 찔리는 상록 침엽수다
오늘도 대문 밖에서 그가 푸른 잎을 떨군다
사람들은 멀찍이 떨어져서도
귀를 막는다
-수화/ 부분
제3의 공간은 소통부재의 공간이기도 하다. 그 때문에 그는 수화에 몰두한다. 그가 해석하는 공간은 “방언이 깊어 사람들은 늘 가을인” 곳이며, 혼자의 몸짓에 스스로 찔리는 그래서 아픈 나무가 사는 곳이다. 앙상한 거리가 삶이고 멀찍이 떨어져서도 귀를 막는 것은 시끄러운 세상과의 단절을 의미한다. 그는 이쪽과 저쪽의 경계에서 서로를 염탐하면서 소통의 다리가 되려는 시도를 포기하지 않는다. 그 때문에 그의 위치는 천상과 지상의 중간에서 포착된다. 영매처럼 소통을 위한 몸짓을 푸른 잎으로 떨구지만 그것을 그들은 눈으로 듣지 못하는 곳이다. 그러나 그의 언어가 소속된 공간을 알아보는 순간 소통부재는 해소된다. 왜냐하면 그가 거처로 삼은 곳은 갇혀 있지만 또한 해방되어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는 마치 거미처럼 허공에 신경망을 펼쳐놓고 세상을 읽는다. 그러한 거리 때문에 그의 언어는 공감각을 건드리면서도 매우 시각적이다.
그에게 있어서 이쪽과 저쪽은 거울의 이쪽과 저쪽처럼 몸짓을 공유하는 곳이다. 그 때문에 ‘지느러미’에서 낚시를 하다가 물속 세상에 되레 낚이기도 하고, ‘공룡 발자국 화석’에서는 허공이 공룡발자국을 신고 공룡처럼 몸집을 드러내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한 침투와 이완으로 벌어진 틈으로 읽게 되면 모기에 물려 볼록 튀어나온 둥근 살집 무덤처럼 뭉툭 튀어나온 지금의 이 몸도 무덤인(‘모기’) 것이다. 그러한 공간이동은 “그녀는 내 생각 밖으로 걸어 나가고”(‘애플 주스’) 나무들은 빨대처럼 꽂혀 빗물을 빠는 것으로 변주 된다. 그러한 연주법은 ‘Cafe 통기타’에서 차들을 ‘고고’ 주법으로 공명시키고 거리를 걷는 사람들은 C, DM, G7, F ... 코드를 밟으며 걸어가게 한다. 가볍고 경쾌하고 발랄한 이면에는 변주하고 이완해서라도 지켜내야 하는 가슴들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둥근달이 뜬 달동네 우리집, 우리 어매 살아생전 둥근 궁댕이 같은 좁은 부엌, 졸졸졸 어제는 하루 종일 비가 오더니, 오늘 가을하늘보다 더 파랗게, 이끼가 피어나 백촉 전등에 반짝입니다 하수구 물 흐르는 곳에서 울 할매 밥짓다가 신기한 듯 영희랑 철희랑 불러 ‘드물게 이런 달동네 오두막집에서도 달 아닌 새 생명 방문하듯 자라 순박한 이야기가 되다니'하고, 우리들 그 서럽게 굳은 표정 속으로 오랜만에 웃음이 파랗게 돋았습니다
-우산이끼/ 부분
작업복 차림의 사내가 달 속으로 귀가하고(‘보름달 동네’) “진짜 사람들이 가짜 사람처럼 사는” 곳이 그가 딛고 선 땅이다. 그가 의탁한 그곳은 운신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곳이다. 그것을 끌어안고 함께 비상하려는 몸짓을 읽는 것은 치명적인 고통이다. ‘누이의 지갑’에서는 지갑을 잃고 파랗게 질려 귀가하고, 잃는 것은 지갑뿐이 아니라고 일러준다. 소시민의 삶은 강탈당한 체념으로 공허하다. 그러함은 ‘아우슈비츠’에서 “희망은 농담”인 세상으로 나타난다. 불빛(오촉 전구)조차 절망이 켜진 공포의 눈이 된다. 담장 밖으로 나가는 것은 “머리에서 발끝까지 걸치고 있는 것은 모조리 벗고,” “오직 굴뚝으로만 세상을 나갈 수 있는 곳”으로 어두워진다. 그것들이 그를 떠다밀어 밀려난 쪽방촌 달동네에서 그는 세상을 읽는다. ‘독서-긴 직유로 읽는 풍경’에서 관 뚜껑을 열듯 창문을 쬐끔 열고 창 밖 세상을 읽는다. 가벼움은 연기처럼 허공을 떠돌며 낯선 풍경들과 조우한다. “낙엽들은 공중을 뚜벅뚜벅” 걷기 시작하고, 거미처럼 공간에 집을 짓고 ‘비오는 날 저수지 풍경’을 바라본다. 그는 공간의 일부가 되어 차츰 더 가벼워져 간다. 무게감이 없어 보이고 더러 장난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거기에는 공간 감각이 칼날처럼 벼려져 있다. 그가 공간을 가르고 들어가야만 했던 필연적인 호흡이 도사리고 있다. 동물적인 감각이 번뜩이는 것은 살아남아 따뜻함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무거움에 사로잡히는 순간 주저앉아야 된다. 그것은 고통보다 더 치명적이다. 아니 죽음이다. 가벼움은 신앙이며 구원이다. 날개가 아니고 반성이고 깊이다. 그는 그것을 완성하기 위해 끝없이 변주하고 침투한다. 변용 가능한 공간과 혼숙도 마다하지 않는다. ‘한밤중의 창세기’에서 시대와 비애가 시공을 초월해 비의 방주를 타고 아내의 배로 정박하고 끝나지 않은 심판의 빗줄기가 그어진다. 새로운 세상을 아내의 배로 꿈꾸는 동안 아라라트 산으로 “약속된 아침을 찾아” 비둘기가 날아간다. 물론 그 비둘기는 그가 읽으려는 희망의 메시지다. “서럽게 굳은 표정 속으로 오랜만에 웃음이 파랗게 돋는” 것을 보고 싶어서 배회한다. 시간과 공간을 페이지처럼 넘기면서 그가 읽어보고 싶은 페이지에 정박할 날은 언제일까. 나는 그것을 그의 시에 자주 등장하는 달에서 본다.
“어두운 시대 밝은 명치가 되어 뜰 보름달”(‘저녁의 문’)은 우리의 친구이자 희망의 상징이다. ‘조용한 가족’에서는 조등弔燈으로 ‘순신이 형’에서는 화포로 변용되고, ‘지느러미’에서는 떡밥으로 ‘수상한 골목’에서는 지문으로 찍히는 달로 이완된다. 동아줄 같은 달빛을 붙잡고 귀가 하는 ‘보름달 동네’에 살지만 이미 그곳은 변용과 이완으로 지은 새로운 거주지로 공간이동 되어 있다. 그러나 그곳은 여전히 중간지대다. 그가 이주하고 싶은 제3의 지대는 아니다. 이주할 곳을 찾아 이쪽과 저쪽을 부지런히 넘나들면서 때로 길을 잃기도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영도대교를 지나다가 바다 속으로 첨벙첨벙 뛰어드는 새들을 보았네 하늘을 집삼아 살던 새들이 바다 속으로 이사를 간 것이네 멈춰 서서 내려다보는 수면에는 주름주름 무늬 진 창이 놓여있었네 그 창문은 열려 있었는데, 나는 잠시 그 틈을 타서 바다 속 세상을 훔쳐볼 수 있었네 바다 속에는 바다 밖의 세상과 다른 뒤틀린 하늘이 있네 하늘 위로 비뚤비뚤 구름이 흐르고, 낮인데도 무수히 별들이 반짝였네 바다 밖 세상은 바다 밖 하늘 아래 지어 졌는데, 바다 안 세상은 바다 속 하늘 위에 지어 졌다는 것이 그저 신기하여 수면 위(...중략...) 파도와 파도의 틈바구니에 숨어, 내 쪽을 신기한 듯 올려다보는 한 사람을 발견할 수 있었네 누굴까 궁금하여 손 흔드는데, 그는 서둘러 수면 위의 창문을 닫아 버리네 영도대교를 지나다가 바다 위에서 이리저리 날고 있는 새들을 보았네 집으로 돌아가는 수문을 찾지 못한 듯 새들은, 당황하고 있었네
-영도대교/ 부분
집으로 돌아가는 수문을 찾지 못해 길을 잃었다고 말해지는 곳은 저쪽이 아니라 이쪽이다. 저쪽은 낮인데도 별들이 무수히 반짝이는 바다 속 하늘 위에 지어져 있으며, 창문 같은 틈으로 엿보고 무심코 들어서기도 하는 곳이다. 그에게 이곳은 “행복은 늘 결혼 액자 속에서만 웃고 있는”(‘A4용지’) 곳이며, “빗소리에 취조 당”(‘장마에 갇히다’)하는 곳이다. 그의 길 찾기가 비틀리고 주름지고 비뚤비뚤 첨벙거리면서도 그만둘 수 없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가 귀가하고 싶은 제3의 공간은 희망이고 가능성이며 신천지다. 그가 발굴한 동물적 공간감각으로 찾아낸 길은 “액정을 번쩍 뜨”게(‘발굴’) 하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그러한 선구적인 작업은 필경 수많은 비판과 뼈를 분지르는 고통을 선물 할 것이 분명하다. 어떤 고초가 따르더라도 제3의 공간으로 우리를 초대하는 날이 올 것을 고대해 보는 것, 독자로서 포기할 수 없는 희망이다.
끝으로 그가 앞으로 보여줄 치열한 길트기에 대한 격려의 박수를 공중부양으로 끓고 있는 ‘콩나물국, 끓이기’로 보낸다.
사내는 뚝배기 속으로
지휘봉을 가져간다
도에서 끓기 시작한 뚝배기 속의 음표들을
사내는 지휘하듯 휘휘 내젓는다
음계는 금세 높은 음자리로 음역을 높인다
이 음악은 너무 뜨거워 맛보기 힘들다
사내는 입을 오므려 솔, 휘파람을 분다
휘파람이 뚝배기 속으로 뛰어든다
음악소리가 완전히 익기까지는
시간을 조금 더 끓여야 한다
사내는 잠시 식욕을 닫고
기다리는 동안 창 밖을 바라본다
창 밖 나뭇가지가 세상을 휘젓는다
공중 부양하는 수많은 손바닥들
손대기에도 너무 뜨거운 세상 때문이다
땅의 뚝배기 속에 떨어지기도 전에
나뭇잎이 몸을 굴린다
사내가 삶의 안쪽으로 몸을 돌린다
뚝배기가 심장처럼 펄펄 끓어오른다
뚝배기를 식탁 쪽으로 옮긴다
사내는 나뭇가지 같은 손가락에 숟가락을 끼운다
뜨겁게 김이 오르는 음표들을 입으로 분다
음표들은 낮은 음계에 도달한다
뒷모습이 콩나물인 사내가
음악을 한 숟가락 떠서 입에 넣는다
한 소절의 생이 고스란히 입안에서 씹힌다
창 밖 저녁노을이,
얼큰하다
-콩나물국, 끊이기/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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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 하반기 두레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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