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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펌/좋은 시 모음

산벚나무를 묻지마라 / 임경림

by 拏俐♡나리 2011. 7. 21.

[200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시]

 

산벚나무를 묻지마라 / 임경림

 

 

늙은 산벚나무가 온 산을 먹여 살리고 있었다 가부좌 틀고 앉은 벙어리 부처를 먹이고, 벌떼 같은 하늘과 구름을 먹이고, 떼쟁이 햇살과 바람과 새를 먹이고, 수시로 엿듣는 여우비를 먹이고, 툇마루에 눌러앉은 한 톨의 과거와 할미보살을 먹이고, 두리번두리번 못 다 익은 열매들의 슬픔을 먹이고, 애벌레의 낮잠 끝에 서성이는 노랑나비를 먹이고, 먹이고…먹이고,

 

흘러 넘친 단물이 절 밖을 풀어먹이고 있었다 젖무덤 열어젖힌 산벚나무, 무덤 속에 든 어미가 무덤 밖에 서 있다 퉁퉁퉁 불어터진 시간이 아가 아가 아가를 숨가쁘게 불러댄다

 

산벚나무를 묻지 마라

코 닫고 눈 닫고 귀 걸어 잠그고

문둥이 속으로 들어간 절 한 채

어두워지고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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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독특한 감성·안정된 사유 돋보여

 

 

투고작들의 일반적인 수준은 고른 편이었지만, 특별히 신인다운 패기있고 인상적인 작품은 드물었다. 시의 모습을 갖추고 있는 작품은 많았지만, 좀 서툴더라도 시적 에스프리가 넘치는 작품이 눈에 띄지 않아서 아쉬웠다.

 

특히 많은 작품들이 산문적인 경향을 보여주고 있었다. 소위 산문시들도 많았다. 그러나 산문시는 산문과 다르다. 시와 산문의 주요한 차이는 그 상상력에 있을 것이다. 산문의 상상력으로 씌어진 작품은 아무리 시적인 외형을 지니고 있더라도 시적 감층을 주지 못한다. 새로운 언어, 새로운 감성이 부족한 점도 아쉬움이다. 요즘 같은 감각의 시대에 오히려 시가, 감성의 빈곤을 드러내는 작품이 많았다. 시적 상상력과 새로운 감성의 부족을 경직된 시적 포즈로 대신할 수는 없을 것이다.

 

최종적으로 논의의 대상이 된 투고작은 김우섭, 이상관, 조동범, 임경림의 작품이었다.

 

김우섭, 이상관의 작품은 언어를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구사하는 힘과 사물을 응시하는 힘이 있었다. 그러나 시적 사유가 일정한 틀에 갇혀 있는 듯했고, 시적 탄력이 부족했다. 또 때때로 생경하거나 부적절한 표현이 작품의 긴장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성실성과 솜씨가 있는 작품이었지만, 스스로틀을 벗어나려는 노력이 더 있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에 비해 조동범, 임경림의 작품은 그 감성이 발랄하고 풍부했다. 언어를 조합해서 긴장된 언어의 조형물을 만드는 솜씨가 있었다.

 

조동범의 '둘둘치킨'과 임경림의 '뾰족지붕과 뾰족창을 그는 가졌다', '산벚나무를 묻지 마라' 세 편을 두고 망설인 결과 '산벚나무를 묻지 마라'를 뽑게 되었다. 임경림은 상당한 시적 훈련이 되어 있는 듯하다. 그의 감성과 언어에는 독특한 색깔이 있다. 그러면서도 안정된 시적 사유를 보여준다. 축하하며, 정진을 바란다. 당선자와 아깝게 탈락한 투고자 모두에게 격려를 보낸다.

 

- 심사위원 : 이성부, 김종철, 이남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