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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펌/읽다가 멈춘 곳

안도현의 노트에 베끼고 싶은 시

by 拏俐♡나리 2017. 8. 25.

p 46


살구꽃


문신


   해마다 4월이면 쌀 떨어진 집부터 살구꽃이 피었다.

   살구꽃은 간지럽게 한 송이씩 차례대로 피는 것이 아니라

튀밥처럼, 겨우내 살구나무 몸통을 오르내리며 뜨겁게 제 몸을

달군 것들이 동시에 펑, 하고 터져 나오는 것이었다.


   살구꽃은 검은 눈망울을 단 아이들이 맨발로 흙밭을 뒹구는

한낮에 피는 것이 아니었다.

   살구꽃은 낮은 지붕의 처마 밑으로 어둠이 고이고, 그 어둠이

꾸벅꾸벅 조는 한밤중에 손님처럼 가만히 피어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새벽이 오면 오갈 데 없는 별들의 따뜻한 거처가

되어 주기도 하는 것이었다.


   살구꽃이 핀 아침이면 마을 여기저기에서 쌀독 긁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었다.

   바닥의 깊이를 아는 사람들은 서둘러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굴뚝의 깊이만큼 허기진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면

   살구꽃은 안쓰럽게 몇 개의 잎을 떨구어 주곤 하는 것이었다.

   그맇다고 해서 살구꽃이 함부로 제 몸을 털어내는 것은 아니었다.

   살구꽃은 뜰에 나와 앉은 노인들처럼 하루 종일 햇살로

아랫배를 채우며 시간을 조율하는 것이었다.

   살구꽃은 제 몸의 모든 기운을 한 곳으로 모아 열매를 맺고

난 뒤, 열매가 단단하게 가지 끝에 매달린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안타깝게 지는 것이었다.


   살구꽃은 살구나무 아래에서 흙장난을 하며 놀던 아이들의

얼굴 위로 지는 것이었다.

   그러면 아이들은 풋살구를 털 때까지 얼굴 가득 버짐 같은

살구꽃을 달고 잠시 드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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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를 읽는 내내 머리 속에서

우리네 어머니들이 소녀였을 때

물에 빠져 개구리 울음 소리를 내는 고무신을 끌며

해거름 머리 풀어헤쳐 오르는 저녁 밥 짓는 굴뚝 연기에 이끌리듯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이 그려진다.


매캐한 나무타는 냄새마저도 구수한~


한 폭의 그림인 듯 그려지는 예쁜 시를 보며

어느 한 귀절 따로 떼어낼 수 없어

모두 옮겨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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