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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리의 수업/작가, 작품론

올곧은 문학 인생을 살아온 대시인/박두진

by 拏俐♡나리 2010. 5. 20.

시인 박두진 님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맑게 씻은 얼
굴 고운 해야 솟아라···”
우리들 가슴에 영원한 '해'의 시인으로 남아 있는 혜산 박두진 님.
유난히 곡절이 많았던 우리 근현대사 속에서 끝까지 선비정신을 지키고 반세기가 넘는 세월 동안 1천여 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한국 문학의 거목으로 우뚝 선 그 분 앞에선 자연스레 옷깃을 여미게 된다.
작년 연말에 추계예술대 출강을 끝으로 오랜 강단 생활에 종지부를 찍으면서 그간의 긴장이 일시에 무너져 내린 탓일까. 이내 심한 감기가 걸려 고생하셨다고 한다. 지금은 많이 회복되었지만, 아직은 외출을 삼가하고 대부분의 시간을 10여 년째 살아온 연희동 자택에서 지낼 만큼 건강을 조심하고 있다.
“하루 두 시간 정도 옛 작품을 다시 읽거나 독서를 합니다. 옛 작품을 읽으며 단지 추억에 젖고자 함은 아니고 부족했던 점을 반성하고, 앞으로 무엇을 쓸까 방향을 잡는 거지요. 일주일에 두 번 정도는 붓글씨도 쓰고, 서너 번은 이삼십 분 정도 산책을 해요.”
건강에 대한 염려가 눈앞에 닥쳐서야 비로소 좀 한가로와진 노시인의 일상이 잔잔한 아픔마저 던져준다.
올해는 무슨 일이 있어도 건강을 위주로 한 해 동안 충분히 쉬도록 하겠다며, 자신의 작품 활동도 접어두고 그림자처럼 박두진 시인을 뒷바라지하고 있는 부인 이희성 여사의 정성이 감동적이다. 동화작가인 그 분은 '먼나라의 눈', '재롱이의 이별' 등의 동화집을 내었고, 아름다운 동심의 세계를 다듬어 주는 좋은 안내자가 되어 왔다.
요즘 들어서 이 두 분에겐 새로운 즐거움이 하나 생겼다. 얼마 전에 나온 '박두진 문학정신'을 들춰보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전체 7권으로 된 이 전집은 그동안 박두진 시인이 써 온 수필, 평론, 서간문 등 산문을 모두 모아 놓은 것으로 그 속에는 문단 경력 60년을 바라보는 노시인의 문학적 생애가 오롯이 담겨있다. 게다가 문학의 해이자, 조지훈·박목월 시인과 함께 '청록집'을 낸 지 오십 해를 헤아리는 올해에 책이 나왔기에 보는 이들에게 더욱 뜻깊은 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1권 '고향에 갔더니'에서부터 4권 '밤이 캄캄할수록 아침은 가깝다'까지는 어머니, 하느님, 고향, 영혼 등 한 시인이 겪었던 짧지 않은 시간의 흔적들이 단아한 문체로 정리돼 있고, 5권 '현대시의 이해와 체험'에는 시의 본질과 기능, 시인의 윤리와 자세 등에 대해, 6권 '한국 현대시 감상'과 마지막 권 '시적 번뇌와 시적 목마름'에는 박목월, 윤석중, 윤동주 등 동년배 시인들의 시세계와 마종기, 유경환, 이해인 등 후배 시인들의 시집에 대한 격려의 말이 담겨 있다.
이 전집을 통해서 시인의 유년과 등단하기까지의 과정, '해' '오도' '비' '너는' 등 그간에 발표한 작품들에 얽힌 사연을 읽는 것도 즐겁지만, 무엇보다 평생 한점 부끄러움 없이 살아온 시인의 올곧은 생각을 만날 수 있어 좋다. 군사 독재 시절에 검열로 삭제당했던 부분을 되살려 놓았고, 김지하 시인의 '오적' 필화 사건 때 박두진 시인이 법정에 낸 감정서를 첫 공개하는 등 문학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서도 분명한 소신을 지니고 살아왔던 시인의 지난 날을 엿볼 수 있다.
“글을 써 줄 때마다 만일 단 한 자라도 삭제되면 원고는 되돌려 달라고 기자들에게 부탁했어요. 그렇게 되돌려받은 원고를 이삼십여 년 동안 보관해 오면서 언젠가는 햇빛을 볼 날이 있으리라고 믿었어요.”
그러나 우리에게 박두진 님은 자연의 감각적 미감을 통한 '초월적 본체'에 접근하려 했던 시인으로 더 많이 기억되고 있다. 이는 시류에 영합하지 않은 구도자적 삶과 잘 어우러져 그 분이야말로 널리 국민 정서의 기본을 닦아주는 대시인으로 존경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르게 한다. 이런 모든 것들은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독실한 기독교신자로 살아온 그 분의 삶과도 무관하지 않다. 작년에 박두진 시인은 월간 '목회와 신학'에 발표했던 신앙시만 모아 '폭양에 무릎 꿇고'라는 시집을 내기도 했다. 이 시집에 대해 시인은 '아름답게 치장한 시가 아니어서 시적인 재미는 크지 않을지 모르지만 자신을 아프게 되돌아보면서 쓴 고백의 글'이라고 소개한다.
“우린 기독교 가정이니까 자식들에게 늘 종교인의 자세를 잃지 말고 신앙 생활을 열심히 하길 강조하죠. 선생님도 늘 그런 신조로 살아오셨구요.” 부인 이희성 여사가 조용히 덧붙인다. 현재 박두진 시인은 큰아들 내외, 고등학생인 손자, 손녀와 함께 살고 있다. 조부님이 모두 문학인이시니 손주들이 문학적 재질이 있겠다고 물으니 그저 미소로 답한다.
요즘 젊은 시인들의 시들과 젊은 세대들이 즐기는 문학에 대한 시인의 생각은 어떨까.
“자기 세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시를 쓸 수 있습니다. 기교보다는 진실이 중요하니까요. 그러나 요즘 젊은이들의 시는 정도를 추구하기보다는 빨리 쉽게 인기를 얻자는 식이 많은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사회 상황에 대한 관심도 없이 진지함보다는 즐기려는 식의 문학 자세로는 시가 약해집니다.”
시인 박두진 님의 지적은 깊은 성찰 속에서 오래 닦아온 정서를 건져내기보다는 쉽고 화려하고 빠른 것만 쫓는 요즘 세태에 대한 안타까움의 또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필자 : 조선혜님 기자 
출처 : 월간《좋은생각》 1996년 05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