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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리의 수업/시 배움 자료

[스크랩] 좋은 시인이 되는길 - 강은교 (4) 내 곁의 한 사람의 울음을 들을 수 있다면

by 拏俐♡나리 2010. 10. 6.

(4) 내 곁의 한 사람의 울음을 들을 수 있다면

우리 집에서 화분들을 몇 개 키우고 있는데,

저는 오늘도 화분들한테 인사를 해주고 왔습니다.

'내일 갈 테니 잘 있거라'고 인사를 건네고 왔는데, 작은 것들이 너무 예쁘고 너무 생명스럽습니다.

 제가 동백나무보다 조금 크다고 해서 더 가치 있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하는 생각에 잠기곤 합니다.

저의 생명도 하나고 동백나무의 생명도 하나입니다.

요즘 우리 집에 아주 큰 일이 하나 생겼습니다.

현관에 화분이 하나 있는데, 집에서 잠깐 기르던 강아지가 화분 속의 나무를 마구 갉아먹은 거예요.

사람 같으면 금방 붕대를 감고 치료를 했을 텐데, 나무이기 때문에 그대로 내버려두었지요.

그런데 그 나무가 3년 동안 서서히 죽어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상처를 그대로 놔두었기 때문에, 훼손된 수관으로 곳으로 물을 빨아올리지를 못하는 거예요.

아침마다 잎이 하나씩 누렇게 되는데, 만약에 그것이 사람이라면 소리를 지르지 않겠습니까.

 아프다고 소리를 지르겠지요. 그러면은 도와주었을 텐데 말을 못하는 바람에 내가 몰랐지요.

시한부 삶을 살고 있는 나무를 매일 아침 바라보고 있습니다.

응급차가 사이렌을 울리면서 옆을 지나갈 때 혹시 어떤 생각들을 하십니까?

길을 비켜 주면서 많은 생각들을 하시겠지요.

저 자신 예전에는 차를 비켜주면서 어떤 그림을 떠올리곤 했습니다.

응급차 안에서 누가 막 죽어가고 있거나 고통을 참고 있는 그림이 눈앞에 떠오르더라구요.

나중에 저 자신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시를 쓰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릴케의 글에도 그런 게 나오지요. '한 사람이 울고 있다.'로 시작하는 「두이노의 비가(悲歌)」가 그것이지요.

저는 젊은 시절 「허무집」을 쓸 때에는 맨날 우는 얘기를 썼는데,

정말 울고 있는 것을 요새같이 더 직감했던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응급차가 지나가도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고, 아침마다 잎을 뜯어줄 때 그 화분에서도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습니다.

바로 그런 어떤 작은 것들을 위해서 우리가 무엇인가를 써야 되지 않을까요.

그러려면 우리의 '보는 법'이 조금은 달라져야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글을 쓰려고 한다면 좀더 자세히 봐야 됩니다.

현대는 앞으로 속도가 점점 빨라질텐데, 그런 사회 속일수록 '잘 보는 법'이 정말 필요할 것입니다.

그런 눈을 지닌 사람들이 정신없이 굴러가는 세상을 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많습니다.

앞으로의 세계에서는 적어도 각 나라가 변별성을 가지는 것은 문학이 아닐 것입니다.

빨리 가는 사람들은 지나치고 마는 것을 보는 사람들이 문학을 키워가는 것이고,

결국은 이 세계를 살아 남게 하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지금 증권들 해서 굉장히 잘 사는 사람들이 많은데,

돈으로써 세상을 구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결국 얼마나 우리가 잘 사는 모양들을 보았는가,

그것을 언어화할 수 있는가 하는 것 때문에, 우리의 삶이 삶다워지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스스로를 선택할 세상이 올 때

인간의 존엄을 지키면서 살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거창한 생각까지 할 때가 많습니다.

'보는 법'에 대해서 스스로에게 질문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요즘 굉장히 시끄러운 세상,

속도가 빠른 세상에 살고 있음과 동시에 침묵이 굉장히 무서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문학 중에서도 시는 침묵이 탄생시킨 바가 참 많다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루에 얼마나 침묵했습니까.

고독을 굉장히 무서워하는데 사실 문학은 고독이 없으면 나오지 않습니다.

고독이라는 것도 어떻게 보면 하나의 장애일 수 있습니다.

실은 일종의 정신적인 장애로서 남다른 고독을 맛볼 때 사실은 문학은 탄생된다고 생각합니다.

속도와 떨어져서 자기를 들여다볼 수 있는 시간이 많을수록 문학이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데서 나온 문학은 참다운 생명력을 지닐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중심이 해체되는 그런 포스트모던한 시기에 살고 있습니다.

중심이 해체되면서 문학 동아리들의 시대가 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전부 위기로만 받아들일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중심이 해체됨으로 해서 사실은 중심이 많아지기도 하는 것이니까요.

그 전에는 중심이 하나였지만 지금은 그것이 열 개로 해체된다면, 중심이 열 개가 생기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더 희망적일 수 있다고 봅니다.

바쁘고 빨리 돌아가는 시대에 문학은 제대로 보는 눈을 가질 수 있다면 앞으로 갈수록 더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위에 말씀드린 몇 가지 질문들을 자신에게 던지면서 살아간다면, 여러분은 좋은 시를 쓸 수 있을 것입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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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문학의 만남
글쓴이 : 글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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