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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리의 수업/시 배움 자료

[스크랩] 좋은 시인이 되는 길 - 강은교 (1)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진다

by 拏俐♡나리 2010. 10. 1.

좋은 시인이 되는 길 - 강은교

(1)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진다

저는 우선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 모두 자신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던져 보았으면 합니다.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진다는 것은,

또 자신에게 해답을 구한다는 점에서 문제 해결의 빛을 끄집어내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잠깐씩 자신을 돌아보기 위해서는 무보상, 무보수의 시간을 일주일에 한 시간이라도 가져야 합니다.

그런 시간을 가질 수 있다면 우리는 행복해지지 않을까 합니다.

먼저 이런 질문을 자신에게 던져 보십시오.

'나는 오늘 몇 번의 전율을 경험했는가? 정신과 살의 스파크, 또는 전기가 찌르르 흐르는 듯한 전율(戰慄)을 몇 번이나 느꼈는가?' 제 경우에도 학창 시절을 돌아보면 아름다운 선율 한 가닥 앞에서도 왜 그렇게 떨렸는지 모르겠습니다.

특히 차이코프스키의 곡들을 들을 때는 더 그랬습니다.

아마도 그 사람에게 그런 정서가 깃들어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보면 예술의 최초의 단계는 부르르 떠는 데서부터 시작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참 많습니다.

더 심한 말로 표현을 하면 경련, 발작 같은 것들이 예술의 초입이지 않는가 합니다.

예를 들어 남자의 경우에는 아주 예쁜 여자를 봤을 때는 온몸에 전기가 쫙 흐르듯 한다고 하지요.

예술 쪽으로 시선을 옮겨 보면, 예술적인 대상을 만났을 때 전기가 찌르르 오는 게 그 최초의 단계가 아닌가 여겨집니다.

시는 언어의 경련과 같은 것입니다.

말하자면 길게 쓰기보다 어떤 대상에서 짧게 그 무엇인가를 직관적으로 포착해 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시야말로 어떤 전율이 들어 있지 않으면 안 됩니다.

어떤 시를 보면 전기가 부르르 올 때가 있지요.

예를 들어서 김수영의 「풀」을 맨 처음 읽었을 때,

서정주의 어떤 시를 맨 처음 읽었을 때 전기가 부르르 온 경험을 많은 사람들이 갖고 있을 것입니다.

저는 어떤 대상과의 감동적인 교감에 따라 전기가 부르르 온다면, 일단 그 사람에게는 시를 쓸 소질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떤 대상을 만나 스스로 전율을 느끼는 경우가 참 많다고 하면, 그 사람은 시를 쓰라는 겁니다.

저는 그것이 시인으로서의 품성을 가늠하는 하나의 기준이 될 수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왜냐하면 예술의 최초의 순간은 바로 그러한 전율에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1800년대 미국의 사상가로 「월든(Walden)」

(「숲속의 생활」로 번역 출간)의 저자인 헨리 데이비드 소로(1817~1862; Henry David Thoreau)는

 명문 하버드 대학을 나왔지만, 도시에서의 번잡한 삶과 재산을 버리고

진짜 무소유가 되어서 월든 호숫가 숲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손수 통나무집을 지어서 살았고, 숲속의 땅에 밀을 심고 스스로 반죽해서 만든 빵을 먹고 살았습니다.

옷은 주위의 농부들한테 헌옷을 얻어서 입었고, 월든 호숫가에 집을 짓고 평생을 도시로 나오지 않고 살았습니다.

소로는 오늘날 생각하면 너무 아름다운 환경에서 살았지요.

그렇지만 산 속에서 고독을 벗하면서 혼자 사는데,

아침 숲을 산책하는 것이 그 사람의 하루 일과 중의 하나라고 「저널」에 씌어 있어요.

저널」은 그 사람의 시적 일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로는 비록 시인은 아니었지만 굉장히 시적인 삶을 살았다고 생각됩니다.

그 월든 호숫가에서 숲속에 살면서 아침마다 한 일이 뭐냐 하면 해 떠오르는 것을 보는 것,

저녁에 하는 일은 해 지는 것을 보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걸 일지에 써놨지요.

특히 일출(日出)은 그냥 보는 게 아니라 전율을 얼마나 느끼면서 보는가,

또 '일출에 즈음하여 아침 산책을 나갈 때 새가 지저귈 것이다 하는 기대가 당신을 깨우지 않는다면

당신의 인생에서의 봄, 인생에서의 아침은 이미 지나간 것이다.',

'일출과 일몰(日沒)을 보면서 전율하지 않는다면 이미 인생의 아침과 봄은 지나간 것이다.'라는 대목이 인상적입니다.

그의 일지에 따르면 이성과 연애를 한 경험도 없이, 자연과 연애를 하며 살았습니다.

평생을 옷 한 벌로 산 게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습니다.

다행히도 저희 집에서는 해 뜨는 것과 해 지는 게 잘 보입니다.

새벽 바다를 가르며 해가 떠오르는 걸 볼 때마다, 해가 바다 속에 잠기는 걸 볼 때마다 저도 모르게 탄성을 올리곤 합니다.

그래서 아직도 시라는 것을 끄적거리고 있나 보다 생각할 때가 참 많습니다.

여러분도 저처럼 자신에게 물어보기 바랍니다.

'오늘 몇 번이나 전율했습니까? 그냥 전율한 정도가 아니고, 부르르 떨어본 적은 있는가?'

그걸 자기한테 물어보아, 최소한 일출과 일몰 두 번은 탄성을 질렀던 기억이 우러나와야 합니다.

 왜일까요? 문학은 그러한 탄성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여러분이 다른 사람의 글을 읽는다고 할 때 그 속에 탄성이 없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탄성이 없는 글은 죽은 글이라고 보면 거의 정확할 것입니다.

글 속의 어딘가에 분명히 탄성이 숨어 있는데 독자가 그걸 감지할 수 없다면 그 작품은 죽은 작품이거나,

아니면 감상에 젖어 있는 작품일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정확할 것입니다.

 

출처 : 문학의 만남
글쓴이 : 글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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