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의 시세계 연구 2
- 기독교 의식을 중심으로
리울 김형태
II. 本 論
1. 基督敎 文學(詩)의 意義
한국 시문학사의 전개과정을 살펴볼 때, 우리의 近代詩, 現代詩가 傳統 詩歌의 계승에만 머물지 않고 서구의 신문예 사조의 영향권 아래에서 형성되었음과, 그리고 이때 기독교의 영향이 무시할 수 없을 만큼 대단한 것이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창가 가사 신시 등 개화기 시가에 투영된 기독교 의식은 비록 미의식의 기반에서 자리잡지는 못했을지라도 사회적 문화적 기틀 위에 사상적인 큰 역할을 하였다고 보아진다.
한 작품이 시대의 사회 환경 시민의식을 이해하는 하나의 산물이라면 기독교가 우리의 근대화 시기에 큰 역할을 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막스 베버가 사회과학을 연구하는 데는 종교의 도움없이는 불가능하다고 했듯이 한 시대의 민족적 정신적 의식상태를 살피는 데는 예술 속에 투영된 종교를 살피는 것이 큰 도움이 된다. '프로테스탄티즘이 서구 자본주의의 정신적 기저가 된다고 지적한 막스 베버의 종교사회학적 분석을 빌릴 것도 없이 종교가 그 시대의 가치관과 윤리관을 지배해 왔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또한 종교란 인간의 본질을 요약하며 역사의 원동력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인간이 깊이 믿고 있는 것은 그의 행동의 방향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문학과 종교는 물론 다른 것이다. 그러나 文學이 人間의 省察에 중대한 使命이 있다고 한다면 宗敎와 共通基盤을 가진다고 할 것이다. 문학과 종교가 만날 때 종교문학이 탄생한다. 이것은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 훌륭한 예술작품일수록 위대한 사상이 담겨있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고 문학이 종교를 담는 그릇은 아니다. 그렇게 될 경우 개화기 문학이나 공산주의 문학에서 보듯 계몽주의 문학이나 목적주의 문학에 빠질 위험성이 있다. 반대로 문학이 종교를 도구화할 수도 없다. 문학과 종교가 상보적인 관계 속에서 인간의 정신문명을 선도할 때 진정한 의미에서 문학과 종교는 바람직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문익환의 지적처럼 기독교인이 쓰는 문학은 신앙의 肉化이지 목적을 달성하고 나면 벗어 버려도 좋은 헌 옷과 같은 것은 아니다. 기독교의 진리는 그림이요, 예술은 그 그림을 넣은 액자라고 생각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韓國基督敎文學'이라고 할 때에는 개념상 基督敎라고 하는 종교적 일반성과 韓國이라는 지역적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또 이들 상호관계를 통하여 '한국기독교문학'의 개념설정 및 영역을 한계짓는 것은 신중하게 검토되어야 할 문제라고 본다.
김현승, 박두진, 구상 등의 시인을 기독교 시인이라고 아무 망설임없이 부르면서도 기독교 문학 또는 기독교 시 그러면 아직도 생소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한국문학 속에 엄연히 기독교 시인, 기독교 작가가 존재함에도 이 분야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적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서구유럽에서 기독교 문학이 활발히 발전된 이유가 '성서와 문학을 분리시키지 않고 동일한 관점에서 바라보았기 때문'이라는데 우리는 그런 노력이 부족해서일까.
기독교 문학 또는 기독교 시의 개념 및 정의에 관해서는 아직도 논의가 분분하다. 여러 사람들의 많은 견해가 있었음에도 아직까지 확실한 개념 정립이 되지 않은 것을 보면 문학에 대한, 혹은 종교에 대한 정의 만큼이나 기독교 문학 또는 기독교 시에 대한 개념 정립이 쉽지 않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리라. 이런 관점에서 박두진의 다음 언급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겠다.
基督敎文學 基督敎詩의 정의와 개념을 설정하는 것은 매우 복잡하고 애매모호한 문제성이 있다. '基督敎精神'이나 '基督敎思想'이나 '基督敎神學'이란 용어의 내용 그 자체의 차이도 분별해서 받아들여야 하는 어려움도 있다. 또 사상이나 신학이란 면에서 다루지 않고 순전히 신앙정서, 기독교 생활적인 정서와 그러한 인생관 혹은 정신이 주가 되었을 경우, 마찬가지로 基督敎詩 혹은 基督敎 信仰詩라고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基督敎文學 基督敎詩는 기독교 자체, 기독교사상 자체, 그 신앙의 본질, 그 생활 정서의 본질의 문제이다.
한국의 基督敎詩는 전혀 이념적이고 문화운동적인 실제 경험을 갖지 못한 채, 그 존립 존재의 여부조차 詩壇的으로 인정되거나 거론된 바 없다. 기독교 신자가 있는 이상 기독교 문화가 있어야 하며, 그 기독교 문화의 토양 위에서 당연히 있어야 할 것이 基督敎文學이며 基督敎詩여야 하기 때문이다.
기독교가 있으면 기독교의 생활이 있고 그 생활이 종교적 정서로 醇化되고, 기독교정신으로 昇華되고, 기독교 사상으로 토착 체계화될 때 그러한 정신적 이념적 골격과 정서적 정감적 혈육이 유기화 생명화되어 기독교 종교시로서, 기독교 신앙시로서, 기독교 생활정서의 형상화로서 발화 결실되어야 한다는 것은 마땅히 그래야 하고도 남을 필연성을 갖는 것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기독교 시의 개념에 대한 그동안의 개별적 견해를 보면, 먼저 명계웅은 '기독교 문학은 구제의 문학, 화해의 문학으로서 그리스도교적인 사랑의 주제를 개성화하고 인간의 원죄의식과 화해의 가능성을 상황적 입장에서 추구한 것이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고, 金榮秀는 '基督敎詩의 본성은 종교적 신앙의 직접적인 표백이 아니더라도 현대인의 세계관 속에서 신앙적인 기갈증과 희구를 노래하는 데 있다'라고 보고 있으며, 金禧寶는 '크리스찬이라는 작가의 신분, 기독교적 시점(헤브라이즘의 영성, 덕성, 신에의 귀의), 문학작품으로서의 일반적 정의에 어긋나지 않아야 한다'라고 얘기하고 있다. 李商燮은 '기독교의 근본적 테마인 죄 구원 사랑 희생 화합의 공동사회 등의 문제에 대한 일반적 인식이 당장의 현실에서 깊은 의미를 띠울 수 있어야 기독교 문학은 가능하다. 그뿐 아니라 기독교 사상을 구현하는 전통적인 심벌과 드라마(예컨대 선악과, 아담과 이브, 그리스도와의 최후의 만찬 등)가 한국적 현실의 의미를 구현하도록 적절히 다듬어져야 한다'고 말하고 있고, 李永傑은 '근본적으로 기독교적 감수성을 보이며, 기독교적 사상과 상징이나 우의를 사용하는 시를 뜻한다'고 보고 있으며, 申奎浩는 '기독교 문학은 성서적 복음을 토대로 보편적 예술성을 달성할 때 이루어진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나름대로 일리가 있는 주장이지만, 단편적 또는 부분적인 언급에 치우친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들 주장에서 공통분모를 찾아보면 기독교문학이란 개념이 손에 잡힐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런 노력이 丘昌煥에게서 보인다. 그는 基督敎文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요약 정리하고 있다.
첫째로, 基督敎文學은 言語藝術로서의 文學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基督敎文學이란 바로 基督敎思想의 예술적인 형상화인만큼, 想像力과 言語美學을 동원하여 하나의 예술작품을 창조해야 한다. 基督敎文學이라 하여 문학의 영역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둘째로, 基督敎文學은 基督敎精神의 구현이요 基督敎思想의 표현이어야 한다. 따라서 선악의 대결, 양심과 고뇌, 신앙과 구원에 대한 추구, 신에 대한 찬양과 삶의 환희, 사랑과 정서의 실현, 소망과 용기, 자기희생과 이웃에 대한 봉사, 인간성을 옹호하고 회복하려는 휴머니즘 등이 작품에 나타나야 한다. 인간의 가치를 높이고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가는 인간화의 과제가 다루어져야 한다.
셋째로, 基督敎文學의 방법은 직접적인 경우와 간접적인 경우와 비판적인 경우의 셋으로 나눌 수 있다. 前者는 旣成敎理의 擁護와 信仰의 干證이요, 다음은 함축적 방법으로서 기독교사상을 溶解, 表現하는 경우이다. 그리고 끝의 것은 기독교의 모순과 비리를 풍자 비판하는 경우로서, 모든 제특질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가장 중요시할 것은 예술작품 속에 자연스럽게 기독교정신을 구현시키는 방법이다.
넷째로, 基督敎文學은 종교의식의 생활화와 체험적인 토착화가 선행되어야 한다. 구체적인 생활을 통하여 기독교적인 정서가 다듬어지고 사상이 익어가고 신념이 의지화되어갈 때 비로소 기독교문학은 형성되어 간다. 기독교정신을 생활화하지도 않고 관념적, 추상적 지식으로만 이해한다면 문학의 육화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기독교문학은 작가의 기독교적 생활체험과 크리스찬의 문학적 훈련이 행해져야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끝으로, 기독교문학은 存在의 문학이 아니라 當爲의 문학, 快樂의 문학이 아니라 敎訓의 문학, 慰安의 문학이 아니라 救濟의 문학, 消費의 문학이 아니라 創造의 문학, 遊閑의 문학이 아니라 苦惱의 문학이 되어야 한다.
기독교 시는 일반적인 시와 똑같은 예술성에다 신앙적 고뇌와 갈등, 그리고 기독교 의식이 담겨져야 한다. 기독교 의식에서 시적 출발을 하여 궁극적 목적인 구원 부활 사랑의 사상을 나타내며 여기에 도달하기 위해 어떻게 현실에 적응하며 구현했는가 이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좋은 기독교 시란 삶의 축복 모순 불합리성 아름다움 권태 죄악 회의까지도 나타내야 하며 또한 인간의 정신 세계의 본능과 무의식과 온 삶이 창조의 과정에 작용해야 한다. 문학은 윤리적 도덕적 사회적인 책임 의식을 거부할 수 있지만 종교는 여기에 국한되지 않을 수 없다. 표현에도 문학은 암시이지만 종교는 교훈성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렇지만 종교성을 작품에 노출시키지 않고 심미적으로 승화시킬 때 훌륭한 작품이 될 수 있다. 기독교 작가가 관심을 가져야 할 점은 기독교 의식을 간접적 수단을 통해서 나타내야 하는 것이다. 관점을 표현하는데 있어서 너무 추상적이거나 노골적이 될 경우는 문학적 효과를 감소시키는 것이다.
기독교 의식이란 기독교의 목표가 되는 속죄, 구원, 부활, 재림 등의 실현을 위해 일상생활에서 기도하고 간증하며 신과 교감하는 것을 말한다. 이같은 의식이 시인의 내부에 심화됨으로써 작품 속에 기독교 의식의 시정신이 드러나게 된다. 시인이 기독교 의식에 투철할 때 우리는 그를 기독교 시인이라고 지칭할 수 있다. 그 문학성이 고양되어 우리 시문학사에 비중을 둘 수 있는 상태로 발전될 때 기독교시로서의 의의가 있다. 성서적 사실에만 집착하지 않고, 체험의 종교로서 체질화된 시인을 기독교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基督敎文學 또는 基督敎詩의 개념에 입각해 볼 때, 김현승, 박두진, 구상 시인 등의 반열에 윤동주를 올려 놓는데 무리가 없을 것이다. 다시말해 윤동주를 기독교 시인으로, 그리고 그의 작품을 기독교 시로 보는데 전혀 하자가 없다는 말이다. 아니 어떤 의미에서는 그 누구 보다도 가장 모범적인 기독교인의 모습과 가장 훌륭한 기독교시의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생애는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려는 기독교 정신으로 일관되어 있고, 삶의 고백인 그의 작품에는 기독교 의식으로 충일하고 있기 때문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얘기하면 윤동주의 시 작품에는 그리스도와의 동일시, 원죄의식(부끄러움), 본향에 대한 동경, 속죄양(희생양) 의식, 부활사상, 소명의식, 박애정신 등 기독교 의식의 정화가 가장 아름답게 꽃피워져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하나 더 덧붙이자면, 우연인지 신의 놀라운 섭리인지는 몰라도 윤동주와 그리스도의 닮은 점이 너무도 많다는 점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로마제국의 식민지인 이스라엘에서 태어나 예루살렘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갈릴리라는 지방에서 맏이로 성장하여, 비폭력, 무저항 정신, 곧 박애주의로 일관하다 사상범으로 체포되어 십자가상에서 죽음을 당했다가 부활하여 많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 살아있다면, 윤동주는 일제치하 정치, 문화적으로 소외된 북간도에서 태어나 역시 장남으로 성장하여 누구보다도 시대를 아파하고 고뇌하다가 사상범으로 체포되어 후쿠오카 감옥에서 요절했으나 민족시인으로 부활하여 우리들 가슴 속에 살아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둘다 조국을 사랑하는 식민 치하의 젊은이로서 수도가 아닌 비교적 소외된 지방에서 맏이로 태어나 자랐다는 점, 겸손하고 온유한 성격으로 비폭력, 무저항 정신으로 일관했지만 결국 위험인물로 낙인 찍혀 사상범으로 체포되어 젊은 나이에 희생양이 되었다는 점, 그리고 사족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두 사람 주변에 막달라 마리아와 순이로 이름 불리워지는 여인이 있었다는 점 등이 닮은꼴이다. 이러한 여러가지 유사점으로 인해 윤동주는 누구보다도 그리스도에게서 심리적 친밀감을 느꼈을 것이고, 그리스도를 삶의 푯대로 삼아 할 수 있다면 그분처럼 살고자 애썼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러한 가정은 윤동주의 삶과 詩를 조명해 볼 때 사실로 드러난다. 즉 그는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암흑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어떻게 살 것인가,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끊임없이 고뇌하다가 마침내 그리스도처럼 살기로 결심한다. 따라서 윤동주의 일생은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려는 치열한 몸부림이었다는 측면에서, 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었다고 감히 말할 수가 있는 것이다.
* 참고로 저 리울 김형태 시인과 직접 간접적으로 관련된 홈페이지를 소개합니다.
* 홈페이지 주소 :
http://edu.co.kr/riulkht(교육과 문학이 혼합된 개인 홈피)
http://web.edunet4u.net/~ych2000(제가 중심이 되어 만든 국어과 홈피)
http://my.netian.com/~riulkht(제 개인 문학 사랑방 홈피)
http://pyungkwang.com(제가 다니는 평광교회 홈피)
* 리울 김형태 시인의 다음 인터넷 카페 : 리울 샘 모꼬지
* 현재 저는 이 논문을 바탕으로 윤동주의 시와 생애를 소설화하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도움이나 의견을 바랍니다. 앞의 홈피 또는 이메일(riulkht@unitel.co.kr)로 보내주세요
- 기독교 의식을 중심으로
리울 김형태
II. 本 論
1. 基督敎 文學(詩)의 意義
한국 시문학사의 전개과정을 살펴볼 때, 우리의 近代詩, 現代詩가 傳統 詩歌의 계승에만 머물지 않고 서구의 신문예 사조의 영향권 아래에서 형성되었음과, 그리고 이때 기독교의 영향이 무시할 수 없을 만큼 대단한 것이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창가 가사 신시 등 개화기 시가에 투영된 기독교 의식은 비록 미의식의 기반에서 자리잡지는 못했을지라도 사회적 문화적 기틀 위에 사상적인 큰 역할을 하였다고 보아진다.
한 작품이 시대의 사회 환경 시민의식을 이해하는 하나의 산물이라면 기독교가 우리의 근대화 시기에 큰 역할을 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막스 베버가 사회과학을 연구하는 데는 종교의 도움없이는 불가능하다고 했듯이 한 시대의 민족적 정신적 의식상태를 살피는 데는 예술 속에 투영된 종교를 살피는 것이 큰 도움이 된다. '프로테스탄티즘이 서구 자본주의의 정신적 기저가 된다고 지적한 막스 베버의 종교사회학적 분석을 빌릴 것도 없이 종교가 그 시대의 가치관과 윤리관을 지배해 왔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또한 종교란 인간의 본질을 요약하며 역사의 원동력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인간이 깊이 믿고 있는 것은 그의 행동의 방향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문학과 종교는 물론 다른 것이다. 그러나 文學이 人間의 省察에 중대한 使命이 있다고 한다면 宗敎와 共通基盤을 가진다고 할 것이다. 문학과 종교가 만날 때 종교문학이 탄생한다. 이것은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 훌륭한 예술작품일수록 위대한 사상이 담겨있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고 문학이 종교를 담는 그릇은 아니다. 그렇게 될 경우 개화기 문학이나 공산주의 문학에서 보듯 계몽주의 문학이나 목적주의 문학에 빠질 위험성이 있다. 반대로 문학이 종교를 도구화할 수도 없다. 문학과 종교가 상보적인 관계 속에서 인간의 정신문명을 선도할 때 진정한 의미에서 문학과 종교는 바람직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문익환의 지적처럼 기독교인이 쓰는 문학은 신앙의 肉化이지 목적을 달성하고 나면 벗어 버려도 좋은 헌 옷과 같은 것은 아니다. 기독교의 진리는 그림이요, 예술은 그 그림을 넣은 액자라고 생각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韓國基督敎文學'이라고 할 때에는 개념상 基督敎라고 하는 종교적 일반성과 韓國이라는 지역적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또 이들 상호관계를 통하여 '한국기독교문학'의 개념설정 및 영역을 한계짓는 것은 신중하게 검토되어야 할 문제라고 본다.
김현승, 박두진, 구상 등의 시인을 기독교 시인이라고 아무 망설임없이 부르면서도 기독교 문학 또는 기독교 시 그러면 아직도 생소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한국문학 속에 엄연히 기독교 시인, 기독교 작가가 존재함에도 이 분야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적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서구유럽에서 기독교 문학이 활발히 발전된 이유가 '성서와 문학을 분리시키지 않고 동일한 관점에서 바라보았기 때문'이라는데 우리는 그런 노력이 부족해서일까.
기독교 문학 또는 기독교 시의 개념 및 정의에 관해서는 아직도 논의가 분분하다. 여러 사람들의 많은 견해가 있었음에도 아직까지 확실한 개념 정립이 되지 않은 것을 보면 문학에 대한, 혹은 종교에 대한 정의 만큼이나 기독교 문학 또는 기독교 시에 대한 개념 정립이 쉽지 않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리라. 이런 관점에서 박두진의 다음 언급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겠다.
基督敎文學 基督敎詩의 정의와 개념을 설정하는 것은 매우 복잡하고 애매모호한 문제성이 있다. '基督敎精神'이나 '基督敎思想'이나 '基督敎神學'이란 용어의 내용 그 자체의 차이도 분별해서 받아들여야 하는 어려움도 있다. 또 사상이나 신학이란 면에서 다루지 않고 순전히 신앙정서, 기독교 생활적인 정서와 그러한 인생관 혹은 정신이 주가 되었을 경우, 마찬가지로 基督敎詩 혹은 基督敎 信仰詩라고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基督敎文學 基督敎詩는 기독교 자체, 기독교사상 자체, 그 신앙의 본질, 그 생활 정서의 본질의 문제이다.
한국의 基督敎詩는 전혀 이념적이고 문화운동적인 실제 경험을 갖지 못한 채, 그 존립 존재의 여부조차 詩壇的으로 인정되거나 거론된 바 없다. 기독교 신자가 있는 이상 기독교 문화가 있어야 하며, 그 기독교 문화의 토양 위에서 당연히 있어야 할 것이 基督敎文學이며 基督敎詩여야 하기 때문이다.
기독교가 있으면 기독교의 생활이 있고 그 생활이 종교적 정서로 醇化되고, 기독교정신으로 昇華되고, 기독교 사상으로 토착 체계화될 때 그러한 정신적 이념적 골격과 정서적 정감적 혈육이 유기화 생명화되어 기독교 종교시로서, 기독교 신앙시로서, 기독교 생활정서의 형상화로서 발화 결실되어야 한다는 것은 마땅히 그래야 하고도 남을 필연성을 갖는 것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기독교 시의 개념에 대한 그동안의 개별적 견해를 보면, 먼저 명계웅은 '기독교 문학은 구제의 문학, 화해의 문학으로서 그리스도교적인 사랑의 주제를 개성화하고 인간의 원죄의식과 화해의 가능성을 상황적 입장에서 추구한 것이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고, 金榮秀는 '基督敎詩의 본성은 종교적 신앙의 직접적인 표백이 아니더라도 현대인의 세계관 속에서 신앙적인 기갈증과 희구를 노래하는 데 있다'라고 보고 있으며, 金禧寶는 '크리스찬이라는 작가의 신분, 기독교적 시점(헤브라이즘의 영성, 덕성, 신에의 귀의), 문학작품으로서의 일반적 정의에 어긋나지 않아야 한다'라고 얘기하고 있다. 李商燮은 '기독교의 근본적 테마인 죄 구원 사랑 희생 화합의 공동사회 등의 문제에 대한 일반적 인식이 당장의 현실에서 깊은 의미를 띠울 수 있어야 기독교 문학은 가능하다. 그뿐 아니라 기독교 사상을 구현하는 전통적인 심벌과 드라마(예컨대 선악과, 아담과 이브, 그리스도와의 최후의 만찬 등)가 한국적 현실의 의미를 구현하도록 적절히 다듬어져야 한다'고 말하고 있고, 李永傑은 '근본적으로 기독교적 감수성을 보이며, 기독교적 사상과 상징이나 우의를 사용하는 시를 뜻한다'고 보고 있으며, 申奎浩는 '기독교 문학은 성서적 복음을 토대로 보편적 예술성을 달성할 때 이루어진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나름대로 일리가 있는 주장이지만, 단편적 또는 부분적인 언급에 치우친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들 주장에서 공통분모를 찾아보면 기독교문학이란 개념이 손에 잡힐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런 노력이 丘昌煥에게서 보인다. 그는 基督敎文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요약 정리하고 있다.
첫째로, 基督敎文學은 言語藝術로서의 文學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基督敎文學이란 바로 基督敎思想의 예술적인 형상화인만큼, 想像力과 言語美學을 동원하여 하나의 예술작품을 창조해야 한다. 基督敎文學이라 하여 문학의 영역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둘째로, 基督敎文學은 基督敎精神의 구현이요 基督敎思想의 표현이어야 한다. 따라서 선악의 대결, 양심과 고뇌, 신앙과 구원에 대한 추구, 신에 대한 찬양과 삶의 환희, 사랑과 정서의 실현, 소망과 용기, 자기희생과 이웃에 대한 봉사, 인간성을 옹호하고 회복하려는 휴머니즘 등이 작품에 나타나야 한다. 인간의 가치를 높이고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가는 인간화의 과제가 다루어져야 한다.
셋째로, 基督敎文學의 방법은 직접적인 경우와 간접적인 경우와 비판적인 경우의 셋으로 나눌 수 있다. 前者는 旣成敎理의 擁護와 信仰의 干證이요, 다음은 함축적 방법으로서 기독교사상을 溶解, 表現하는 경우이다. 그리고 끝의 것은 기독교의 모순과 비리를 풍자 비판하는 경우로서, 모든 제특질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가장 중요시할 것은 예술작품 속에 자연스럽게 기독교정신을 구현시키는 방법이다.
넷째로, 基督敎文學은 종교의식의 생활화와 체험적인 토착화가 선행되어야 한다. 구체적인 생활을 통하여 기독교적인 정서가 다듬어지고 사상이 익어가고 신념이 의지화되어갈 때 비로소 기독교문학은 형성되어 간다. 기독교정신을 생활화하지도 않고 관념적, 추상적 지식으로만 이해한다면 문학의 육화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기독교문학은 작가의 기독교적 생활체험과 크리스찬의 문학적 훈련이 행해져야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끝으로, 기독교문학은 存在의 문학이 아니라 當爲의 문학, 快樂의 문학이 아니라 敎訓의 문학, 慰安의 문학이 아니라 救濟의 문학, 消費의 문학이 아니라 創造의 문학, 遊閑의 문학이 아니라 苦惱의 문학이 되어야 한다.
기독교 시는 일반적인 시와 똑같은 예술성에다 신앙적 고뇌와 갈등, 그리고 기독교 의식이 담겨져야 한다. 기독교 의식에서 시적 출발을 하여 궁극적 목적인 구원 부활 사랑의 사상을 나타내며 여기에 도달하기 위해 어떻게 현실에 적응하며 구현했는가 이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좋은 기독교 시란 삶의 축복 모순 불합리성 아름다움 권태 죄악 회의까지도 나타내야 하며 또한 인간의 정신 세계의 본능과 무의식과 온 삶이 창조의 과정에 작용해야 한다. 문학은 윤리적 도덕적 사회적인 책임 의식을 거부할 수 있지만 종교는 여기에 국한되지 않을 수 없다. 표현에도 문학은 암시이지만 종교는 교훈성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렇지만 종교성을 작품에 노출시키지 않고 심미적으로 승화시킬 때 훌륭한 작품이 될 수 있다. 기독교 작가가 관심을 가져야 할 점은 기독교 의식을 간접적 수단을 통해서 나타내야 하는 것이다. 관점을 표현하는데 있어서 너무 추상적이거나 노골적이 될 경우는 문학적 효과를 감소시키는 것이다.
기독교 의식이란 기독교의 목표가 되는 속죄, 구원, 부활, 재림 등의 실현을 위해 일상생활에서 기도하고 간증하며 신과 교감하는 것을 말한다. 이같은 의식이 시인의 내부에 심화됨으로써 작품 속에 기독교 의식의 시정신이 드러나게 된다. 시인이 기독교 의식에 투철할 때 우리는 그를 기독교 시인이라고 지칭할 수 있다. 그 문학성이 고양되어 우리 시문학사에 비중을 둘 수 있는 상태로 발전될 때 기독교시로서의 의의가 있다. 성서적 사실에만 집착하지 않고, 체험의 종교로서 체질화된 시인을 기독교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基督敎文學 또는 基督敎詩의 개념에 입각해 볼 때, 김현승, 박두진, 구상 시인 등의 반열에 윤동주를 올려 놓는데 무리가 없을 것이다. 다시말해 윤동주를 기독교 시인으로, 그리고 그의 작품을 기독교 시로 보는데 전혀 하자가 없다는 말이다. 아니 어떤 의미에서는 그 누구 보다도 가장 모범적인 기독교인의 모습과 가장 훌륭한 기독교시의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생애는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려는 기독교 정신으로 일관되어 있고, 삶의 고백인 그의 작품에는 기독교 의식으로 충일하고 있기 때문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얘기하면 윤동주의 시 작품에는 그리스도와의 동일시, 원죄의식(부끄러움), 본향에 대한 동경, 속죄양(희생양) 의식, 부활사상, 소명의식, 박애정신 등 기독교 의식의 정화가 가장 아름답게 꽃피워져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하나 더 덧붙이자면, 우연인지 신의 놀라운 섭리인지는 몰라도 윤동주와 그리스도의 닮은 점이 너무도 많다는 점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로마제국의 식민지인 이스라엘에서 태어나 예루살렘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갈릴리라는 지방에서 맏이로 성장하여, 비폭력, 무저항 정신, 곧 박애주의로 일관하다 사상범으로 체포되어 십자가상에서 죽음을 당했다가 부활하여 많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 살아있다면, 윤동주는 일제치하 정치, 문화적으로 소외된 북간도에서 태어나 역시 장남으로 성장하여 누구보다도 시대를 아파하고 고뇌하다가 사상범으로 체포되어 후쿠오카 감옥에서 요절했으나 민족시인으로 부활하여 우리들 가슴 속에 살아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둘다 조국을 사랑하는 식민 치하의 젊은이로서 수도가 아닌 비교적 소외된 지방에서 맏이로 태어나 자랐다는 점, 겸손하고 온유한 성격으로 비폭력, 무저항 정신으로 일관했지만 결국 위험인물로 낙인 찍혀 사상범으로 체포되어 젊은 나이에 희생양이 되었다는 점, 그리고 사족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두 사람 주변에 막달라 마리아와 순이로 이름 불리워지는 여인이 있었다는 점 등이 닮은꼴이다. 이러한 여러가지 유사점으로 인해 윤동주는 누구보다도 그리스도에게서 심리적 친밀감을 느꼈을 것이고, 그리스도를 삶의 푯대로 삼아 할 수 있다면 그분처럼 살고자 애썼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러한 가정은 윤동주의 삶과 詩를 조명해 볼 때 사실로 드러난다. 즉 그는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암흑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어떻게 살 것인가,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끊임없이 고뇌하다가 마침내 그리스도처럼 살기로 결심한다. 따라서 윤동주의 일생은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려는 치열한 몸부림이었다는 측면에서, 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었다고 감히 말할 수가 있는 것이다.
* 참고로 저 리울 김형태 시인과 직접 간접적으로 관련된 홈페이지를 소개합니다.
* 홈페이지 주소 :
http://edu.co.kr/riulkht(교육과 문학이 혼합된 개인 홈피)
http://web.edunet4u.net/~ych2000(제가 중심이 되어 만든 국어과 홈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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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pyungkwang.com(제가 다니는 평광교회 홈피)
* 리울 김형태 시인의 다음 인터넷 카페 : 리울 샘 모꼬지
* 현재 저는 이 논문을 바탕으로 윤동주의 시와 생애를 소설화하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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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윤동주의 시를 읽는 모임
글쓴이 : 리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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