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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리의 수업/작가, 작품론

[스크랩] 윤동주의 시세계 연구 3

by 拏俐♡나리 2010. 11. 2.

2. 윤동주의 삶과 그의 시세계

1) 평화지향적 세계 - 신앙적 성장기

(1) 출생과 유년기 시절 : 에덴의 동산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음력 11월 17일) 만주국 간도성 화룡현 명동촌에서 윤하현의 외아들인 윤영석과 규암 김약연 목사의 누이 김용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명동촌을 포함한 북간도 지방은 당시 우리 민족의 신문화 운동의 요람지였으며 종교 교육 등을 통한 독립운동과 개화사상의 발상지이기도 했다. 특히 명동은 비록 농촌이기는 하였지만 종교와 교육의 중심지로서 관북 일대 이주민들의 활동이 가장 두드러진 곳이었다. 그것은 윤동주의 외삼촌인 규암 김약연 목사의 교육에 대한 열의로 이루어진 결과였다. 명동은 처음에는 순연한 유학 전통의 마을이었다. 그러다가 1899년으로부터 1909년에 기독교가 들어와서 거의 전 마을이 기독교화 된다. 조부 윤하현은 1910년에 기독교(장로교)에 입교하여, 스스로 재래의 유교적인 가풍에서 과감하게 탈피, 술 담배를 모두 끊고 전통적 제사도 폐지하는 등 아주 독실한 신자로 되었다. 그리하여 윤동주가 태어날 무렵에는 장로직을 맡는다. 윤동주의 죽마고우였던 문익환 목사는 윤하현을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내가 보기엔 명동의 여러 어른들 가운데 윤하현 장로의 인물됨이 가장 컸었다. '東滿의 대통령'이란 별호까지 듣던 김약연 목사님보다 인물됨 자체로는 오히려 큰 분이었다. 워낙 도량이 크고 당당하신 분이었기에, 학문이 전혀 없는 분이면서도 학자들의 마을인 명동에서 크게 존경을 받으며 지냈고, 교회 장로로도 선출되었다. 그분 인물됨의 폭이 그토록 컸었으니 학문만 갖추었더라면 정말 큰 일을 해냈을 분이었다.

명동은 교회사적 측면에서 볼 때도 아주 특별한 곳이다. 왜냐하면 당시 대부분의 교회들이 외국인 선교사들에 의해 그 신앙의 뿌리가 내려진데 비해, 명동교회는 우리 민족 스스로의 힘에 의해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명동교회는 1909년 서울 청년학관을 졸업한 22세의 정재면이 명동학교의 교사로 초빙되어 옴으로써 그 출발을 보게된다. 이렇듯 명동촌을 포함한 간도 지방은 기독교의 유입이 자발적으로 이루어졌는데, 캐나다 선교부가 들어선 것도 간도민들의 요청에 의해서였다고 한다.
명동 사람들이 기독교를 받아들인 이유 중에는 기독교가 지닌 '정치적 피난처'로서의 의미가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중국 대륙에 진출한 기독교는 하나의 종교인 동시에, 이미 국경이 없는 제국과 같은 성격을 지닌 하나의 유기체였다. 그것도 건드리면 몹시 동티가 나는 유기체였다. 그 동티는 어김없고 신속했다. 어디서 서양 선교사가 피살되었다 하면, 이내 그의 모국 군대가 치고 들어왔다.
1897년 11월의 산동성 거야현에서 일어난 독일인 신부 2명의 피살이 독일 군대의 교주만 상륙을 불렀고, 천주교가 큰 피해를 입은 1900년의 의화단 사건은 미국, 영국, 일본, 독일, 이태리, 오스트리아 제국 군대들의 중국 출병과 북경 함락을 낳게 했다. 당시 청국 정부는 구미 열강에 많은 이권을 제공해야 했고, 일단 천주교도라 하면 서양인, 청국인은 물론 북간도의 한인들이 입은 피해까지도 남김없이 배상함으로써 그 사건을 겨우 마무리했다.
결과적으로 보아 종교가 제국주의적 침략의 교두보가 된 셈이다. 그러나 이것은 청나라 입장에서의 이야기다. 청나라의 억압과 횡포에 시달리던 한인들의 입장은 전혀 달랐다. 기독교가 지닌 그런 측면이 오히려 믿음직한 피난처와 보호자로서의 기능을 할 수 있었다. 일제의 세찬 침략의 발톱 아래 풍전등화의 운명인 조국, 그리고 거기서도 떠난 아무 의지할데 없는 무력한 백성들로서, 일단 기독교에 입교만 하면 구미 열강이 후견인 노릇을 해준다는 것은 차리리 매혹적인 조건일 수 있었다.
이런 마을에서 윤동주는 태어나고 자랐다. 그가 태어나기 이전에 부모는 모두 기독교인이었고 따라서 윤동주는 태어나자 유아세례를 받아 교회의 일원으로 등록되었다.

그의 집 큰 대문을 나와 좌로 돌아 큰 길로 향하면 동쪽 개바위 위로 떠올라 쫒아온 햇빛이 우거진 가랑나무숲 위 교회당 종각의 십가가를 비추고 있는 광경을 그는 언제나 보았을 것이며, 그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십가가의 못처럼 그의 마음에 단단히 박혔을 것이다. 우리는 주일 학교도 같이 다녔으며, 구주 성탄 때는 교회당이 가까운 그의 집에서 새벽송 준비를 하고 밤샘을 하며 꽃종이를 준비하곤 했다. 옷을 두툼하게 껴입고 벙거지를 뒤집어쓰고 개가죽 버선을 신고 새벽 눈길을 걸어다니며 찬송가를 부르던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한없이 기쁘다.

그가 예수에 심취하게 된 동기는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니었다. 숙명적인 것이었다고 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 성장 배경과 가정적 분위기가 이미 그에게 신앙의 뿌리를 깊이 심어 주고, 후일 더 큰 시련과도 맞서 끝내 순교자적 자세로 버티게 했던 온전한 힘과 바탕이 되어준 것이다.

또한 문익환은 [동주형의 추억]이란 글에서 '그와 나는 콧물 흘리는 어린 시절의 6년 동안을 함께 소학교에 다니며 민족주의와 기독교 신앙으로 뼈가 굵어 갔다'라고 회고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윤동주는 기독교가 뿌리 내려 힘차게 뻗어나가는 생동감 넘치는 시기에 태어나 어린시절을 기독교적 문화 안에서 보냈다고 보아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부친 윤영석은 1895년 음력 6월 12일에 출생하여 1909년부터 명동학교에서 신학문을 배웠고, 명동중학교를 거쳐 김약연 선생의 주선으로 북경 유학을 하였으며, 윤동주가 태어날 무렵 명동 소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1923년에는 다시 동경으로 공부하러 갔다가 '관동대지진'을 현장에서 겪었다. 동경 유학이라고는 하나 어느 학교나 대학에 적을 두었던 것은 아니고 학관 같은 데서 영어를 공부했다고 전해진다. 그도 '詩的 기질이 있는 인물'이었다고 친지들은 평한다. 태어난 아이들의 이름을 '해환, 달환, 별환'으로 지은 데서도 그의 문학적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윤동주라는 이름은 본명이고 어릴 때 불리던 이름은 해환이며, 뒤에 {가톨릭 소년}지에 동요를 발표할 때 '童舟' 또는 '童柱'라는 필명을 쓴 적이 있다.
1925년 명동 소학교에 입학하였는데, 이 학교는 당시 東滿의 정신적 지주이던 외삼촌 김약연이 설립하여 경영하던 규암서숙을 후에 신문학의 명동소학교와 명동중학교로 발전시켜 민족주의 교육을 시행하던 학교였다. 따라서 명동소학교의 가장 중요한 학과목은 조선 역사와 조선어였다. 특히 작문 시간에는 어떠한 제목의 글이든 '조선 독립'으로 결론을 맺지 못하면 점수를 받지 못할 정도였다. 그리고 명동소학교는 운영 주체가 명동교회로서 일종의 '교회학교'로 운영되었다. 그래서 아침마다 채플이 있었다. 수업 시작 전에 먼저 예배를 드림으로써 하루의 학교 생활을 시작했던 것이다. 이렇듯 명동의 교회와 학교는 유교적 가치에서 기독교적 가치 체계로의 의식 전환을 이루는 교육의 장이었다.
명동학교는 설립 이후 많은 변화를 겪었다. 학교 건물을 서양식 벽돌로 장려하게 지어 1918년에 낙성한 것이 큰 발전이라면 발전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독립운동계에 많은 인재를 공급한 것이 보다 큰 업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김약연 교장 자신부터 독립운동에 앞장 섰던 것이다.
1914년 간민회가 해산된 후 한때 침체되었던 한인사회와 독립운동의 기운은, 세계 제 1차 대전의 종전과 함께 다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특히 1919년 3월의 독립만세운동 때로부터 1920년 6월의 봉오동전투, 1920년 10월 대규모의 일본군이 만주에 출병하여 청산리전투를 거쳐 간도 대학살을 벌이기까지 근 2년간은 가히 북간도 전체가 독립군들의 세상이었다. 이 무렵에는 특히 명동학교 출신들의 활약이 컸다. 그래서 간도 대토벌에 나선 일본군에 의해 보복을 당했다. 일본군은 1920년 10월 20일에 그 보기 좋았던 명동학교 벽돌 건물에 방화하여 재로 만들어 버렸다. 청산리 전투 개시 하루 전날이다. 일본군이 간도에 들어와서 제일 먼저 토벌한 것이 명동학교였던 것이다. 그동안 소위 '불령선인단의 소굴'로서 명동학교가 얼마나 증오의 대상이었는가를 실증하는 사실이다.
그러나 명동에 진입한 일본군은 함부로 행패하지 못했다. 단지 명동학교와 馬晋(저명한 독립운동가)씨 소유의 비어 있는 집한 채만 소각하고 갔을 뿐이다. 인명 피해는 전혀 없었다. 당시 '경신대학살'이라 불리도록 처참했던 대토벌을 최초로 당하면서도 명동마을 사람들이 학살은 커녕 구타조차 당하지 않았던 것은 오로지 명동마을이 큰 규모의 교회와 기독교 학교를 갖고 있는 기독교촌이라는 점 때문이었다. 나중에 서구 열강과의 사이에 시끄러운 외교문제가 일어날 것을 토벌군들 나름대로 경계한 것이다. 이러한 경험을 접하면서 명동인들은 종교의 위대성에 대해 새삼 놀랐을 것이다.
출처 : 윤동주의 시를 읽는 모임
글쓴이 : 리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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