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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리의 수업/작가, 작품론

[스크랩] 윤동주의 시세계 연구 4

by 拏俐♡나리 2010. 11. 2.
* 지난 번에 어디에 이상이 있는 지 글이 탑재되지 않아 결국 못하고 말았습니다. 오랜만에 다시 이어서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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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는 12세되던 4학년 무렵 아동잡지 {어린이}, {아이생활} 등을 정기적으로 구독하였고, 교내 백일장에서 시가 당선되기도 하였으며, 13세 때에는 고종사촌 송몽규와 함께 {새명동}이라는 등사판 문예지를 간행, 이 무렵에 썼던 동요 동시 등을 발표했던 것으로 보아 윤동주의 문학에 대한 관심은 소학교때부터 싹텄음을 알 수 있다.
명동학교 시절의 윤동주의 성격은 어떠했을까? 4학년 때 담임 교사였던 한준명 목사는 다음과 같이 얘기하고 있다.

윤동주는 성품이 아주 순했어요. 너무 어질었지. 그래서 잘 울었고 누가 조금만 꾸짖으면 금방 눈물이 핑 돌았지요. 친구가 싫은 소리를 해도 그랬고. 하하! 본래 재주있는 아이였어요. 공부도 잘하는 축이었고요. 그래도 어쩌다 문답할 때 대답이 막히면 금방 눈물이 핑 도는 거예요.

이 회상을 통해, 윤동주가 착하고 어진 성품을 타고 났다는 것과 여성적일 정도로 아주 여린 감성을 지녔다는 점, 그리고 완전지향적인 성격의 소유자였음을 엿볼 수 있다.
명동과 명동소학교 시절은 윤동주의 일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시기였다. 그가 28년 생애에서 꼭 절반인 14년을 명동에서 살았다는 것 외에도, 그의 인격 및 시적 감수성의 골격이 형성된 곳이기 때문이다. 윤동주의 일생에서 명동시절처럼 아름답고 풍요로운 시절은 다시 없었다. 자연 환경도, 가정적인 거주환경도, 또한 시국의 상황까지도 그러했다. '요람은 일생을 좌우한다'라고 했지만 그의 경우에는 생애의 필연이 詩와 殉節의 지렛대 위에서 마무리되었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명동촌의 자연 풍경을 설명해야겠다. 이 마을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아늑한 큰 마을이다. 동북서로 완만한 호선형(弧線形) 구릉이 병풍처럼 마을 뒤로 둘러 있고, 그 서북단에는 선바위란 삼형제 바위들이 창공에 우뚝 솟아 절경을 이루며 서북풍을 막아 주고 있다. 그 바위들 뒤에는 우리 조상들의 싸움터로 여겨지는 산성이 있고 화살같은 유물들이 가끔 발견되곤 하였다. 이 삼형제 바위는 명동 사람들의 공원이기도 하였다. 동쪽에서 뻗어오던 장백산맥이 오랑케령인 오봉산과 살바위란 날카로운 산들을 원점으로하여 서남쪽으로 지맥이 이루어지면서 마을 정면에는 고산 준령이 첩첩이 뻗어 선바위를 스쳐 간다.
봄이 오면 마을 야산에는 진달래 개살구꽃 산앵두꽃 함박꽃 나리꽃 할미꽃 방울꽃들이 시새어 피고, 앞 강가우거진 버들숲 방천에는 버들강아지가 만발하여 마을은 꽃과 향기 속에 파묻힌 무릉도원이었다. 여름은 싱싱한 전원의 푸르름에 묻혀 있고, 가을은 원근 산야의 단풍과 무르익은 황금색 전답으로 황홀하였다.
겨울의 경치는 더욱 인상적이었다. 산야 나목의 앙상한 가지들이 삭풍에 울부짖고 은색 찬란한 설야엔 옥색 얼음판이 구비구비 뻗으며 선바위골로 빠지는 풍경은 실로 절경이었다. 폭설이 내리는 날엔 노루 떼 멧돼지 떼들이 먹이를 찾아 마을로 내려오고, 그런 날이면 온 마을은 흥분의 도가니 속에서 들뜨곤 했다. 박달나무 팽이 돌리기 썰매타기 스케이트 지치기 매를 갖고 꿩사냥하는 것을 구경하러 따라다니기 등 명동촌의 겨울은 지울 수 없는 추억들이었을 것이다.(중략)
동주의 집은 학교촌에 소속되어 있으며 잘 사는 편이었다. 그 당시 벼농사를 하는 집이란 그 큰 마을에 몇 가호밖에 되지 않았는데, 그 몇 집들 중에 동주의 집도 끼어 있었다.
그의 집은 학교촌 입구 첫집이었다. 가랑나무가 우거진 야산 기슭에 교회당이 있고 그 교회당 옆으로 두 채의 집이 있는 앞집이다. 그의 집은 정남향 큰 기와집으로 후면과 좌우에는 그리 크지 아니한 과수원이 있고, 뒷문으로 나가면 그의 詩 '자화상'에 영향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물맛으로 유명한 수십 길도 더 되는 깊은 우물이 있다. 우리는 동주와 같이 과수원 울타리로 되어 있는 뽕나무 오디를 따먹고, 물을 길어 입을 닦기도 했으며, 그 우물 속을 들여다보고 소리치며 우물 속에 울리는 소리를 듣곤 했다.

윤동주에게 있어 명동촌은 그야말로 에덴동산과 같은 곳이었다. 하나님께서 천지 창조 후 감탄의 소리로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세기 1 : 31)라는 말씀이 떠오를 정도다. 윤동주가 명동 시절을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했는가는 '장차 어디에서 살고 싶으냐'는 물음에 서슴치 않고 '내가 나서 자란 곳 명동'이라고 대답하더라는 윤영춘의 회고에서도 충분히 입증된다.
이상 윤동주가 태어나서 소학교 시절까지 정리해 보면, 비록 격변기에, 그것도 조국이 아닌 이국의 땅에서 태어났지만 거의 어려움이라는 것은 모르고 독실한 기독교 신앙과 투철한 민족교육의 온상 속에서 해맑고 올곧게 자랐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비교적 어린 나이에 문학에 상당한 관심이 있었음도 엿볼 수 있었다. 어린 예수가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셨던 것처럼'(누가복음 2 : 52). 이러한 명동촌에서의 동화적 분위기와 서정적 체험은 그의 의식 깊은 곳에 자리잡아 그의 작품세계에 하나의 원형으로 작용했으리라 생각된다.
그러나 빛으로 찬란하던 에덴동산도 뱀으로 상징되는 사단의 세력에 의해 풍비박산이 되었듯이 윤동주의 고향 명동촌도 여러가지 요인으로 그 찬란하던 성가는 차츰 빛을 잃어갔다.
첫번째 요인은 간도에 와 있던 캐나다 선교부에서 1920년에 교통의 요지인 용정에다 은진중학교, 명신여학교 등 미션스쿨을 세움으로써 전부터 있던 영신학교, 동흥학교, 대성학교 등과 함께 이젠 용정이 북간도 교육의 중심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두번째는 1920년 일본군의 대토벌 이래 북간도 전역에서 독립운동의 기세가 크게 꺽였다는 점이다. 당시 많은 독립군들과 독립운동가들이 노령이나 중국 본토로 망명하여 북간도를 비웠던 것이다.
셋째는 공산주의의 득세로 밤마다 살인 테러가 굉장했다. 이 공산 사회주의자들은 그들의 이념을 행동으로 실천하기 위해 중류 계층 이상을 상대로 납치, 약탈 등 온갖 만행을 자행하였다. '교회학교'로 운영되던 명동학교도 사회주의자들이 학교를 교회로부터 분리시켜 내어 1929년에는 급기야 '인민학교'로 만들고 말았다.
사태가 자꾸 이렇게 흘러가자 명동의 재산 많은 사람들이나 민족주의자들이 하나 둘 명동을 떠서 치안이 유지되는 도회지로 나갔다. 윤동주네는 1931년 늦가을 용정으로 이사했다.
이런 격변의 세월, 검은 연기 뿜어내며 타오르는 화염 속에 선 것과 같은 상황 속에서, 소년 윤동주는 무엇을 어떻게 느꼈을까. 그리고 그것이 그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그의 평생에 걸친 삶의 모습에서 연역해낸 결론이지만 그는 명동에서 벌어진 이런 상황 전개를 보면서 그만 마르크시즘 자체에 완전히 질려버렸던 것 같다.
이렇게 변질된 모습의 명동은 더 이상 윤동주의 고향이 아니었다. 어떤 의미에서 그는 평화와 안식과 풍요의 대명사인 고향을 상실해 버린 것이다.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한 태초의 인류처럼. 이후 그는 추억 속에서만 아름답게 존재하는 고향을 계속 그리워하게 된다. 소위 고향의식, 더 나아가 본향의식이 그의 내면에 깊게 자리잡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그에게 있어 마냥 행복하기만 했던 유년기의 체험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명동촌, 그것이 파괴되는 현장을 직접 보아야만 했던 아픔과 더 이상 살 수 없어 고향을 등질 수 밖에 없었던 슬픔 등은 역시 그의 가슴에 깊은 상흔으로 남아 그의 성격 형성과 시세계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판단된다. (다음(5)에서 계속됩니다)

출처 : 윤동주의 시를 읽는 모임
글쓴이 : 리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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