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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펌/좋은 시 모음

수국 / 정창영

by 拏俐♡나리 2011. 6. 22.

[2003년 불교신문 신춘문예 당선시조]

 

수국 / 정창영

 

 

추녀 끝 풀어 헤쳐 달아맨 풍경들이

산책을 하다 말고

앞서거니 뒷서거니

달리며 새벽참부터 절터를 흔들어댄다

 

일 바쁜 주지스님이 잠시 출타한 사이

늙은 절은 힘에 겨워

한참을 버티다가

마침 들어온 동자승에게 대웅전을 내준다

 

잠 취한 동자승은 성큼, 절 문턱 내려서고

절 혼자 가을이라

발갛게 취해서

활활 타오르다가 보살님 눈치만 본다

좌르르 쏟아지는 쌀 이는 소리에

잠 깨신 부처님

빙긋이 웃으시며

빈 소매 걷고 내려와 문턱에 턱, 걸터 앉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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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불교적 사유 시 속에 녹아 / 시조 정형 탈피 파격 돋보여

 

 

응모한 작품들에는 응모한 사람들의 정성이 행간에 숨쉬고 있었다. 시를 사랑하고 불심에 가득찬 응모자들의 마음을 행간에서 읽을 수 있었던 것은 행복이었다. 우열을 가늠하기 힘든 작품들을 두고 고민에 빠졌던 것은 그러므로 당연한 일이었다. 시조에서 정현숙의 '11월, 장곡사에 비가 내리네' 외 4편과 정창영의 '수국' 외 6편, 시에서 박형수의 '佛影寺에서' 외 4편, 박성필의 '남장사' 외 5편, 이주렴의 '강' 외 6편을 마지막까지 읽고 또 읽었다.

 

정현숙의 시조는 시조시의 정통성을 이은 모범답안적 작품이라 할만했다. 언어의 조탁과 시조가 가진 자수율에 의한 운율의 획득 등에서 나무랄 데가 없는 작품이었다. 그러나 모범답안이 항용 그렇듯이 파격적인 창의성과 무한한 상상력에로 향한 아쉬움과 갈증이 느껴지는 작품들이었다.

 

장창영의 응모한 시조들은 수준이 모두 고른 편이었고, 무엇보다 시조의 정통적 틀을 벗어나려는 파격과 개성이 돋보였다. 현대시조시가 추구하는 바람직한 행로를 그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것은 행운이다. 예사롭지 않은 행갈이 방법과 언어의 조탁에서 현대시조가 고시조와 왜 다른가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정창영의 시조를 가작으로 선정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박형수의 시들은 단아했다. 그 단아함은 언어의 절제를 통한 조사법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응모한 시편들의 수준이 고르지 않은 것은 흠이었다. 박성필의 시는 화려한 시적 수사와 자유분방한 시적 상상력이 돋보였다. 그러나 그의 시에서는 가성시인 누군가의 시에서 읽었던 분위기가 자꾸만 느껴졌다.

 

이주렴의 시는 도도한 흐름으로 이어지는 강한 개성을 가진 작품들이었다. 그러나 언어의 절제도 생각하는 것이 이 시인에게는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강'은 불교적인 용어를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불교적 사유를 시 속에 용해시킨 작품이다. 윤회와 인연 그리고 부처님을 기다리는 마음을 이만큼 승화시켜 놓은 것은 이주렴의 시적 역량이 일정한 수준이 도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의 작품을 당선작으로 선정하면서 이 시인이 더욱 분발하기를 기대한다.

 

- 심사위원 : 김선학 문학평론가(동국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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