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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펌/좋은 시 모음

판전(版殿) 앞에서 / 손태원

by 拏俐♡나리 2011. 6. 24.

[2003년 농민신문 신춘문예 당선시조]

 

판전(版殿)1 앞에서 / 손태원

 

 

어슬렁 뒷짐 지고 숲속 길로 접어든다

가다가 걸음 멈추고 가쁜 숨결 고르는 듯

병중작 칠십일과(病中作七十一果)2여! 맥박소리 들린다.

 

흙마당 쓸다 남은 비질 자국 보이는 듯

새하얀 아가손이 쓰다 멈춘 낙서인 듯

다가온 계곡 물소리 문득 끊긴 저 정적.

 

꽃도 잎도 다 시들어 빈 대궁만 남은 가을

얼마나 깊었던가 잠겨버린 하늘 위로

동동 뜬 낙관이 하나 늦잠자리 앉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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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심에 오른 작품은 김차순의 '바늘쌈을 보며', 장기숙의 '꿈꾸는 침목', 손태원의  '판전(版殿) 앞에서', 황성진의 '칠판을 지우며' 등 네 작품이었다.

 

이 가운데 '바늘쌈 보며'는 깨끗한 시상에 호감이 갔으나 시조의 형식에 많이 어긋나 있어 1차로 당선권에서 멀어졌고, 나머지 세작품이 끝까지 당선을 놓고 겨루게 되었다. '꿈꾸는 침목'과 '칠판을 지우며'는 당선작으로 뽑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시를 다루는 솜씨가 능숙했다. 그러나 응모된 작품이 전체적으로 고르지 않은 것이 흠이었다.

 

이에 반해 '판전 앞에서'의 경우 손태원씨가 함께 응모한 '운문사 하루', '토종에 대하여' 역시 그 어느 작품을 당선작으로 삼아도 손색이 없을 만큼 완성도면에서 뛰어났다. 이 가운데에서도 추사 김정희 선생이 71세인 임종 3일 전에 썼다는 서울 봉은사 현판 글씨를 소재로 한 당선작인 '판전 앞에서'의 명징한 이미지와 높은 서정성을 우리는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새로운 시인 타생에 축하를 보내는 한편, 비록 당선은 되지 못했지만 장기숙씨와 황성진씨에게도 그 가능성에 격려를 보낸다.

 

- 심사위원 : 박시교, 유재영

  1. 추사 김정희 선생이 칠십일세 와병중 임종 3일 전에 썼다고 전해오는 봉은사에 있는 마지막 현판 글씨 [본문으로]
  2. 판전의 낙관 글씨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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