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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펌/좋은 시 모음

촉지도(觸地圖)를 읽다 / 유종인

by 拏俐♡나리 2011. 6. 28.

[200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시조]

 

촉지도(觸地圖)를 읽다 / 유종인

 

 

휠체어 리프트가 선반처럼 올라간 뒤

역 계단 손잡이를 가만히 잡아본다

사마귀 그점자들이 철판 위에 돋아있다

 

사라진 시신경을 손 끝에 모은 사람들,

입동(立冬) 근처 허공 중엔 첫눈마저 들끓어서

사라진 하늘의 깊이를 맨얼굴로 읽고 있다

 

귀청이 찢어지듯 하행선 열차소리,

가슴 저 밑바닥에 깔려있는 기억의 레일

누군가 밟고 오려고 귓볼이 자꾸 붉어진다

 

나무는 죽을 때까지 땅 속을 더듬어가고

쉼없이 꺾이는 길을 허방처럼 담은 세상,

죄 앞에 눈 못 뜬 날을 철필(鐵筆)로나 적어 볼까

 

내안에 읽지 못한 요철(凹凸)덩어리 하나 있어

눈귀가 밝던 나도 소스라치게 놀라는 몸,

어머니 무덤마저도 통점(痛點)의 지도(地圖)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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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신춘문예작품들이 가져야 할 미덕은 무엇일까? 아니 우리는 신년호 혹은 그 근일 사이로 만나게 되는 작품들이 어떤 특징을 보여주길 바라고 있을까? 독자에 따라 그 주문은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선자는 이런 기회가 있을 때마다 몇 가지 체크리스트를 가지고 작품을 대하곤 한다. 그 첫째는 젊은 시조이길 바란다. 두번째로는 개성적인 시조이길 바란다. 세번째로는 무난한 완제품보다는 흠이 보여도 가능성이 많은 작품을 훨씬 더 바란다.

 

많은 응모작 가운데 이런 관점에서 눈에 띈 작품들은 장기숙, 한경정, 김종길, 유종인 시인의 것이었다. 장기숙은 최근 우리시대의 화두가 되고 있는 통일과 관련된 작품들을, 또는 젖은 농촌의 풍경을 균형 잡힌 어조로 노래했다. 한경정은 사소한 사물에도 새로운 발견을 하려는 성실한 노력을 보여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의 두 시인의 작품을 먼저 선외로 가려내었다. 장기숙의 경우 지나치게 안정되어 있고 작품의 폭이 좁다는 생각에서, 한경정의 경우 시어들이 다소 부정확하고 공소한 시구들이 많이 눈에 띈다는 이유였다. 이러한 지적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평가에서의 견해라고 얘기할 수 있다. 그 만큼 위 시인들의 장점 또한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김종길의 7편 응모작 중 '촉지도를 읽다'를 앞에 놓고 고심하였다. 김종길의 경우 다양한 소재를 다룬 모든 응모작품의 수준이 고를 뿐 아니라 특히 위의 작품은 대상을 철저히 묘사하면서 궁핍한 삶의 풍경을 적당한 거리에서 환기시켜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종길의 시조들이 강인한 개성을 독자들에게 각인 시키기엔 무언가가 아쉽다는 느낌이 들었다. 결국 유종인의 '촉지도를 읽다'를 당선작으로 뽑았다. 그의 시조들은 호방하고 섬세하며 피상적으로 끝났다면 흔히 신춘문예작품에서 등장하는 소재주의의 혐의를 벗어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다섯째 수가 일구어낸 반성적 사유는 이 시조의 시적 성취에 크게 기여하였다. 대성하리라 믿는다.

 

- 심시위원 : 이우걸 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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