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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펌/좋은 시 모음

[스크랩] 정호승 시모음

by 拏俐♡나리 2017. 2. 10.

정호승시인 시모음

 

 


 

 

사  랑

그대는 내 슬픈 운명의 기쁨
내가 기도할 수 없을 때 기도하는 기도
내 영혼이 가난할 때 부르는 노래
모든 시인들이 죽은 뒤에 다시 쓰는 시
모든 애인들이 끝끝내 지키는 깨끗한 눈물

오늘도 나는 그대를 사랑하는 날보다
원망하는 날들이 더 많았나니
창 밖에 가난한 등불 하나 내어 걸고
기다림 때문에 그대를 사랑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그대를 기다리나니

그대는 결국 침묵을 깨뜨리는 침묵
아무리 걸어가도 끝없는 새벽길
새벽 달빛 위에 앉아 있던 겨울산
작은 나뭇가지 위에 잠들던 바다
우리가 사랑이라고 부르던 사막의 마지막 별빛
언젠가 내 가슴 속 봄날에 피었던 흰 냉이꽃

 

 

 

 


 

 


 

 

물위에 쓴 시

내 천개의 손 중 단 하나의 손만이 그대의 눈물을
닦아 주다가
내 천개의 눈 중 단 하나의 눈만이 그대를 위해 눈물을
흘리다가
물이 다하고 산이 다하여 길이 없는 밤은 너무 깊어
달빛이 시퍼렇게 칼을 갈아 가지고 달려와 날카롭게
내 심장을 찔러
이제는 내 천개의 손이 그대의 눈물을 닦아줍니다
내 천개의 눈이 그대를 위해 눈물을 흘립니다

 

 

 

 


 

 

 

봄 길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강물은 흐르다가 멈추고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꽃잎은 흩어져도
보라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사랑이 되어
한없이 봄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슬픔으로 가는 길

내 진실로 슬픔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슬픔으로 가는 저녁 들길에 섰다.
낯선 새 한 마리 길 끝으로 사라지고
길가에 핀 풀꽃들이 바람에 흔들리는데
내 진실로 슬픔을 어루만지는 사람으로
지는 저녁해를 바라보며
슬픔으로 걸어가는 들길을 걸었다.
기다려도 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는 사람 하나
슬픔을 앞세우고 내 앞을 지나가고
어디선가 갈나무 지는 잎새 하나
슬픔을 버리고 나를 따른다.
내 진실로 슬픔으로 가는 길을 걷는 사람으로
끝없이 걸어가다 뒤돌아보면
인생을 내려놓고 사람들이 저녁놀에 파묻히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 하나 만나기 위해
나는 다시 슬픔으로 가는 저녁 들길에 섰다.

 

 

 


 


 

 

 

연 어

바다를 떠나 너이 손을 잡는다
사람의 손에서 이렇게
따뜻함을 느껴본 것이 그 얼마 만인가
거친 폭포를 뛰어넘어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고통이 없었다면
나는 단지 한 마리 물고기에 불과 했을 것이다
누구나 가난한 사람을 사랑하기는 쉽지 않다
그동안 바다는 너의 기다림 때문에 항상 깊었다
이제 나는 너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가 산란을 하고
죽음이 기다리는 강으로 간다
울지마라
인생을 눈물로 가득 채우지 마라
사랑하기 때문에 죽음은 아름답다
오늘 내가 꾼 꿈은 네가 꾼 꿈의 그림자일 뿐
너를 사랑하고 죽으러 가는 한낮
숨은 별들이 고개를 내밀고 총총히 우리를 내려다 본다
이제 곧 마른 강바닥에 나의 은빛 시체가 떠오르리라
배고픈 별빛들이 오랜만에 나를 포식하고
웃음을 떠뜨리며 밤을 밝히리라

 

 

 

 

 

 

 

 

 

까  닭

내가 아직 한 포기 풀잎으로 태어나서
풀잎으로 사는 것은
아침마다 이슬을 맞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바짓가랑이를 적시며 나를 짓밟고 가는
너의 발자국을 견디기 위해서다

내가 아직 한 송이 눈송이로 태어나서
밤새껏 함박눈으로 내리는 것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 싸리빗자루로 눈길을 쓰시는
어머니를 위해서가 아니라
눈물도 없이 나를 짓밟고 가는
너의 발자국을 고이 남기기 위해서다

내가 아직도 쓸쓸히 노래 한 소절로 태어나서
밤마다 아리랑을 부르며 별을 바라보는 것은
너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너를 사랑하기엔
내 인생이 너무나 짧기 때문이다

 

 

 

 

 

 

 

 

 

 

 

 

 

끝끝내

헤어지는 날까지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하지 못했습니다

헤어지는 날까지
차마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하지 못했습니다

그대 처음과 같이 아름다울 줄을
그대 처음과 같이 영원할 줄을
헤어지는 날까지 알지 못하고

순결하게 무덤가에 무더기로 핀
흰 싸리꽃만 꺾어 바쳤습니다

사랑도 지나치면 사랑이 아닌 것을
눈물도 지나치면 눈물이 아닌 것을
헤어지는 날까지 알지 못하고

끝끝내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하지 못했습니다
끝끝내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그는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을 때

조용히 나의 창문을 두드리다 돌아간 사람이었다

그는 아무도 나를 위해 기도하지 않을 때

묵묵히 무릎을 꿇고

나를 위해 울며 기도하던 사람이었다

내가 내 더러운 운명의 길가에 서성대다가

드디어 죽음의 순간을 맞이했을 때

그는 가만히 내 곁에 누워 나의 죽음이 된 사람이었다

아무도 나의 주검을 씻어주지 않고

뿔뿔이 흩어져 촛불을 끄고 돌아가버렸을 때

그는 고요히 바다가 되어 나를 씻어준 사람이었다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자를 사랑하는

기다리기 전에 이미 나를 사랑하고

사랑하기 전에 이미 나를 기다린

 

 

 

 

 

 

 

 

 

 

 

洗足式을 위하여

사랑을 위하여
사랑을 가르치지 마라
세족식을 위하여 우리가
세상의 더러운 물 속에 계속 발을 담글지라도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있다고
가르치지 마라

지상의 모든 먼지와 때와
고통의 모든 눈물과 흔적을 위하여
오늘 내 이웃의 발을 씻기고 또 씻길지라도
사랑을 위하여
사랑의 형식을 가르치지 마라

사랑은 이미 가르침이 아니다
가르치는 것은 이미 사랑이 아니다
밤마다 발을 씻지 않고는 잠들지 못하는
우리의 사랑은 언제나 거것 앞에 서 있다

가르치지 마라 부활절을 위하여
가르치지 마라 세족식을 위하여
사랑을 가르치는 시대는 슬프고
사랑을 가르칠 수 있다고 믿는
믿음의 시대는 슬프다

 

 

 

 

 

 

 


강변역에서

너를 기다리다가
오늘 하루도 마지막 날처럼 지나갔다
너를 기다리다가
사랑도 인생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바람은 불고 강물은 흐르고
어느새 강변의 불빛마저 꺼져버린 뒤
너를 기다리다가
열차는 또다시 내 가슴 위로 소리없이 지나갔다
우리가 만남이라고 불렀던
첫눈 내리는 강변역에서
내가 아직도 너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나의 운명보다 언제나
너의 운명을 더 슬퍼하기 때문이다
그 언젠가 겨울산에서
저녁별들이 흘리는 눈물을 보며
우리가 사랑이라고 불렀던
바람 부는 강변역에서
나는 오늘도
우리가 물결처럼
다시 만나야 할 날들을 생각했다

 

 

 

 

 

 


 

 

 

 

 

갈대

내가 아직도 강변에 사는 것은
죽은 새들이 내 발밑에서 물결치기 때문이다

내가 아직도 아무도 살지 않는 강변에 사는 것은
실패도 인생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강한 자가 이긴 것이 아니라
이긴 자가 강한 것이라는

죽은 새들의 정다운 울음소리를 들으며
온종일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나의 삶이 진정 괴로운 것은
분노를 삭일 수 없다는 일이었나니

내가 아직도 바람부는 강변에 사는 것은
죽은 새들이 날아간 하늘에 햇살이 빛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랑

내가 너를 사랑했을 때
너는 이미 숨져 있었고
네가 나를 사랑했을 때
나는 이미 숨져 있었다

너의 일생이 단 한번
푸른 하늘을 바라보는 일이라면
나는 언제나
네 푸른 목숨의 하늘이 되고 싶었고
너의 삶이 촛불이라면
나는 너의 붉은 초가 되고 싶었다

너와 나의 짧은 사랑
짧은 노래 사이로
마침내 죽음이
삶의 모습으로 죽을 때
나는 이미 너의 죽음이 되어 있었고
너는 이미 나의 죽음이 되어 있었다

 

 

 

 

 


 

 

 


가난한 사람에게

내 오늘도 그대를 위해
창 밖에 등불 하나 내어 걸었습니다
내 오늘도 그대를 기다리다 못해
마음 하나 창 밖에 걸어두었습니다
밤이 오고 바람이 불고
드디어 눈이 내릴 때까지
내 그대를 기다리다 못해
가난한 마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눈 내린 들길을 홀로 걷다가
문득 별을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수선화에게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갈
갈대숲에서 가슴검은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퍼진다

 

 

 

 

 

 

 

 

 

 

 

 

마음의 사막

별똥 하나가 성호를 긋고 지나간다
낙타 한 마리가 무릎을 꿇고 기도한 지는 이미 오래다
별똥은 무슨 죄가 그리 많아서 저리도 황급히 사라지고
낙타는 무슨 죄가 그리 많아서 평생을 무릎조차 펴지 못하는가
다시 별똥 하나가 성호를 긋고 지구 밖으로 떨어진다
위경련을 일으키며 멀리 녹두꽃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머리맡에 비수 한 자루 두고 잠이 드는 사막의 밤
초승달이 고개를 숙이고 시퍼렇게 칼을 갈고 앉아 있다
인생은 때때로 기도 속에 있지 않다
너의 영혼을 어루만지기 위해서는 침묵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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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사람]정호승 11번째 시집 '여행'의 종착역 '마음의 설산'

정호 시인


                                                  1950년  경상남도 하동에서 출생 대구에서 성장
                                                 대구 계성중학교와 대륜고등학교 졸업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와 경희대학교 대학원을 졸업
                                                197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동시 〈석굴암을 오르는 영희〉로 당선,
                                                1973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시 〈첨성대〉로 당선
                                                1976년  김명인, 김창완, 이동순 등과 함께 반시(反詩) 동인을 결성
                                                1979년  첫시집 《슬픔이 기쁨에게》를 출간하였다.
                                               198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위령제>로 당선.
                                                              시집 《서울의 예수》
                                          1987년 《새벽편지》
                                                                 《샘터》 편집부근무
                                                                《월간조선》 근무
                                           1989년  제3회 소월시문학상,
                                           1990년  시집 《별들은 따뜻하다》
                                           1991년  시선집 《흔들리지 않는 갈대》
                                           1993년  장편소설 《서울에는 바다가 없다》
                                           1996년  동화집 《에밀레종의 슬픔》 《바다로 날아간 까치》
                                                              수필집 《첫눈 오는 날 만나자》
                                            1997년  제10회 동서문학상을 수상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1998년 《외로우니까 사람이다》《연인》
                                            1999년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항아리》
                                            2000년  제12회 정지용문학상을 수상
                                                                  현대문학북스 대표
                                              시선집 《흔들리지 않는 갈대》《내가 사랑하는 사람》
                                                                 《모닥불》
                                              2004년 《이 짧은 시간 동안》



출처 : 시나브로
글쓴이 : Simon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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