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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리의 수업/작가, 작품론

[스크랩] 윤동주의 시세계 연구 5

by 拏俐♡나리 2010. 11. 2.
(2) 은진중학교 시절 : [초 한 대]

북간도의 1930년대. 그것은 초반부터 거칠게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사상 문제 뿐만 아니라 경제 정치적으로도 거친 회오리 속에 휩쓸렸다.
1929년 12월에 미국 뉴욕 주식거래소에서 주가가 폭락하면서 시작된 세계 대공항의 여파가 북간도에도 곧장 밀려왔다. 1930년 가을에 곡식 가격이 폭락한 것이다. 북간도의 경제와 사회상은 암담해지고 공산당은 더욱 크게 득세했다. 이런 정치, 군사적이 대변혁이 잇달았다. 1931년의 만주사변, 그리고 1932년의 만주국 수립. 만주사변을 일으켜 본격적으로 만주 침략에 나선 일본이 동삼성과 열하 및 내몽고 동부를 판도로 하는 '만주국'이란 이름의 괴뢰국을 세우고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였던 부의를 그 왕으로 앉힌 것이다. 북간도는 이리하여 '만주국'의 영토에 속하게 되었다. 민족 의식이 있는 한인들로서는 그 곳이 '중화민국'의 영토일 때 보다 더욱 더 힘든 시절이었다.
윤동주네는 1931년 늦가을에 용정으로 이사를 했다. 용정으로의 이사는 가족 전체에게 어둠으로 다가 왔다. 조부 윤하현의 경우 평생 농부로 살아왔는데 도회지로 이사와 농토를 잃게 되었으니 불행이라면 불행이고, 아버지 윤영석은 새롭게 시작한 인쇄소며 포목점이 계속 실패를 거듭하자 그 충격으로 신앙마저 잃었다. 명동에 살 때와는 주거환경도 크게 옹색해져 20평 정도의 초가집에서 고종 사촌인 송몽규까지 합쳐 8명의 식구가 생활해야 했다. 이런 불우한 가정환경에도 윤동주는 적어도 겉으로는 큰 영향은 받은 것 같지 않다. 명동촌에서 학습된 바른 신앙과 좋은 성격 때문이었으리라.
윤동주는 15세에 대랍자(大拉子)의 중국인 관립학교 6학년에 편입, 수학하였고, 다음해인 1932년에는 캐나다 선교부가 경영하는 미션계 학교인 은진중학교에 입학하였다. 명동촌에 비하면 불우하기 짝이 없는 형편 속에서도 기죽지 않고 꿋꿋하게 자라난 것은 그가 다닌 은진중학교는 치외법권 지역이나 마찬가지여서 일본 순경이나 중국 관헌들이 허락없이 들어갈 수 없는 곳이었다. 그래서 마음껏 태극기를 휘두르며 애국가를 목청껏 부를 수가 있었던 것이다. 또한 명희조 선생의 영향도 컸으리라 짐작된다. 명희조 선생은 동경제대에서 동양사를 전공한 사람으로 동경 유학 시절에는 일본 사람에게 돈을 주지 않기 위해 전차를 타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한번은 용정에서 평양까지 기차 대신 자전거로 왕복을 했단다. 그 정도로 민족의식이 강한 사람으로 그의 동양사와 국사 강의는 학생들에게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아마도 윤동주는 명희조 선생을 통해 우리 민족이 처한 현실과 나아갈 방향 등에 대해서 많은 가르침을 받았을 것이다.
윤동주는 은진중학 재학 시절에도 급우들과 함께 교내 문예지를 발간하여 문예작품을 발표한 것으로 보아 문학 수업을 계속했음을 엿볼 수 있다. 특히 1, 2학년 때에는 윤석중의 동요와 동시에 깊이 빠져 있었다고 한다. 문익환 목사에 의하면 윤동주의 동시들 가운데 날짜가 기입되지 않은 작품은 1934년 12월 24일이전의 것이라고 말한다. 창작일자가 기입되지 않은 동시는 [못자는 밤], [해바라기 얼굴], [귀뚜라미와 나와], [애기의 새벽], [햇빛 바람], [반딧불], [둘 다], [거짓부리], [편지], [기왓장 내외], [겨울], [만돌이] 등 모두 12편이다.

햇빛 바람

손가락에 침발러
쏘옥, 쏙, 쏙,
장에 가는 엄마 내다보려
문풍지를
쏘옥, 쏙, 쏙,

아침 햇빛이 반짝,

손가락에 침발러
쏘옥, 쏙, 쏙,
장에 가신 엄마 돌아오나
문풍지를 쏘옥, 쏙, 쏙,

저녁에 바람이 솔솔.


반디불

가자 가자 가자
숲으로 가자
달조각을 주으러
숲으로 가자

그믐밤 반디불은
부서진 달조각

가자 가자 가자
숲으로 가자
달조각을 주으러
숲으로 가자

대부분이 전형적인 동시로 갈등이 없는 동심의 세계를 그리고 있다. [햇빛 바람]은 아주 수준작이고, [반디불]에서는 반디불을 달조각으로 인식하는 상상력이 돋보인다. 밤과 관련된 동시가 3편이나 되는 것으로 보아, 윤동주가 일찍부터 밤과 친숙했음을 엿볼 수 있다. [못자는 밤]과 [기왓장 내외]는 보기에 따라서 어두움의 그림자가 살짝 스친다고 말할 수 있다. [만돌이]는 아주 흥미있는 내용의 동시이다.

만돌이

만돌이가 학교에서 돌아오다가
전봇대 있는 데서
돌짜기 다섯 개를 주웠읍니다.

전봇대를 겨누고
돌 첫개를 뿌렸읍니다.
-딱-
두개를 뿌렸읍니다.
-아뿔싸-
세개째 뿌렸읍니다.
-딱-
네개째 뿌렸읍니다.
-아뿔싸-
다섯개째 뿌렸읍니다.
-딱-

다섯 개에 세 개
그만하면 되었다.
내일 시험.
다섯 문제에 세 문제만 하면-

손꼽아 구구를 하여 봐도
허양 육심 점이다.
볼 거 있나 공차러 가자.

그 이튿날 만돌이는
꼼짝 못하고 선생님한테
흰 종이를 바쳤을까요.
그렇잖으면 정말
육심 점을 맞았을까요.

내일이 시험인데도 공부보다는 공차기가 좋아 구실을 찾는 요행심리가 아주 재미있게 그려져 있다. 윤동주의 동시 수준이 어느 정도인가를 여실하게 보여 주는 작품이라 하겠다.

은진중학교 때 그의 취미는 다방면이었다. 축구 선수로 뛰기도 하고 밤에는 늦게까지 교내 잡지를 내느라고 등사 글씨를 쓰기도 하였다. 기성복을 맵시있게 고쳐서 허리를 잘룩하게 한다든지 나팔바지를 만든다든지 하는 일을 어머니 손을 빌지 않고 혼자서 재봉틀로 하기도 하였다. 2학년 때이던가, 교내 웅변대회에서 '땀 한 방울'이란 제목으로 1등한 일이 있어서 상으로 탄 예수 사진의 액자가 우리집에 늘 걸려 있었다. 절구통 위에 귤 궤짝을 올려 놓고 웅변 연습을 하던 모습이 눈 앞에 선하다. 그러나 그는 웅변조의 사람은 아니었고 대회의 평도 침착한 어조와 내용 덕분이란 것이었다. 그 후 그는 다시 웅변에 관심을 둔 바는 없다. 그는 수학도 잘하였다. 특히 기하학을 좋아하였다.

중학시절의 그는 아주 다재다능했을 뿐만 아니라 미적 감각도 지닌 멋쟁이였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그는 바느질, 문학으로 대표되는 靜的인 일 뿐만 아니라 축구 웅변, 태극기를 휘두르며 애국가를 부르는 등 動的인 일에도 아주 열심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많은 연구자들이 '윤동주의 성격 = 내성적, 소극적'이라는 논리는 적어도 은진중학 시절에는 적용되지 않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웅변대회 상품으로 받은 예수의 사진이 들어 있는 액자를 아주 소중하게 간직했다는 사실로 미루어 그의 돈독한 신앙심을 엿볼 수 있기도 하다.
1934년(18세)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에는 [삶과 죽음], [초 한 대], [내일은 없다] 등의 세 작품을 쓰고 이날부터 시작 날짜를 명기하고 있다. 이것은 이제부터 본격적이 시를 쓰겠다는 각오의 표현이지만, 이면에는 신춘문예에 응모하여 당선된 송몽규에게서 받은 자극도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문익환의 증언에 의하면, 윤동주가 송몽규를 두고 '대기는 만성이다'라고 벼르더라는 것이다.


삶과 죽음

삶은 오늘도 죽음의 서곡을 노래하였다.
이 노래가 언제나 끝나랴

세상 사람은-
뼈를 녹여내는 듯한 삶의 노래에
춤을 춘다
사람들은 해가 넘어가기전
이 노래 끝의 공포를
생각할 사이가 없었다.

하늘 복판에 알새기 듯이
이 노래를 부른 자가 누구뇨

그리고 소낙비 그친 뒤 같이도
이 노래를 그친 자가 누구뇨

죽고 뼈만 남은
죽음의 승리자 위인들!
<1934. 12. 24>

이 작품은 윤동주 詩에 있어서의 序詩(머리말)와 같은 작품이다. 윤동주는 어떻게 사느냐 못지않게 어떻게 죽느냐 하는 문제에 더 천착한 시인이다. 산다는 것은 따지고 보면 죽음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는 것이다. 죽음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떠올리는 문제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신앙인에게 있어 특별하게 다가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어쩌면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종교를 갖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사는 날까지'나 '죽는 날까지'나 같은 의미이다. 그럼에도 윤동주는 그의 [序詩]에서도 굳이 '죽는 날까지'라고 노래한 것은 그만큼 삶에 대한 진지성을 강조하고자 함일 것이다.
1연을 보면 시인은 종말론적 신앙 때문인지, 聖俗을 양분하는 이분법적 사고(영혼은 깨끗하고 육체는 더럽고, 천국은 선하고 세상은 악하다는) 때문인지 삶을 죽음의 서곡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이 노래가 언제나 끝나랴'에서 보듯 이 세상에서의 삶을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있다. 삶은 오늘도 죽음을 향해 달려간다. 사람들은 '뼈를 녹여내는 듯한 삶의 노래'(삶을 고통스러우리만치 진지하게 산 사람, 곧 죽음의 고통을 맛보며 산 사람, 그 절정은 그리스도다)에 감동하여 존경과 기쁨의 표시로 춤을 춘다. 그러나 사람들은 당장 먹고사는 현실 문제에 집착하다보니 자기가 죽기 전까지는 미처 죽음의 공포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다. 하늘 복판에 알(태양이나 별) 새기는 것처럼 어려운, 다시 말해 하늘이 감동할 정도로 삶의 노래를 부른 자가 누구냐, 그리고 소낙비 그친 뒤처럼 깨끗하게, 순결하게 인생의 노래를 마감한 자가 누구냐. 죽었지만 뼈(이름)를 남긴 사람들, 즉 죽음을 이긴 그리스도와 信仰의 巨星들이 아니겠느냐.
이렇게 볼 때, 이 시는 세상 사람들과 죽음의 승리자인 위인들의 삶을 대조시켜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가를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작품이라 하겠다. 다시 말해 평범한 인생을 거부하고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처럼 살아보겠다는 시인의 강한 의지가 담긴 시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주제를 담아내는 그릇(시어 사용, 시상 전개, 마무리 등)이 볼품없어 시적으로는 성공하지 못하고 있다.
출처 : 윤동주의 시를 읽는 모임
글쓴이 : 리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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