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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리의 일상/길위의 학교

[기행 후기] 김영랑 문학기행을 다녀와서

by 拏俐♡나리 2010. 1. 7.

모란이 피기까지는


 

-김영랑 문학기행을 다녀와서

권 창 순

2009년 11월 22일 오전, 전남 강진. 해발 408m 만덕산.

만덕산 백련사를 향해 산길을 걷는다. 다산초당에서 백련사 사이 1Km 남짓한 아름다운 숲탐방로, 호남길을 걷는 것이다. 강진만 갯벌이 내려다보이는 호젓한 이 숲길을 오래오래 걷고 싶어 뒷짐지고 천천히 걷는다. 흔들리는 나무초리에 생채기가 날것만 같은 파란 하늘도 올려다보며, 잠시 눈을 감고 서서 산바람소리도 들으며.

밟히는 떨잎마다 쏴아~ 쏴아아~ 파도소리를 낸다. 두고 가는 게 그리워 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돌아다보며 고개를 넘으니 골짜기 안에 동백나무로 둥지를 튼 만덕산 백련사가 보인다. 멀리 오른쪽으로는 강진만이 동백 잎에 빛나는 영랑의 마음처럼 찰랑찰랑 반짝인다.

두 갈래 길 앞이다.

“어느 쪽으로 가요?.”

혜조님, 은하님, 예림이가 앞선 일행을 행해 소리친다. 그러나 앞선 일행은 대답이 없다. 메아리도 없다. 너무 외로워 나무속살에 나이테로 숨어 버렸나? 우리는 뒤에 올 일행을 위해 나뭇가지를 주워 땅바닥에 화살표를 그려놓고 왼쪽 길을 택하여 골짜기를 내려갔다.

다산초당에서 백련사를 오는 이길. 애초엔 통길이었을 이 길. 유배중인 정약용이 백련사의 초의선사나 혜장선사를 만나로 오던 이길. 이 길이 다산 정약용에겐 해방의 길이었다. 서로 종교는 달랐지만 시국담을 주고받으며 가슴의 응어리도 풀고 학문적으로 서로에게 좋은 스승이요, 벗이요, 제자였을 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다시 다산초당으로 되돌아가는 이 길. 다산에겐 가둠의 길이 아니었을까.

나에게 이 길은 어떤 길인가. 그리움을 얻는 길이리라. 문학여행을 통해 얻는 그리움. 그 꽃잎 같고 나뭇잎 같은 그리움은 내 지친 삶에 활기를 주니 내게도 이 길은 해방의 길이다.  

문학여행을 통해 얻는 그리움이란 무엇인가. 해당 작가의 삶과 작품들, 해당 작가 외에 답사하는 인물들의 삶, 만나는 사람들, 걷는 산하, 맛보는 먹거리, 바람소리, 구름, 나무, 갈대, 논과 밭, 집, 길, 동행하는 사람들, 그들의 몸짓, 웃음소리 등 이 모든 게 내게 등불처럼 깜빡이는 그리움을 준다. 다산도 두 선사도 내게 큰 그리움을 준다.

아침식사를 하고 문학기행반은 만덕산을 오르기 전에 다산의 외가 쪽 후손인 전 강진군수님으로부터 다산에 대한 강의를 들었다.

전 강진군수님은 강의를 마치며 두 가지를 당부했다. 하나는 동트기 전에 일어나는 것을 생활화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글로 남기는 것을 습관화 하라는 당부였다. 그러면 누구나 다산 정약용처럼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을 거라고 했다.

수백 권의 저서를 남긴 정약용. 그는 다산초당에 대한 기록, 유배지에서 자녀들에게 보내는 편지, 해배 후 고향으로 찾아온 제자들과 나눈 대화 등 세세하게 글로 남겨 놓았기에 우리는 세월을 뛰어넘어 정약용과 그 당시의 모습을 어제인 듯 만날 수 있는 게 아닐까.

다산초당을 오르는 길, 대나무숲과 동백나무숲을 지난다. 나무뿌리와 울퉁불퉁 작은 바위들이 계단이 되어 준다.

그 길 오른쪽으로 무덤이 하나. 무덤가에 곱게 물든 단풍나무 나뭇잎을 보며 앞서가던 혜조님이 탄성을 지른다. “예쁘다. 아니 곱다. 아니 예쁘다. 다른 표현이 왜 생각 안 날까.”혜조님의 푸념아닌 푸념을 들으니 어젯밤 늦게까지 술을 마시며 후배들과 나눈 어휘공부하기에 대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나는 붉게 물든 단풍나무 나뭇잎이 잠들어 있는 망자의 혼불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리고 잠시 [혼불]의 작가 최명희님 무덤가 에 서있는 단풍나무들을 생각했다.

다산초당을 코앞에 두고 해찬이는 계단길을 잘 오르는데, 우리 지환이는 힘들어 여러 번 주저앉는다. 잘 먹는 지환이에게 운동을 못시킨 게 미안했다.

다산초당은 사적 제107호로 전라남도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에 있다. 조선시대의 실학자 정약용이 강진에서 18년 동안 유배 생활을 했는데, 그 중 10여년을 이곳 다산초당에서 보냈다. 정약용은 이곳 다산초당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며, 다른 한편으로는 『목민심서』, 『흠흠신서』, 『경세유표』등 5백여 권에 이르는 방대한 책을 저술하였다.

다산이란 호는 초당이 위치한 만덕산에 자연의 차가 많이 분포되어 있어 마을사람들이 만덕산을 다산이라고도 불렀으며, 이름도 모르는 정씨라는 사람이 살고 있다 해서 다산 정씨 또는 정다산이라 불리워졌으며 이때부터 호를 다산이라 했다고 한다.

다산 정약용에 대해 강진군청의 자료를 소개한다.

정약용은 정조가 서거하고 순조가 즉위하면서 생애 최대의 전환기를 맞는다. 소론과 남인 사이의 당쟁이 신유사옥이라는 천주교 탄압사건으로 비화하면서 다산은 천주교인으로 지목받아 유배형을 받게 된다. 다산의 나이 마흔이었다. 신중하면서도 용기를 지녔던, 중앙과 지방에서 두루 행정경험을 쌓았던, 장차 명재상이 될 것이 예상되었던, 조선을 새롭게 했으리라 기대할 수 있었던 다산. 그러나 다산은 먼 귀양길을 떠나야 했다.

첫 귀양지는 포항 장기였다. 이때 다산의 셋째형 정약종은 옥사하고 둘째형 정약전은 신지도로 유배되었다. 9개월이 지난 후 황사영 백서사건이 발생하자 다산은 다시 서울로 불려와 조사를 받고 정약전은 흑산도로 정약용은 강진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다산은 주막 골방에 머물면서 주막집을 ‘동천여사(東泉旅舍)’라 일컬었는데, 42세 때 동짓날 자기가 묵던 작은 방을 사의재(四宜齋)라 했다. 생각을 담백하게 하고, 외모를 장엄하게 하고, 언어를 과묵하게 하고, 행동을 신중하게 하겠다는 뜻이다.

다산은 47세 되던 1808년 봄, 거처를 강진읍에서 서남쪽으로 20리쯤 떨어진 다산(茶山)의 귤동(현재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에 있는 산정(山亭)으로 옮겼다. 이곳이 유배생활 후반부 10년을 머물면서 역사에 빛나는 학문적 업적을 남긴 다산초당이다.

정약용은 57세 되던 해 가을, 유배에서 풀려 고향으로 돌아와 이미 이루어진 저술을 수정하고 보완하는 데 힘쓰며 자신의 학문과 생애를 정리하였다. 이때 미완으로 남아있던 목민심서를 완성하였으며,『흠흠신서』를 저술하여 경세론의 삼부작(1표 2서)을 완성하였다. 또한『아언각비』등의 저작을 내놓았다. 회갑을 맞이해서는 자신의 묘지명을 지어 자신의 생애를 정리하기도 하였으며, 북한강을 유람하여 여유있는 생활을 보내기도 하였다.

다산초당 옆에는 다산 선생이 손수 마당에다 연못을 파고 붕어를 길렀다는 조그마한 연못이 있다. 붕어를 보고 날씨를 예측했다고 하며 한양에 가서도 붕어의 안부를 물었다고 한다. 다산동암(茶山東庵), 송풍루(松風樓)라고도 불리는 동암은 다산이 저술에 필요한 2천여 권의 책을 갖추고 기거하던 곳이다.

다산은 초당에 있는 동안 대부분의 시간을 이곳에 머물며 집필에 몰두했으며, 목민관이 지녀야 할 정신과 실천방법을 적은 '목민심서'도 이곳에서 완성했다. 현판 중 보정산방(寶丁山房)은 추사의 친필을 모각한 것이고, 다산동암은 다산의 글씨를 집자한 것이다.

천일각(天一閣), '하늘 끝 한 모퉁이'라는 뜻의 천애일각(天涯一閣)을 줄인 것이다. 이 건물은 다산의 유배시절에는 없던 건물인데, 돌아가신 정조대왕과 흑산도에서 유배 중이던 다산의 형님 정약전이 그리울 때 이 언덕에 서서 강진만을 바라보며 스산한 마음을 달랬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1975년 강진군에서 세웠다고 한다.

다산초당 뒷뜰 언덕배기에 있는 바위에 정석(丁石)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정씨가 멀물렀다는 뜻으로 새겼는데, 다산의 깔끔한 성품을 보여주고 있다.

은하님, 나, 혜조님, 예림이는 골짜기를 내려오다 스님과 두 마리의 백구를 보았다. 스님도 백구도 외로워 보였다. 산중에 사는 스님들이나 산사람들이 외로워 보이는 건 아마도 내 마음이 외롭기 때문일 것이리라. 절의 차밭을 지날 때 차 한 잎을 따서 씹어 보았지만 그냥 일반 나뭇잎 맛이다.

차밭을 지나 떨잎 사이에서 도토리 한 알을 주웠다. 매만지다 떨잎 위로 던졌다. 탁! 탁! 탁! 타타타타!!! 탁! 도토리는 목탁소리를 내며 떨잎 속으로 숨어버린다. 그러자 내 가슴으로 백련사의 목탁소리가 굴러 들어온다.

백련사의 본래 이름은 만덕산 백련사이며 조선후기에 만덕사로 불리우다 다시 만덕산 백련사로 부르고 있다. 신라말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고려명종(1170년)때 원묘국사 요세에 의해 중창되었다.

고려 후기에 8국사를 배출하였고 조선 후기에는 8대사가 머물렀던 도량이며 고종 19년(1232년)에 원묘국사 3세가 이곳에서 보현도량을 개설하고 백련결사를 일으킨 유서 깊은 명찰이다. 대웅전은 조선 후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집으로 겹처마인 다포식 건물이다.

내부에는 목조 삼존불이 봉안되어 있는데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 하고 있다. 이 삼존불은 중앙 본존불이 석가여래이기 때문에 당연히 좌우의 불상은 보살상이 배치되어야 하는데도 여래상을 안치한 점이 특이하다.

우리 문학기행반 회원들은 찰랑이는 강진만을 등지고 앉아 문화해설사로부터 절에 대한 강의를 들었다. 강의가 끝나고 문화해설사께서 영랑의 시 [내 마음을 아실이]를 암송했다. 시낭송가로 활동하고 있다고 했다. 이 시는 무희 최승희를 사랑했지만 집안의 반대로 이룰 수 없었던 영랑의 아픈 마음을 노래한 시다.


내 마음을 아실이


내 마음을 아실이

내 혼자 마음 날같이 아실이

그래도 어데냐 계실 것이면

  

내 마음 에 때때로 어리우는 티끌과

속임없는 눈물의 간곡한 방울방울

푸른 밤 고이 맺는 이슬 같은 보람을

보밴 듯 감추었다 내어드리지


아! 그립다

내 혼자 마음 날같이 아실이

꿈에나 아득히 보이는가

  

향 맑은 옥돌에 불이 달아

사랑은 타기도 하오련만

불빛에 연긴 듯 희미론 마음은

사랑도 모르리 내 혼자 마음을

 

영랑 시인의 그 외론 마음을 누가 알아 줬을까.

동백나무 군락지. 그 길을 걸어 내려오면서 아! 그립다 내 혼자 마음 날같이 아실이 꿈에나 아득히 보이는가.

영랑 시인의 그 그리움을 안고 영랑생가로 출발한다. 가까워지는 강진만. 바다 찰랑거리는 소리가 내 가슴에서도 들린다. 지난 밤 새벽 3시 반까지 토론 겸 문학이야기꽃을 피운 까닭에 졸음이 밀려오지만 내 가슴에서 들리는 파도소리도 즐거운 노래다.

생각해 보니 19개월만의 문학기행이다. 제100차 문학기행을 하고 일곱 번의 문학기행을 그냥 보냈다. 초등학교 3학년인 아들 지환이가 문학기행 언제 가냐고 물을 때마다 아쉬웠었다. 개인사정으로 문학기행의 즐거움을 맛보지 못한다는 건 슬픔이다.

김영랑 문학기행과 동인지 출판기념 및 아동문학 심포지엄 행사가 겹쳐 아쉬웠는데, 다행인지 문학기행일이 일주일 늦춰지면서 아쉬움이 즐거움으로 바뀌었다.

“김영랑 문학기행 가기로 했다. 지환아 갈래?”

지환이가 오랜만에 문학기행을 가게 됐다고 좋아한다. 시인 문학기행이라 더 좋아한다.

“문학기행 갈려면 시를 외워야 할 텐데.”

“외우면 되지요. 뭐.”

자신감 넘치는 지환이의 말에 마음이 즐거우면서도 시를 외라고 은근히 강요하는 것 같아 미안했다. 그러나 지환이가 세 편의 영랑시를 어려워하지 않고 암송하는 걸 보면서 즐거웠다.

지환이와 나는 다락방시암송회 회원이다. 봄에 이사를 온 집에 마침 다락방이 있어 나의 글방으로 사용 중인데 그곳이 지환이와 둘이 회원의 전부인 다락방시암송회 본부다.

매월 말일쯤 통닭 한 마리 사들고 올라가 다락방시암송회 모임을 갖는다. 12월 다락방시암송회의 암송시는 이장희 시인의 [봄은 고양이로다]와 윤동주의 [서시]다.

건축현장에서 일하는 나는 김영랑문학기행에 참여하기 위해 오전 일을 마치고 조퇴를 해야 했음으로 부랴부랴 서둘러 일을 했다. 17층 아파트 계단을 오르내리며 주어진 일을 마무리 하는데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갔다. 설레는 마음 때문이리라.

5호선 군자역에서 내려 지환이 멀미약을 사고 문구점에 들러 노랫말을 복사하고 집에와서 점심밥을 먹고 자료를 뒤적이다 드디어 문학여행길에 올랐다.

“아드님과 산엘 다녀오십니까?” 배낭을 보고 택시 기사가 물었다. “아니예요. 여행 좀 떠납니다.” “참 좋으시겠어요.” 택시기사님의 말대로 나와 지환이는 참 좋았다.

뚝섬역 우리대학 학습관 정문에 오니 기행할 차량도 와있고 반갑고 그립던 얼굴들도 몇 와있다. 국문학과 학생회 회장과 임원, 자료집을 만드느라 수고한 혜신님, 이것저것 챙기느라 분주한 이성순회장님.

꽃의 꽃잎처럼 회원들이 하나둘 모이고 하나 둘 켜지는 거리의 전등불처럼 우리는 다정한 얼굴로 강진을 향해 출발했다.

김밥을 먹고, 자기소개를 하고, 마니또를 뽑고, 작가론과 작품론을 하고, 남행열차을 신나게 불렀다.


[남행열차]

비내리는 호남선 남행열차에 흔들리는 차창너머로

빗물이 흐르고 내눈물도 흐르고 잃어버린 첫사랑도 흐르네

깜빡깜빡이는 희미한 기억속에 그때만난 그사람 말이없던 그사람

자꾸만 멀어지는데 만날순 없어도 잊지는 말아요 당신을 사랑했어요


(1)

남도답사 일번지 청자골강진 서정시인 영랑김윤식

만덕산 백련사 다산다산 정약용 밤정취가 아름다운 마량항

우리우리우리 손잡고 샘물같은 하늘같은 영랑시 가슴가슴 담아서

가슴엔 강물흐르고 입술엔 꽃향기 그리고 시향기 영원한 문학기행반


(2)

김영랑은 언어의 연금술사다 영랑특히 전라사투리

사투리와 옛말을 교묘하게 섞어써 시자체를 향토향토 향토색

이런사투리가 영랑시 소박하고 친근미를 느끼게 친근미를 느끼게

영랑시 읽고읽으면 맛난다 달콤한 고소한 시향기 영랑시 사랑합니다

-전규태 [서정시 발판 다진 김영랑]에서


(3)

영랑영랑 김윤식 유미주의자 그의 시는 천하의 일품

영랑은 부자유 궁핍같은 현실을 추방하고 순수감각 추구해

살과 피의 맺힘 영랑시 예찬하는 용아용아 박용철 시문학의 박용철

지용도 격찬하는데 단조가 아니라 영랑시 절조라 복잡을 통과하여온

-전규태 [서정시 발판 다진 김영랑]에서


(4)

김영랑은 낭만자 열정삭이며 차분하게 스스로경험

사물적인 이미지 시만들되 시간을 오래두고 다져다져 내놓아

따라영랑시는 부드런 언어선택 음악적인 기교에 머무르지 않고서

따뚯해 애절하면서 차분한 느낌이 들어서 많은이 애송해 널리애송해

-전규태 [서정시 발판 다진 김영랑]에서


(5)

모란모란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아직 내봄기둘러

모란이 뚝뚝뚝 나는나는 비로소 봄을여윈 설움설움 잠길래

오월오월그날 떨어진 꽃잎마저 시들시들 시들고 천지모란 없어저

내보람 무너졌느니 내한해 다가고 섭섭해 웁니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김영랑 시 [모란이 피기가지는]에서


강진은 한반도 서남부에 위치하고 있는 남도답사1번지. 청자골 강진은 동ㆍ서ㆍ북면이 노령산맥의 힘찬 두 지맥으로 내달려 오다가 남쪽은 짙푸른 강진만의 해안, 북쪽은 천황봉을 분기점으로 영암군, 서쪽은 병풍처럼 둘러진 주작산과 석문산의 경계로 해남군, 동쪽으로는 수인산과 천태산을 경계로 장흥군, 남으로는 내륙 깊숙이 만입된 강진만 너머로 완도군과 경계를 이루고 있어 사통팔달의 교통의 요충지인데다, 기름진 평야와 청정해역이 있어 산물이 풍부하고 인심이 후덕한 문림옥향이다.

그 강진에 도착한 것은 별들이 너무도 또렷한 늦은 밤이었다. 숙소인 다산명가의 개들도 반가운지 컹컹 짓는다.

회장님의 수고로 즐거운 먹기부터 시작되고 작품토론이 시작되었다. 진행을 맡은 회원이 개인 사정으로 참석치 않아 내가 갑자기 진행을 맡게 되었다. 문기봉 선배님이 진행을 맡았으면 좋았을 텐데, 내게 한번 해보라고 권유하시는데 마다할 수가 없었다.

시는 모국어로 된 가장 아름다운 예술이다. 김영랑은 시를 통해 모국어를 갈고 다듬은 시인으로 유명하다. 섬세한 정서와 언어의 조탁 그리고 미묘한 음악성으로 우리 순수시의 위치를 확고하게 다진 시인이다.

김영랑의 섬세한 언어는 끝없는 퇴고를 통해서 이루어졌을 것이다. 퇴고(堆鼓)는 퇴(밀다)와 고(두드린다)로 시문을 지을 때 자구를 여러 번 생각하여 고치는 것을 말한다.

당나라 시인(스님) 가도가 <이응의 유거에 부침> 이라는 시를 짓느라 골몰하다 경조윤 한유의 행차를 방해한 죄로 끌려갔는데, 그 연유를 듣고는 한유가 ‘고’가 좋겠네 했다고 한다.


이웃이 적어 한가로이 살고

풀숲 오솔길은 황원으로 드네

새는 연못가 나무에 잠자리를 잡고

스님은 달빛 아래 문을 두드리네 (僧鼓月下門)


문을 밀고 들어 갈 것이냐, 문을 두드려 동자를 기다릴 것이냐. 아무래도 문을 두드리면 문 안에서는 객을 맞기 위해 부산을 떨 것이다. 두드리는 것이 시의 공간을 더 넓고 따뜻하게 만드는 것이다.

내려오는 차 안에서 작가론과 작품론을 간략하게나마 했기 때문에 작품토론은 자유롭게 하기로 하고 우리는 돌아가며 감명 깊게 읽은 김영랑의 시에 대한 각자의 감상을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김영랑 시에 자주 등장하는 ‘내 마음’에 대한 각자의 견해도 들었다.

연구자들이 해부한 시에 대해 밑줄을 그으며 공부하듯 하는 토론은 이제 지양되어야 한다. 작품을 읽고 그 감동이 내 삶에 어떤 위안과 기쁨과 평화가 된다면 설령 작가의 의도나 연구자들의 견해와 정 반대로 그 작품을 감상했다 하더라도 부끄러울 일이 아니다. 어쩜 그런 과정이 더 소중하다고 본다. 작품을 작품으로 먼저 감상하고 그 감상으로 먼저 자신의 감정을 이야기 하고 그리고 문학기행 동료들과 감상을 나누고 연구자들의 견해도 비교해 보는 것이 좋을 듯싶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시를 합창하며 길지 않은 작품토론을 마쳤다. 그리고도 영랑시에 대한 각자의 견해를 토로하느라 술잔이 오갔다.

연약한 영랑의 시. 현실주의적 시각을 가진 이들은 1930년대 일제시대의 암흑기, 김영랑의 시가 무슨 효용이 있었겠는가 하고 반문한다. 오중식 회원도 그런 시각을 갖고 있었다.

당연한 시각일 수 있다. 1920년대 중반이후 카프를 중심으로 쓰여진 경향시는 생경한 사상성과 목적의식을 드러냈기에 당시의 시단은 서정시의 본령을 보여준 영랑시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부자의 맏아들로 큰 어려움 없이 성장한 영랑이 민족의 현실을 등한시 한건 아닐까. 연약한 시편들을 보면 그런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으리라. 그러나 1919년 휘문의숙 재당 당시 독립선언문을 구두 안창에 숨겨 고향에 내려와 강진의 독립운동을 주도 하다가 검거되어 대구 형무소에서 6개월간 복역 하는 등 시편들처럼 나약한 김영랑은 아니였다.

김영랑의 80여 편의 시 중에는 [거문고], [독을 차고], [우감], [춘향] 등 현실에 대한 반응을 보인 시들도 있다.

김영랑의 시가 사회의 현실에 적극적이진 못했다 해도 그의 자연에 대한 노래는 우리 감정을 풍요롭게 했으며, 새로운 비유, 표현의 구사로 언어 사용의 폭을 넓힘으로써 실제의 삶을 윤택하게 했다고 볼 수 있으리라.

자연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고 그 아름다움을 언어와 절묘한 기법으로 표현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영랑시는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연구자들은 말하고 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양면을 다 이해하며 작품을 감상하고 더 나아가 영랑시를 사랑했으면 한다.

새벽 3시 30분, 이야기 불꽃은 식을 줄 모르고 타올랐지만, 나는 봉덕 동문회장과 별밭을 걸어 황토방으로 내려갔다. 코를 골며 자는 지환이 옆에 누우니 잠이 쏟아졌다.

세 시간 후, 먼저 일어난 지환이가 산책을 가자고 했다. 이른 아침이라 돌담에 햇살은 비추지 않았지만, 돌담을 배경으로 사진도 박았다. 이성순 회장님 나의 마니또인 학과학생회 회장님 그리고 회원 몇과 고추밭에서 고추도 한두 개 따며 숙소에서 멀지않은 다산유물전시관으로 갔다.

이른 시간이라 관람을 할 수는 없었지만 작은 광장의 조형물들을 보며 정약용과 강진 사람들의 사랑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강진만이 아가처럼 품고 있는 들을 달려 김영랑 시인의 생가에 왔다.

영랑길, 생가로 들어가는 구부러진 돌담에 시의 가슴을 살포시 안은 시비가 있다.


내마음 고요히 고흔봄길우에


돌담에소색이는 햇발가치

풀아래우슴짓는 샘물가치

내마음고요히 고흔봄길우에

오날하로 하날을 우러르고십다

새악시볼에 떠오는 붓그럼가치

시의가슴을 살프시젓는 물결가치

보드레한 에메랄드 얄게흐르는

실비단 하날을 바라보고십다

 

영랑의 시에서처럼 돌담에 햇살이 속삭인다. 찌든 일상을 털어버리고 돌담길을 걸으며 실비단 하늘도 바라다보라고 말이다. 겨울하늘도 푸르고 아름답지 않은가.

돌담에 기대어 영랑시와 함께 해바라기를 해보고 싶지 않은가

햇살이 소보록하게 쌓인 돌담길을 타박타박 걸어가니 생가 대문이 있는 문간채 앞 왼쪽에 [모란이 피기까지는] 시비가 있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둘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네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둘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이 시를 두 눈감고 암송해 보면 아직도 찬란하고 슬픈 봄을 기다리는 영랑 시인의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을까. 모란이 다 떨어지고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 나면 시인은 모든 걸 잃었다고 슬픔에 잠깁니다. 영랑 시인의 그 슬픔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삼백 예순 날 섭섭한 그 마음은 새봄에 찬란하게 필 모란의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의 마음이 아닐까. 대문을 들어서자 문화해설사가 반갑게 맞아 준다.

이곳 남성리 탑동에 위치해 있는 영랑생가는 지방기념물 제89호로 지정되어 있다. 우리나라 서정시인의 거목이며 시문학파 동인이었던 영랑 김윤식이 46년을 살던 곳으로 영랑의 시적 소재의 산실이다.

현재의 영랑생가는 선생이 이주하고 그 후 몇 차례 전매 되면서 원형이 크게 훼손 되었던 것을 1985년 강진군이 도비지원을 받아 다시 사들여 연차공사로 복원한 것이다. 안채는 일부 변형되었던 것을 1992년에 원형으로 보수하였고 문간채는 철거되었던 것을 영랑가족들의 고증을 얻어 1993년에 복원하였다.

영랑은 이 생가에서 1903년 오백석지기의 부자 김종호의 2남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서울 휘문의숙과 동경 청산학원 영문과에서 공부를 하던 시절을 제외하곤 서울로 이사하기까지 내내 살았던 곳이다.

영랑은 1919년 휘문의숙 재학시 독립선언문을 구두 안창에 숨겨와 강진의 독립운동을 주도 하다 검거 대구형무소에서 6개월간 복역하기도 했다. 1945년 해방 후에는 대한독립 축성회 강진군 단장으로 활약하기도 했고 1948년 초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했으며 1949년 8월부터 약 7개월간 공보처 출판국장을 지냈다. 1950년 한국전쟁 때 피난을 가지 못하고 서울에 있던 영랑 시인은 복부에 폭탄의 파편을 맞고 쓰러져 9월 29일 48세로 세상을 떠났다.

영랑 시인이 48년을 살던 강진을 떠나 서울로 간 것은 공보처의 출판국 일자리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그보다는 생명의 위협 때문이었다. 대한독립축성회 단장을 지내는 등 우익에 앞장섰으므로 시국의 흐름으로 보아 죄익의 경계의 대상이었으리라.

연약한 시를 많이 쓴 영랑은 이광수 등 유명 문인들이 일본식 이름을 갖을 때 본인은 물론 자녀들 누구도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영랑 시인은 한국전쟁 때 폭탄의 파편을 복부에 맞고 세상을 떠났는데 문화해설사님의 설명대로 사고 당시를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피난을 가지 못하고 가족과 함께 서울에 남았던 영랑 시인.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고통으로 시달리다 마침내 인천상륙작전의 성공과 서울수복작전이 펼쳐지고. 군인들의 시가행진을 환영하기 위해 가족과 함께 거리로 나선 영랑 시인. 안고 있던 딸을 건네주고 환호하며 군인들을 향해 나아가는데 폭탄이 날아와 쾅! 복부에 파편을 맞고 말았던 것.

영랑 시인이 거리로 나서지 않고 집에 있었다면 오래 살았을 것을. 그러나 모란이 필 찬란한 봄처럼 자유를 다시 얻은 영랑 시인, 그 솟구치는 뜨거운 가슴을 어찌했으랴.

안채 오른쪽으로 장독대와 모란꽃밭이 있다.

  

오매 단풍 들겄네

"오매, 단풍 들겄네"

장광에 골붉은 감잎 날아와

누이는 놀란듯이 치어다보며


"오매, 단풍 들겄네"

추석이 내일모레 기둘리니

바람이 잦이어서 걱정이리.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오매, 단풍 들겄네"


공사중이라 장꽝은 안채 왼쪽 살구나무 아래로 옮겨져 있었지만 그때 장꽝에서 무얼 꺼내다 놀란듯 붉은감잎을 바라다 보았을 시인의 누이. 그 누이를 바라다보는 영랑 시인의 따뜻한 눈길이 만져질 것만 같다.

모란꽃밭에서 더 오른쪽으로 가면 북을 두들기며 시를 읊고 쓰던 사랑채가 자리하고 있는데, 그 앞의 은행나무는 영랑이 19살에 심었다고 한다. 안채 뒷편 언덕엔 대나무숲과 동백나무들이 있는데 영랑의 데뷔작 「동백잎에 빛나는 마음」의 모태인 것이다.

김영랑은 [청구]라는 문학동인지로 출발하였으나 결국「시문학」동인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영랑 시는 순수한 탐미주의(耽美主義)적 문학관에 입각하여 섬세하면서도 영롱한 정서를 잘 다듬고 깎아낸 언어를 쓰여진 순수 서정시다. 소월이 북도(北道)의 투박한 사투리로 독특한 가락을 표현했다면, 영랑은 남도의 곱살스러운 방언을 그의 시에 담았다.

맛있는 남도의 점심식사를 하고 청자골로 향했다.

전남 강진군 대구면 일대는 9세기에서 14세기까지 고려청자를 제작하였던 지역으로, 우리나라 청자의 변화과정을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는 "청자의 보고(寶庫)"이다. 이와 같은 중요성으로 1963년 국가사적 제68호로 지정되었다. 이 지역에서 지표조사된 청자가마터(窯址)는 총 188기로, 이는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청자가마터의 50% 이상을 차지하는 수량이다. 이에 고려청자의 체계적인 보존과 연구를 위하여 1997년 9월 "강진청자자료박물관"을 개관하였다.

이 박물관은 국내 유일의 청자박물관으로, 고려청자의 수집, 전시, 연구, 교육 등을 통하여 청자문화의 계승발전을 추진하고 있다. 특히, 기존 박물관과 다른 전시 방법과 유적지 주변에 세워진 역사성으로 현재 추진 중인 공립박물관의 모범이 되고 있다. 또한 박물관 주변에 고려청자를 재현하는 작업장이 세워져 우리나라 청자의 과거 및 현재를 볼 수 있는 장점을 지닌다.

청자자료박물관 관람을 마치고 마량항구를 향해 달린다. 왼쪽으로 바다가 우리와 함께 신나게 달린다. 멀리 만덕산도 신나게 우리를 따라온다.

마량항은 조선초기 태종조 1417년 마두진이 설치되어 만호절제도위가 관장하였고 임진왜란, 정유재란을 겪을 당시 거북선 1척이 상시 대기하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유서깊은 만호성터가 남아있고, 까막섬이 수묵화처럼 떠있으며, 고금도와 약산도가 든든하게 풍랑을 막아주는 마량포구는 1종 어항으로서 천혜의 미항으로 손꼽히고 있다.

낮보다 밤의 정취가 아름다운 이곳 마량미항에서는 매주 토요일 아름다운 항구와 관광객이 하나 되는 흥겨운 음악회가 열린다.

문학기행반, 부둣가에 빙 둘러앉아 싱싱한 바닷고기를 먹는다. 회에 술잔을 기울이다보니 바다가 취하고 만다. 이생진 시처럼 이 바다에 이름도 인장도 다 버리고 싶다.

아이들은 꿈틀꿈틀 입천정에 착착 달라붙는 세발 낙지를 재미있게 먹는다. 고깃배들은 그런 아이들이 좋아라 바다를 흔들고 서울로 갈 차는 발을 동동 구르는 것만 같다.

늦은 출발. 차창 밖으로 저무는 풍경들, 논에서 자라난 보리들이며 텅빈 논밭이며 마을의 작은 뒷산들이며 개천들이며 모두가 포근한 까만 이불을 덮기 시작한다.

문학여행의 소감과 자기의 마니또와의 나눔을 이야기 하며 지루하나 즐거운 상행길이다.

지환이가 잠에 푹 빠졌다. 아들과의 겨울문학여행이라. 혼자 나그네처럼 떠돌 때는 얼마나 그리워했던 풍경인가.

 자정을 넘어 도착한 서울, 다시 안동 이현보 문학기행때 만나기를 약속하며 모두 집으로 뿔뿔이 흩어지고 나는 지환이의 손을 잡고 낯익은 거리를 걸으며 영랑의 [달]을 되뇌였다.



사개틀린 古風의 툇마루에 없는 듯이 앉아

아직 떠오를 기척도 없는 달을 기둘린다

아무런 생각 없이

아무런 뜻없이


이제 저 감나무 그림자가

사뿐 한치씩 옮아오고

이 마루 위에 빛깔의 방석이

보시시 깔리우면


나는 내 하나인 외론 벗

가녈픈 내 그림자와

말없이 몸짓없이 서로 맞대로 있으리니

이 밤 옮기는 발짓이나 들려 오리라


서울에 뜨는 달도

이제 영랑의 시처럼 내 가슴에

빛깔의 방석을 깔리라, 보시시.

 

영랑 시인님

나는 동백꽃잎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봅니다. 만덕산을

함께 올랐던 아이들의 이름, 이예림, 오해찬, 김유미, 권지환과

은실, 재일, 성탁, 영용, 중식, 봉덕, 기봉 이런 동문들의 이름과 성순

동훈, 혜조, 은하, 영숙, 선희, 순옥, 흥순, 윤제, 영유, 재욱, 양숙,

춘, 미정 등 그리움이 햇살처럼 묻은 이름과 모란, 강진만, 청자골, 마량항

보리밭, 다산초당, 정약용, 최승희, 용아 박용철 시인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그날 함께 보았던 그 별, 바람, 바다, 동백꽃, 말, 몸짓, 눈짓, 나무, 구름, 대나무

사람, 산, 등 모두가 아름다운 추억이 되고 그대들 삶에, 향기가 되길 바랍니다.

동행하신 모든 분들께

영랑길 돌담에 속삭이던 햇살 한 줌씩 던져 드립니다.

비타민이 많은, 추억과 그리움이 녹아있는 사랑의 햇살을.......

                                          -향초글방에서 권창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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