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양리인가 팔봉리인가
유 재 경
여행이라는 것은 참 좋은 것인가 보다. 나는 역마살이 끼어서 여행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겨드랑이에 날개가 돋친 듯 간지럽고 푸드득거리면서 발을 동동 구르게 된다. 잠잘 때면 그 날개에 털갈이를 하느라 이불이 필요가 없고, 이 자리에서 딴 자리로 옮길 때면 가벼운 발걸음에 교통수단도 필요없이 둔탁한 발 앞꿈치가 날개로 변한다. 오늘이 8월기행 답사 가는 날이라고 계획되던 날부터 지금까지 저녁마다 손꼽아 기다리던 그날이 바로 오늘인 것이다.
혜화동에서 시작된 김기진 기행의 답사가 한여름 피서철의 즐거운 여행이라는 것을 서울에서 빠져나가면서 비로소 실감할 수 있었다. 한남동 인터체인지부터 시작한 경부고속도로의 하행선은 한여름의 더위를 식히려는 피서철의 차량행렬로 장사진을 이루었고, 우리 일행도 그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듯했다. 그러다가 어느 한순간 파란 청색선이 우리의 구세주로 나타났다. 버스전용차선에 들어서는 순간 우리의 봉고는 날개 달린 독수리였다. 오른쪽에 두 줄로 주차시켜져 있는 기나긴 주차장 사이를 거침없이 달려가는 우리의 그레이스. 주차장 속에 갇혀 오도가도 못하는 운전자들의 짜증스런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그들을 약 올리는 것 같은 심정이 못내 미안하기만 하다.
냄비국가 우리나라 대한민국
한국 사람들은 지난 일을 너무도 빨리 잊어버리는 것 같다. 아마도 빨리 달궈지고 빨리 식는 냄비국가인가 보다. IMF 금융구제를 받은 지 불과 8개월, IMF가 한국에 구원을 손길을 뻗칠 당시의 한국사람들은 이제 정신은 차린 듯 했다. 거리에 그렇게 많던 자가용 자동차들이 다들 아파트, 주택가 골목길에 주차되어 나올 생각을 하지 않고 고속도로는 중국의 주작대로를 방불케 했다. 사람들은 모두들 기름 값이 올라서 더 이상 차 타기가 무섭다는 것이었다. 어떤 면에서 보면 IMF의 시련이 우리나라에 닥쳐온 것이 오히려 과소비를 막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는 멍청한 기대를 했었다. 그러나 IMF가 우리나라에 상륙한 지 7개월이 된 지금 하루에 수십만 명의 실업자들이 속출한다는 생각조차 잊어 버렸는지 아니면 저기 승용차 안에 있는 사람들이 바로 그 실업자들인지 어째든 올 여름의 피서철 교통은 IMF이전 작년의 피서철과 다름없이 교통대란이라는 것이 한심스러울 뿐이다. 그러나 그렇게 욕하는 그 교통지옥의 한가운데 내가 타고 있는 차도 한 몫을 하는 것을 보니 내 얼굴에 침 뱉는 꼴은 아닐까?
청주의 관문 플라터너스 거리
어째든 파란선 덕분에 우리는 2시간만에 청주톨게이트를 벗어날 수 있었다. 청주톨게이트에서 청주시내로 들어가는 도로변에는 버즘(platanus)나무가 5㎞거리를 늘어서 있었다. 플라타녀스 거리의 밑으로 자동차 스포트라이트를 키고 가는 우리 차는 동굴 속을 달려가는 그레이하운드의 몸매를 연상케 했다. 버즘나무 잎은 원래 벌레가 많이 먹어 가꾸기가 곤란하나 낙엽활엽 교목으로 그늘이 시원하게 생기고 겨울의 모습이 보기 좋아 가로수와 관상용으로 많이 심는 나무의 일종이다. 이 기나긴 행렬의 버즘나무를 가꾸기 위해서 청주시청 산림녹지과에서는 수십 억원을 투자하여 벌레 먹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연구하고 약을 뿌리고 가꾸기를 5년, 이제 모름지기 청주시의 명소 중의 한 곳으로 자리잡게 만든 것이다.
청주시내를 통과하니 날이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우리가 가야할 곳은 기행 때 우리가 묵어야 숙소가 있는 화양 유스호스텔이 있는 곳이다. 날이 저물고 낯선 지역이라 도로사정도 아랑곳없이 우리나라 땅 그림과 이정표만으로 길 안내를 받을 뿐이었다. 처음 와본 지리, 처음 와본 낯선 땅, 우리는 이 길로 갈까 저 길로 갈까 헤매면서 화양계곡 유원지에 도착했다.
먹는 것에 목숨을 걸고
화양계곡 민박촌에 숙소를 정한 뒤 여장을 풀고 곧바로 저녁식사를 준비했다. 올 여름 처음 온 여행인지라 답사 팀들은 모두들 여행에 기대를 걸고 먹는 것에 목숨들을 걸었다. 준비해온 식사도구며 요리재료들은 먹음직스럽고 보기만 해도 질릴 정도로 풍성했다. 집에서 준비한 김치부터 삽겹살, 감자부침, 국거리, 찌개거리, 그리고 후식으로 수박 한 덩이까지, 수박을 먹고 나니 배가 너무 불러 숨을 못 쉴 지경이다. 지방조사부장의 생활신조가 먹는 것에는 절대 아끼지 않으며, 먹고 있을 때 말을 걸면 아무도 용서하지 못하는 성질이라 하니 올해의 답사신조가 ‘먹는 것은 푸짐하게’라는 지방조사부장의 방침이다.
저녁을 푸짐하게 먹고 나니 모든 것이 다 귀찮아진다. 설거지도 하기 싫고 그저 평상에 누워 하늘에 떠 있는 별을 보며 아무생각 없이 마냥 늘어지고 싶었다. 그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오늘 답사의 학습파트를 담당한 서기 권선희씨가 내일의 답사에 대한 간단한 임원회의와 사전 준비토론을 하잔다. 귀찮기는 하지만 답사 팀의 일원으로 참석하게 된 이상 당연히 참석해야 할 것이다.
김기진 문학기행
내가 김기진이라는 이름을 들어본 것은 불과 몇 년 전인 듯하다. 3학년 과목 중 문학비평론 과목에서 한국비평문학사에서 박영희와 함께 양대 획을 그었던 김기진을 처음으로 들어본 것이다. 시, 소설, 평론부분에서부터 다방면으로 명성을 날렸던 김기진에 대하여 이번 기행지로 택하게 된 것도 엉뚱하기 짝이 없다. 연초에 1년간 기행할 작가 6명을 선정하는데 있어서 여러 작가들의 연고지를 후보지로 내세웠다. 그 중에 우리한테 생소하기는 하지만 문학사에서 길이 업적을 남긴 김기진에 대해서 한번쯤 공부할 기회를 가졌으면 좋겠다는 의견이 나와 김기진을 택하게 되었다. 모름지기 문학작가의 기행지를 택하는데 있어서는 어느 정도 기준이 있어야 할 듯한데 이번의 김기진 기행은 전혀 그런 면이 고려가 되지 않고 아무생각 없이 선정된 것 같아 씁쓸했다.
내일 일정은 어떻게 해야 할까. 사실 김기진에 관련된 유적은 별로 없는 것이 사실이다. 청원군 남이면 팔봉리에 생가가 남아있고, 그 옆에 팔봉리교회에 김팔봉 표지석이 있는 것이 고작이고, 경기도 포천군 마명리 서릉공원묘원 내에 김팔봉 묘지가 있기는 하나 거리가 멀어 우리 일정하고는 연결이 안 된다. 기행반의 운영방침상 기행반 회원들에게 보다 더 많은 것을 보여주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보여줄 것이 없는 것이 안타까웠다. 그래서 비록 김기진에 대한 유적은 별로 없지만 다른 작가나 문화유적을 통해서 기행의 묘미에 보태줄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해 보았다.
친일문학의 선봉장 김기진
김기진 기행일정에 대한 논의를 마치고 김기진에 대한 사전 예비토의를 했다. 모두들 공부를 안한 상태여서 할 이야기들은 없었지만 내일의 기행일정을 위해서 사전에 알아두고 가야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빠뜨릴 수 없는 순서이다. 김기진(1903~1985)은 1903년에 충북 청원군 남이면 팔봉리에서 태어난다. 팔봉산자락에서 태어났다하여 호를 팔봉으로 불렀고 호가 이름보다 유명하다. 함경도 군수였던 아버지를 따라 5세까지 이곳에서 살았고 여기저기 옮겨다니다가 1916년 배재고보에 입학하면서 박영희와 사귀게 된다. 1920년 졸업도 하지 않은 채 박영희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릿교(立敎)대학 문학부에 입학하여 러시아 문학에 대하여 공부했다. 그 후 귀국하여 1924년 매일신보사에 입사하여 1925년 시대일보사로 옮기면서 파스큘라(Pascular)와 염군사를 합쳐 KAPF를 조직했다. 1935년 카프 2차 검거사건으로 해산계를 쓰고 해방 후에는 대구에 내려가 종군작가로 입대했으며, 1960년에 경향신문 주필이 되었다.
그러나 그 이력의 내면에는 씻을 수 없는 오욕의 작품을 남김으로서 세간의 손가락질을 받고 있다. 김기진의 친일활동은 1938년 친일단체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의 결성준비위원이 되면서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고, 조선총독의 지방시찰을 수행하면서 쓴 수필 [쓰나미 총독 수행기]를 매일신보에 기고하여 그보다 먼저 친일을 시작한 박영희의 뒤를 따라 황민화정책을 찬양하고 홍보하였다. 그 뒤 {삼천리}지가 주최한 ‘전쟁과 문학과 그 작품’이라는 좌담회에 참석한 것과 4월 ‘황군위문작가단’의 장행식 개회사, 10월에 결성된 ‘조선문인협회’의 발기인으로 참석, 1939년 8월에 {매일신보}에 실린 ‘한해대책 현지보고’라는 기사를 매일신보에 쓴 것 등 친일행위가 두드러진다. 뿐 만아니라 ‘조선문인보국회’ 결성, ‘조선문인협회’에 발기인으로 참여, ‘미영격멸국민궐기 대회’의 행사로써 기획된 보도특별정신대의 순회강연을 하는 등 친일단체의 주동이 되어 활동한 친일문학의 선봉장 역할을 하였다.
화양리의 새벽
졸리는 눈을 비비며 김기진 토론을 하는 둥 마는 둥 한 사람 한 사람 들어가서 잠자기 시작했다. 끝까지 남은 사람들끼리 자유주제를 가지고 시간을 때우기로 했다. 원창연이 한국의 미스테리들을 나열할 때 우리는 그 말들이 정말로 왜 그런지 궁금하기도 하고 어처구니없는 일들에 대하여 안타까워하고 다시 한 번 반성해야 될 것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말을 마친 창연이가 답답한 심정으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자 우리는 심야의 데이트를 하려고 밖으로 나섰다. 지금시각이 세시 반, 어두컴컴한 한밤중에 하늘에 별들만 총총히 떠 있고, 여기저기 보안등불 아래 남녀연인들이 얼굴을 마주보고 있는 풍경들을 간간이 볼 수 있었다. 우리는 화양계곡을 오르려다 너무나 어두워 길을 분간할 수 없게 되자 발길을 돌려 아스팔트길을 향하여 계속 걷기 시작했다. 밤중인지 새벽인지 혼돈된 상태에서 점점 동이 터 오기 시작했다. 눈앞에 물체들이 흐릿하게 다가오고, 숲 속의 나무들의 몸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드디어 날이 밝아오고 산 위의 공지선상에 줄이 가기 시작했다. 우리 앞에 펼쳐져 있는 도로의 끝자락에 무엇인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마치 무엇인가에 홀린 듯한 나는 자꾸만 저 끝을 향하여 자꾸만 걷고 싶었다. 졸립다고 그만 돌아가자는 성탁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점점 끝에 무엇인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결국 고집을 부리고 끝을 향해서 올라가 보았지만 이미 아침이 되어버린 고갯마루에는 저 앞 동네의 저수지에서 올라오는 뭉실거리는 새벽안개만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화양구곡(華陽九曲)
아침을 먹고 난 일행은 화양계곡을 향해서 올라갔다. 화양구곡은 1970년에 국립공원으로 승격된 속리산국립공원 내에 있는 충북 괴산군에 있는 경승지로 1974년에 국립공원에 편입되어, 선유구곡과 함께 아름다운 계곡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1곡은 암벽이 하늘을 찌를 듯 떠받들고 있는 경천벽(擎天壁)
2곡은 구름의 그림자가 냇물에 맑게 비친다는 운영담(雲影潭)
3곡은 우암 송시열이 효종의 승하를 슬퍼하여 매일 새벽마다 울었다는 읍궁암(泣弓巖)
4곡은 금싸라기 같은 물 속의 모래가 들여다보인다는 금사담(金沙潭)
5곡은 별을 관측하는 곳 같다는 첨성대(瞻星臺)
6곡은 우뚝 솟은 바위가 하늘을 찌를 듯하다는 능운대(凌雲臺)
7곡은 꿈틀거리는 용과 같다는 와룡암(臥龍巖)
8곡은 푸른 학이 살았다는 학소대(鶴巢臺)
9곡은 화양천 한가운데 펼쳐진 하얀 바위를 말하는 파천(把川)
등으로 구성된 화양구곡은 그야말로 계곡에 얼굴을 들이대면 또 다른 내가 물 속에서 나를 부르는 듯한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이었다. 계곡의 맑은 물을 보면서 자연의 순리에 대해서 한번쯤 생각해 보게 되었다. 9곡에 있는 물가에서 우리는 시간가는 줄 모르고 물장구를 치고 놀았다. 모두들 물에 빠지고 엎어지고 모두들 오늘만큼은 천진난만한 어린이들인가 보다.
점심식사를 마치고난 다음 서둘러 설거지를 마치고 답사장도에 올랐다. 제일 먼저 해결해야 할 일이 기행숙소를 잡는 일이다. 민박촌 앞에 있는 화양유스호스텔에 들려 사전 연락된 유종하 대리와 계약조건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대체적으로 가격은 저렴한 편이었으나 문학기행반 형편보다는 약간 웃도는 것 같아 적정선으로 정하고 결정하기로 했다. 20인용 객실에 강당, 세미나실, 수영장과 각종 놀이시설, 그리고 호텔 뒤에 물놀이할 수 있는 계곡이 있어 더욱 좋았다. 역대 문학기행 숙소치고는 가장 좋은 숙소가 아닐까 생각하면서 흐뭇한 마음으로 다음 일정을 찾아 떠났다.
민족운동가 신채호 사당
화양계곡을 떠나 청주 쪽으로 오다보면 낭성면사무소 바로 전에 귀래리 입구 ‘단재 신채호 사당 2㎞’ 푯말이 보인다. 좁고 꼬불꼬불한 길을 한참 가니 도로공사 중이어서 흙탕물이 튀고 자갈이 삐지고 난리가 아니다. 가까스로 목적지에 도착하니 사당을 다시 성역화 하느라고 공사중이다. 그 공사장을 지나 신채호 사당과 묘소가 동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丹齋 申采浩(1880~1936)는 대전에서 태어나 청원에서 성장했다.
18세 때 독힙협회운동에 참여하여 소장파로 활약하였으며,
22세 때 문동학원에서 강사로서 계몽운동을 전개하였고,
25세 때 산동학원을 설립 신교육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26세 때 성균관박사가 되었지만, 관직에 뜻을 두지 않고 황성신문의 기자가 되어 논설을 쓰면서 항일운동을 전개하다가, 황성신문이 정간되자 대한매일신보에 주필이 되어 우리나라 역사관계 사론을 써서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그의 저서로는 <수군 제일 위인 이순신전>, <동국거걸최도통전>, <동국고대선교고> 등의 역사논문, 시론<천희당사화>, <이태리건국삼걸전>, <을지문덕전>을 국한문판으로 발행, <독사신론>에 주체적인 민족주의 사관을 피력하였고, 한말의 민족적인 위기를 타개할 영웅의 출현을 대망하면서 썼던 것으로 영웅사관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역사관은
① 사학의 이념이나 방법론에서 중세의 사학을 극복하고 근대적인 사학으로 발전,
② 당시 일본 관학자들의 조선사 연구자세에서 보이는 식민주의적 사학을 극복하는 민족주의적 사학
③ 조선혁명 선언이후 역사의 주체를 민중에게서 발견하려는 민중중심사관
④ 역사를 변증법적 역사발전에 대한 인식으로 ‘我’와 ‘非我’의 투쟁의 역사 기록으로 파악하는 등으로 민족주의 이념에 입각하여 독자적인 경지를 걸었다.
신채호 사당에 학생들이 와서 공부하는 것도 좋을 듯 했으나 길이 좋지 않아 불가능한 것이 안타까웠다. 나중에 공사가 다 끝나 도로가 정비되고, 사당이 성역화 되면, 차기 문학기행반에서는 한번쯤 ‘신채호 문학기행’을 실시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삼일공원과 친일파 정춘수
낭성에서 청주로 오는 지름길은 상당산성을 넘는 길이다. 고개까지는 쉽게 올라올 수 있었으나 고개를 넘는 순간 이것은 완전히 곡예다. 꼬불꼬불한 길을 타고 산성을 내려가다 보니 스릴 넘치기도 하고 청주시내가 한눈에 확 트이게 다가왔다. 산성을 넘어 우암산 우회도로를 타고 삼일공원을 향했다. 우암산 중턱에 있는 삼일공원에는 다른 것은 볼 것 없고 독립운동을 했던 33인 중 6명의 동상이 나란히 서 있었다. 왼쪽부터 은재 신석구(殷哉 申錫九), 우당 권동진(憂堂 權東鎭), 청암 권병덕(淸菴 權秉悳), 의암 손병희(義菴 孫秉熙), 동오 신홍식(東吾 申洪植), 청오 정춘수(靑吾 鄭春洙) 등이 그들이다.
그 중에서 정춘수 동상은 허리가 잘린 상태로 동상 받침대만 덩그러니 놓여 있어서 친일파의 말로를 보여주었다. 그럼 정춘수는 어떤 사람인가. 동상 뒤에 정춘수에 대한 공적을 이렇게 적어 놓고 있다.
청오 정춘수 선생은 기미독립운동의 민족대표인 33인 중의 한 분으로 청원군 가덕면 두산리에서 출생하여 재질이 뛰어나 약관에 이미 경사(經史)에 밝았으나 국운이 기울어져 일제가 침략하자 구국의 뜻을 품고 활동 무대를 찾아 해외로 향하다가 깨달은 바 있어 기독교 안에 들어가 뜻을 펴고자 경성협성신학교(京城協成神學校)를 졸업하고 감리교 목사로 전국 각지를 순회하며 종교 운동을 통하여 청년들에게 민족정신을 고취하였다. 1919년 파리 평화회의가 열리어 민족자결론이 제창되자 이 땅에 독립운동의 기운이 움트게 되어 기독교, 천도교, 불교의 연합전선이 이룩되니 선생은 당시 원산 남촌동 남감리교회 목사로 동북지방의 독립운동을 주도하여 민족 대표로서 독립을 선포하였다. 출옥 후에도 독립 항쟁을 계속 하여 1934년에는 비밀결사 흥업구락부 사건이 탄로되어 장기간 옥고를 치루었고, 77세로 서거하니 사회장으로 엄수되어 강내면 궁현리에 안장되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우리가 흔히 알기로는 모든 문헌에 2.8독립선언 때 독립선언서에 서약한 33인 중의 한 사람이며, 2.8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1년 6월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석방된 뒤 계속독립운동을 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그 후 감리교 목사로서 ‘감리교 을사5조약’ 결의하게 된다. 그리고
1938년 조선감리교 제4대 감독이 되고,
1940년 ‘국민정신 총동원 조선감리교연맹’을 지도하였고,
1941년 ‘국민총력연맹’의 문화위원, ‘조선임전보국단’의 평의원,
1944년 ‘조선전시종교보국회’ 창설 이사직을 맡으면서 친일파로서 앞장서게 된다. 그는 감리교를 ‘대일본제국 조선감리교단’이라 바꾸고, ‘애국기 헌납 및 교회 병합실시에 관한 건’, 상동감리교회를 신사로 개조하여 ‘황도문화관’을 세우는 등 교역자들을 신사참배를 강요하고 부일 협력과 친일행위를 부추켰다.
정춘수의 독립선언부문과 초창기 독립운동 치적만 가지고 동상을 세워놓은 것을 ‘충북사회민주단체연대회의’에서 친일문제를 들고일어나 1996년 2월 7일 삼일운동 77돌을 맞아 친일파 정춘수의 동상을 철거하기에 이르렀다. 몸이 잘린 동상 받침대를 보면서 독립운동가와 대조를 보이면서 친일파에 대한 경각심을 다시 한번 불러일으키게 했다.
삼일공원을 뒤로하고 청주시내에 있는 고인쇄박물관을 향했다. 시간이 없어서 들려보지는 못하고 기행 때 국문학과 학생들에게 필요한 인쇄문화의 역사를 보여줄 것을 기대해본다. 고인쇄박물관 건너편에 청주예술의 전당이 우람하게 자리하고 있었고, 그 앞마당에 민족사학자 단재 신채호 동상이 친일파 김기진과 정춘수를 질책하기라도 하듯 떳떳하게 버티고 서있었다.
팔봉리 김팔봉 생가
정작 중요한 것은 문학기행 김기진편 답사인데 김기진에 대한 볼거리가 너무 없어서도 그렇고 주객이 전도된 듯하기는 하지만 어째든 이제 김기진의 고향을 찾아 팔봉리로 떠난다. 청주톨게이트 입구에서 청원쪽을 향하여 직진해서 내려가다 보니 팔봉리 입구가 나온다. 입구에서 도로 공사중인 자갈밭 길로 2㎞를 가다보니 마을이 보이고 여기쯤일 것 같아 동네사람한테 물어보니 가르쳐 주기는 한데 별로 관심 밖이다.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보니 마당 한가운데 ‘井觀 金復鎭 先生 生家’라는 표석이 서있었다. 김복진(1901~1940)은 김기진의 형으로 우리나라 조각가의 대가이며, 조각이론을 정립한 사람이다. 마당에는 동네사람 몇 명이 모여서 부침개를 부쳐먹고 이제 파장 분위기다. 남아있는 두 개를 먹으라고 주니 고맙게 받아먹기는 하지만 어쩐지 조금밖에 못 준 것에 대한 미안한 감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아직 익지 않은 시디신 청포도 한 송이를 따서 시골인심을 표시한다. 김기진家가 이사간 1908년경부터 3대가 여기서 계속 살아왔다는 집주인 임현일씨는 이 집의 내력을 간략히 설명해주기는 한데 어쩐지 내가 알고 있는 것처럼 어설프기만 하다. 김기진은 이 집에서 태어나 5세까지 산 것 외에는 전혀 흔적이 없다. 5세 때 서울로 이사간 뒤 부친이 영동군수로 내려오자 영동보통고보 2학년에 편입했다. 이 집의 골격은 그대로 남아있고 기와집으로 되어있던 것이 너무 낡아 15년 전에 슬레이트 지붕으로 개량했다고 한다. 기행 때 다시 찾아뵙기를 기약하고 팔봉리교회로 향했다. 같은 팔봉리지만 고개를 약간 넘어간 마을 입구에 초라하게 교회 첨탑이 세워진 건물이 보였다. 팔봉리교회 건물 마당 한 귀퉁이에 ‘김기진 선생이 태어난 곳’이라는 표지석이 놓여있었다. 김기진의 누이가 이 교회를 다녔기 때문에 이 교회에다 표지석을 세워 놓았다고 한 마을사람이 귀뜸 해준다. 마을 노인들만이 한적한 동네 정자에 둘러앉아 담소하고, 가까운 논두렁에서 풀벌레소리만 간간이 들려오는 나무그늘 안에 쭈그리고 놓여있는 김기진 표석은 친일에 대한 사람들의 외면 같은 것으로 다가왔다.
화양리인가 팔봉리인가
김기진에 대한 문학기행은 너무 간단하다. 단지 생가와 교회 앞에 있는 표석이 고작이니 말이다. 어제 저녁에 내려와서 오늘 점심까지 계속 화양계곡에서 놀다가 정작 김기진 기행의 답사를 위해서 할애한 시간은 1시간밖에 안된 것 같다. 이번 기행은 놀러 가는 기행인지, 여름피서를 즐기러 가는 것인지, 아니면 청주지방의 문화유적을 답사하러 가는 것인지, 김기진에 대한 문학공부를 하러 가는 것인지, 우리가 기행 가는 곳이 과연 어디가 주고 어디가 부수적인지 분간이 안 가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너무 늦게 시작한 답사일정으로 오후 6시 반이 되어서야 모든 일정을 마치고 고속도로 청주톨게이트에 올랐다. 가랑비가 운전석 앞 차창에 부딪치면서 운전자의 눈꺼풀을 살살 간지러 준다. 멀리 차창 왼쪽 넘어엔 불그스름한 저녁노을이 플래툰에 나오는 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이라도 하듯 너무나 황홀하게 펼쳐져 있었다. 오늘새벽 화양계곡에서 산책할 때 날이 밝아오면서 공지선이 굵어지는 것처럼 석양노을 속에 서쪽 지평선이 하늘과 긋는 획은 너무나도 선명하여 졸렸던 윗 눈섭을 가만히 눌러 앉힌다.
답사 뒷얘기
7월 마지막날 동아리방에서는 한참 상반기 감사가 진행되고 있을 때, 나는 포천 베어스타운에 출장 중이었다. 잘됐다 싶어 시간을 내어 포천군 내촌면 마명리에 있는 김기진 묘를 찾기로 했다. 일과를 마치고 저녁시간에 짬을 내어 마명리 서릉관광묘원을 찾았다. 묘원만 찾으면 금방 묘지를 찾을 것이라는 기대와는 달리 묘지관리사무소에 직원이 없어서 위치를 물어볼 수도 없었다. 물론 동네사람들이 알 턱이 없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꼭대기부터 뒤지기로 했다. 그런데 여느 공동묘지와는 달리 나란히 정렬이 되어있지 않아 올라갔다 내려갔다 반복을 해야만 했다. 아무리 찾아다녀도 김기진의 묘지는 보이지가 않는다. 마침 조선시대 문인 조우인의 묘가 보였고, 우리나라 화가의 스승이라 불리는 청전 이상범 화백의 묘지가 눈에 띄었다. 그러나 정작 김기진의 묘지는 아직 찾지 못했는데 자꾸만 날이 어두워지는 듯 했다. 묘지와 묘지 사이에 걸쳐있는 거미줄들이 온몸을 감싸고 얼굴에 붙어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온몸은 땀으로 뒤범벅이 되어 옷이 축축이 젖어있었고 얼굴은 땀이 비오듯이 흘러내렸다. 날이 더 어둡기 전에 빨리 찾아야 할 터인데 왜 이렇게 나타나지 않는 것일까. 안 나타나면 어쩌나, 아니야 조금만 더 찾으면 나타나겠지, 혹시 여기가 아닌 것은 아닐까. 이 생각 저 생각하면서 찾아보았지만, 아무리 찾아도 나타나질 않는다. 조금 더 찾아 내려가니 커다란 호수가 나타났다. 해가 이미 서산에 넘어가 버린 뒤라 그런지 호수의 물은 마치 흙구덩이처럼 새까맣게 질려 있었다. 호수에서 주위 뚝으로 오랑케개구리들만이 신나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결국 묘지는 찾지 못하고 날은 어두워져 버렸다. 1시간 여동안 찾아 헤맸지만 나타나지 않는 김기진 묘는 도대체 어디에 있을까. 다음에 다시한번 와서 꼭 찾고 말리라.
이순원 문학기행
서영용
방송대 문학기행반의 학우들과 가족들을 태운 버스는 밤 8시를 넘어 봉평재래장터에 도착했다. 이순원 선생님을 기다리며 일행들은 주변을 서성거렸다. 제5회 봉평면민 노래자랑이 진행되고 있다. 노래가 끝나자 불꽃놀이가 대단한 광경을 연출했다.
주황색 카우보이모자를 쓰시고 이순원 선생님이 오셨다. 우리 일행은 선생님의 안내로 봉평장터를 돌아 다녔다. 강원도에서 유일하게, 아니 전국에서도 유일하게 봉평면은 인구가 늘어나는 시골이다. 한 작가가 면민을 먹여 살린다.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 작품을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장터거리는 밤이 되어서 장이 안섰다. 봉평체육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베이징 올림픽이 강원도민 체전이 되었다. 강원도 출신 3명이 금메달을 땄다고 말씀을 하신다.
일행은 충주집터에 다달았다. 허생원과 장돌뱅이들이 드나들던 술집이다. 시골마을이지만 서울사람들이 메밀꽃밭을 찾아와 현대식 마을이 됐다. 펜션문화가 전국에서 처음 시작 되었고 제일 많다. 숙소인 정동진으로 향했다. 선생님은 이효석작가를 예로 들며 버스 안에서 강연을 하신다. 한 작가의 대표작은 그 작가가 좋아하는 세계가 일치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 작가의 태생근원이 된 무대일 때, 즉 한 작가의 역사와 배경이 작품세계와 맞아 떨어질 때 대표작이 나온다. 90년대 초반, 젊은 작가들이라는 신세대들 중의 한 사람이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은 잠깐 유행하고 사라졌다. 핸드폰, 컴퓨터를 새로 사면 그 다음날 구형이 된다. 문학도 새로운 것 추구하면 5년쯤 되면 ‘내가 왜 썼을까’라는 생각이 들고 시대와 안 맞는다. 살다보면 시간의 풍화작용을 잘 견디는 게 돌이다. 그보다 더 오래 견디는 것이 문학작품이다. 숙소에 도착했다. 정동진역에서 출발하는 짤막한 기차가 기계음과 함께 창문불빛을 끌며 지나간다. 토끼장 앞에서 선생님과 둘이 있게 됐다. 선생님이 초등학교 때 학교에서 토끼를 길러서 풀을 뜯곤 했다는 말씀을 하신다. 저는 수필을 쓰고, 시를 습작하는데, 시로는 토끼를 키우는 이야기를 정서로 불러내지 못한다. 소설쓰기는 너무 어렵게 느껴진다고 말씀을 드렸다. 선생님은 웃으시며 쓰면 써요 라고 말씀하시고 자리를 옮기신다.
야외탁자에서 선생님의 강연이 시작됐다. 밤 10시 50분, 늦은 시간이다. 최회장님 진행으로 선생님은 질문을 받고 답변하는 형식이다. [은비령], [압구정동에는 비상구가 없다] 작품을 보면 서로 매치가 안된다. 소재마다 문체를 달리한다. 작품패턴은 소설을 쓸때 금방 소재를 내용으로 쓰는 게 아니라 최소 5년, 10년 마음속에 고여있던 것이다. 제목이 정해져야 글을 쓰는 작가다. 첫 문장, 끝 문장이 다 보이지 않는다. 중간 중간 에피소드는 생각난다. 첫째, 둘째, 셋째 문장이 완전하면 네 번째 문장이 나간다. 처음부터 완벽해야 한다. 완전을 지향하기에 다른 작가보다 문장에 공력을 많이 들인다. 모든 작품을 한가지로 못쓴다. 작품따라 문체의 접근법을 달리한다. 한 작가 스펙트럼 중 가장 넓다. 대학때 당구장에서, 실천문학에 실린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작품을 보고 혼자서 소설공부를 했다. 강원대 경영학과를 다녔지만 필사로 공부를 했다. 문학지팡이를 열망했다. 필사는 단어 글자를 옮기는 게 아니라 절 단위로 필사한다. 밤 12시 30분인데 뒷풀이는 끊이질 않는다. 다음날, 향가에 나오는 헌화가 배경인 헌화로를 갔다. 붉은 바위 낭떠러지 앞에 도로가 있고 바다가 펼쳐진다. 8월의 마지막 날, 한산한 경포대 해수욕장을 들렸다. 수평선과 지평선이 맞닿았다. 선생님의 생가는 산속에 있었다. 80세 동갑내기이신 부모님이 반갑게 일행을 맞으신다. 선생님의 유년의 생활이 작품에 직간접으로 녹아 있다고 학우들은 말한다. 허균․허난설헌 기념관에서 선생님의 설명을 들으며 역사의 생리를 공부했다.
일행은 늦은 점심을 은비령에서 먹기로 하고 은비령으로 향했다. 한계령을 한참 오르는데 선생님의 설명이 시작됐다. 은비령코스는 소설을 쓰면서 한 번도 안왔다. 지도를 보고, 산세, 나무군락을 보고 은비령을 썼다. 강원도 모든 사람들이 은비령으로 정해버렸다. 그래서 독자들에게 사랑 받는 좋은 작품을 써야겠다고 다짐을 했다. 은비령과 필례식당이란 간판이 있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골짜기, 푸른 나무군락, 맑은 공기가 시간을 멈추게 하고 있다. 선생님의 권유로 필례약수터로 향했다. 자연수가 아니라 약품을 탄 것 같은 톡 쏘는 느낌이 들었다. 떠나기를 아쉬워하며 서울을 향해 버스에 올랐다. 선생님은 자식들에게 죽으면 화장해서 은비령에 뿌려 달라고 유언을 남기셨다고 하신다. [말을 찿아서] 작품을 선생님이 직접 낭독을 하셨다. 섬세한 감수성의 글을 들으면서 나의 유년의 모습을 발견을 한 듯 마음이 저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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